국립극단의 <안티고네>,
화학적 결합이 아닌 산술적 결합에 그친 최고와 최고의 결합
국립극단은 말 그대로 한 나라를 대표하는 극단이다. 그런데 우리는 국립극단에 단원이 없다. 몇 년 전 단원을 모두 해촉하고 국립극장을 떠나 재단법인으로 독립한 결과이다. 국립극장에 국립극단이 없는 도저히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 기존 단원들의 나태와 안일을 원인으로 지적하는 이들이 많다. 사실이다. 오랜 세월 국립극단은 장충동 골짜기에 파묻혀 연극 동네와는 상관없는 딴 동네 극단이었다.
그러나 그게 어디 단원들만의 잘못이겠는가? 예술가들을 혼이 없는 월급쟁이로 만들어 놓고 그 위에 군림한 관료들이 있었고, 쥐꼬리만한 예산을 주면서 작품이 왜 그 모양이냐고 모욕하는 무례함이 있었고, 주차비라도 받아 수입을 올리라며 예술의 경영을 돈으로만 계산하는 몰지각이 있었고, 그 작은 자리마저 빼앗길까봐 전전긍긍하는 단원들의 소시민적 이기심이 있었다.
어쨌든 국립극단 개혁은 오래된 숙제였다. 국립극단을 없애야 한다는 과격한 폐지론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국립극단을 더 키워 성격별로 또 지역별로 여러 극단을 만들든지 아니면 동시에 상설공연과 지방 및 해외 순회공연이 가능하도록 커다란 규모로 만들어야 한다는 확대론도 있었다. 그러던 중 정부의 대책이 나왔다. 그것은 재단법인화와 독립이었다. 이에 대해 원칙론과 현실론이 팽팽하게 맞섰다. 재단법인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국립이라는 표현을 붙이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 제기가 있었고, 여기에 기존의 구태를 벗어나려면 특히 인적 쇄신이 필요하므로 완전히 새 판을 짤 수밖에 없다는 현실론이 강하게 충돌했다.
그러나 국립극장에서 국립극단이 지니는 상징성이나 국립이라는 어휘에 대한 원론적인 해석을 토대로 한 주장은 애초부터 무시되었다. 또 인적 쇄신이라는 미명 아래 모두 해촉해 버리는 과격한 방법보다는 오히려 규모를 키워 이른바 긍정적 방향의 물타기를 하고 이후 관리를 잘 하는 방법을 모색하자는 절충론도 넓은 공감대를 형성하지는 못 하였다. 정책 결정자들이야 예산의 대폭 증액이 전제되고, 또 다루기 힘든 기존 구성원들을 계속 상대해야 하는 이 방법이 당연히 싫었겠지만, 연극계에서조차 국립극단의 잘못이 많은데 더 많은 예산과 권한을 주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반대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렇게 시끄러운 가운데 국립극단의 법인화 독립은 착착 진행되었다. 해당 분야 내에서조차 의견이 심하게 엇갈린다는 것이 오히려 정부로서 일을 처리하기에 용이한 점으로 작용한 듯도 하다. 그래서 과거 단원들을 전원 해촉하였고 새로 위촉하려는 목적으로 임시 연수단원을 선발하였다. 그러나 2010년 말 손진책 예술감독이 부임하고 나서 단원 위촉은 없었다. 다만 장민호, 백성희 두 배우만을 원로배우로 모시고, 새로 자리 잡게 된 서계동 옛 군부대 터에 아예 두 분의 이름을 딴 백성희장민호극장을 만들어 예우하는 방식으로 단원과 관련한 모든 정리를 끝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국립극단은 꾸준히 뭔가를 시도했다. 과거 장충동에 처박혀 존재감이 거의 없던 때를 생각하면 많이 달라진 모습이다. 애초 찬성했건 반대했건 국립극단의 실체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사실 제도가 모든 것의 토대이긴 하지만 아무리 이상적이어도 운영을 잘못하면 나쁜 것이 되고 여러 문제를 안고 출발했어도 실제 운영에서 세밀하게 보완해가며 좋은 결과를 끌어내면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다.
물론 국립극단의 위상과 수, 규모 등에 대해서는 여전히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 국립극단에 대하여 명칭에 맞게 나라를 대표할 만한 연극인들을 모아 안정된 단원 체제로 운영되어야 한다는 원칙론이 옳은지 아니면 손진책 예술감독이 선택한 대로 정식 단원 없이 작품별로 위촉하는 지금의 방식이 옳은지 따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오히려 그것을 따지다 기본 방침이 흔들리게 될 때 입게 될 손해가 더 클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즉 예술감독이 선임됐고 그가 의지를 가지고 이미 몇 차례의 공연을 시도했다. 게다가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 시도가 확실하게 틀렸다는 증거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일단 지켜보며 각 시도의 결과를 면밀하게 분석하여 계속 좋은 방향을 찾을 수 있도록 조언하는 것이다.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손진책표 국립극단이 확실하게 자리 잡도록 응원하는 것이 옳다는 의미이다.
국립극단은 재출범하면서 2011년 초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를 공연하였다. 인류 역사상 고전 중에 고전이라는 상징성이 크게 작용한 듯했다. 그때 연출은 한태숙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한태숙과 소포클레스를 불러들였다. 바로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공연한 <안티고네>가 그 작품이다. (2013년 4월 15일-4월 28일) 국립극단과 예술의 전당, 그리고 소포클레스와 한태숙. 벌써 이 정도만 돼도 그 무게가 느껴지는 조합이다.
한태숙의 연출은 늘 논쟁거리가 된다. 이른바 찬반이 극명하게 갈리는 연극이라고 하겠다. 아마도 연극을 공연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치명적인 상태는 관객들이나 평자들의 무반응일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찬반 논쟁이 뜨겁다는 것은 일단 긍정적이다. 전혀 감흥이 안 생기게 무미건조해도 곤란하지만 불필요한 자극으로 관객을 완전히 마비시켜도 반응은 안 나올 수 있다. 또 너무 어려워도 관객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여지는 형성되지 않는다. 결국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고 또 감각과 인식이 살아 있을 때 비로소 좋든 싫든 정확한 반응이 가능한 것이다.
한태숙에게는 힘 있는 연출이라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너무 무겁고 여백이 전혀 없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따라다닌다. 특히 <맥베스>를 나름의 시각으로 해석하여 형상화한 <레이디 맥베스>는 거의 한태숙과 동의어가 되면서 에너지 넘치는 연출의 대명사가 되었다. 적어도 작년 <아워타운> 연출로 완급과 강약의 조절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렇다면 이번 <안티고네> 연출은 어느 쪽일까? 여배우가 티레시아스 역의 박정자와 안티고네 역의 김호정인 걸 보면 분명 강한 쪽 같은데 남자 배우가 크레온 역의 신구인 걸 보면 좀 다른 방향을 선택할 것도 같다. 그러나 실제 공연을 보니 역시 강한 쪽을 선택한 것이 확실하다. 아마도 작품의 성격상 그것이 맞는다고 판단한 듯하다. 사실 그렇다. <안티고네>는 너무도 분명한 성격의 인물들이 등장하여 서로 전혀 물러서지 않는 대결을 벌이다 결국 모두 파멸을 맞는 전형적인 비극이 아닌가?
한태숙은 배우 선택에 있어 대단히 까다롭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선택의 폭이 좁은 편이다. 즉 선호하는 배우가 분명한데 특히 그의 힘찬 연출을 버텨낼 만한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 에너지란 배우의 아우라까지 포함한다. 박정자와 김호정은 당연히 그런 배우이다. 물론 신구도 지금까지의 경륜과 명성까지 작용하여 누구 못지않은 에너지를 발할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오랜 TV 경력은 이 부분에서 다소나마 우려를 자아낸다.
배우가 명성을 얻는 것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들도 있다. 특히 TV나 영화 등을 통해 얻은 대중적 지명도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비록 우리나라는 연기자를 평가하는 기준이 정립되지도 않았고 매스컴 등의 영향으로 인한 쏠림 현상도 강하다고는 하지만 집단지성이라는 부분을 인정해야 한다. 즉,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은 분명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며 더욱이 그렇게 인정받은 결과 거기에 맞게 능력이 채워지는 현상도 있다는 것이다.
김호정과 신구의 대결, 그리고 예언자를 맡은 박정자의 존재. 이 정도면 기본 대립 구도는 무조건 형성될 만하다. 그런데 한태숙의 연출이 성공하려면 이 대립 구도가 끝까지 팽팽해야 한다. 극도로 긴장된 상태에서는 작은 요소 하나가 전체를 흔들 수 있다. 대결 구도에 있어 한 쪽이 미흡해 보이거나 전체가 부실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즉, 미세한 결함으로 균형이 약간만 깨져도 작품은 크게 손상된다. 한태숙이 대사의 단어 하나 글자 하나에까지 엄청나게 공을 들이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김호정은 머리를 아주 짧게 깍은 모습으로 등장했다. 표정과 차림새 모두 투사나 전사, 또는 테러리스트를 연상하게 하는 강인한 인상을 풍긴다. 대사는 일상어보다는 영탄조에 가깝다. 마치 과거 <레이디 맥베스>의 서주희가 그랬듯 시종 힘을 빼지 않는다. 물론 안티고네를 소신에 찬 강한 성격의 인물로 부각시키는 것은 당연한 해석이다. 그러나 이렇게 첫 인상부터 남성적으로 보일 정도로 형상화한 예는 거의 없을 것이다.
김호정의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 가문의 그 유례없는 비극적 전사(前史)까지 모두 담아내려고 한 듯하다. 즉 오빠들 사이의 전쟁으로 둘 다 죽었는데 한 명은 성대한 장례를 치러주고 한 명은 매장조차 금지시킨 부당한 처사에 대한 단순한 저항을 넘어서 자신의 식구들이 겪은 엄청난 일들을 모두 짊어지고 가는 고행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 무게를 감당하기에 공주의 드레스 차림이 어울리지 않을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깊은 마음의 상처를 그대로 드러내는 어두운 얼굴과 자살 테러를 감행하는 투사의 모습은 이미지의 극대화를 위한 한태숙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에 비해 신구의 크레온은 훨씬 부드럽다. 바로 이 부분이 문제이다. 과연 이 부드러움이 연출의 선택인지 아니면 안티고네에 비해 상대적으로 에너지 분출이 약해서 초래된 부정적 결과인지 따져봐야 한다. 만약 후자라면 그 책임은 신구에게 돌아간다. 안티고네와 크레온은 작품의 중심이고 대사가 많다. 그 많은 대사를 구사함에 있어 김호정의 안티고네는 강렬한 영탄조인데 반해 신구의 크레온은 일상의 어조였으며 더욱이 평소 TV 드라마에서 자주 보이는 독특한 어미 처리 습관까지 그대로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이것이 연출의 선택이었다고 해도 문제는 남는다. 앞서 얘기했듯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대결은 결코 한 쪽으로 기울면 안 된다. 그런데 한 쪽은 강인하고 한 쪽은 부드럽게 선택했다면 그건 잘못된 조합이 된다. 물론 부드러움으로 능히 강함을 이기거나 또는 대등한 힘을 이루는 조합을 생각했을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역설적 조합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내기는 머리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신구라는 배우의 지명도와 경륜으로 충분한 에너지 발산이 가능하다는 계산은 옳았다. 그러나 그가 많은 대사를 소화하고 경사진 무대를 이리저리 옮겨가는 동안 연륜이 아닌 노쇠함으로 여겨지는 이미지가 형성됐고 결국 김호정이 만들어낸 에너지에 밀리는 상황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아마 신구의 대사를 아주 간결하게 줄이고 움직임도 최소화했다면, 그렇게 침묵이라는 대사와 부동이라는 동작을 주요 수단으로 삼았다면 신구라는 노배우의 장점이 훨씬 잘 발휘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렇게 볼 때 박정자는 처음부터 유리했다. 일단 두 번밖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부터 커다란 장점이다. 세상이 다 아는 대배우가 잠깐만 나온다 할 때 그 배우가 많은 시간 머물게 되는 무대 뒤는 그 자체로 엄청난 무게감을 지닌다. 물론 관객들이 계속 박정자는 언제 나올까 의식하며 기다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의식이건 무의식이건 머리 한 쪽에는 언젠가 나올 것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박정자가 나왔다. 무대 뒤에 형성됐던 그 무게감이 고스란히 무대로 옮겨지는 순간이다. 대사는 역시 영탄조이다. 게다가 짧고 간결하다. 중량은 큰데 길이는 짧으니 밀도가 높을 것은 당연하다. 그렇게 박정자는 간단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곤 홀연히 다시 무대 뒤로 이동한다.
<안티고네>의 전체적인 기조는 긴장이다. 특히 임일진이 디자인한 경사진 무대는 그 긴장을 배가시킨다. 물론 의상, 조명, 음향도 모두 이 긴장을 돕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래서 장면 하나하나가 모두 강렬하다. 심지어 죽어 있는 시체부터 강렬한 이미지로 처리되고 있다. 그렇게 처음부터 비극의 분위기에 맞는 무대와 의상, 조명과 음향이 이어진다. 결국 다시 또 한태숙의 여백이 없는 연출이 거론된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특히 비극을 다루는 한태숙의 특징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사실 여백이 있으면 좋고 없으면 나쁘다는 법칙이 존재하는 것도 아닌 이상 오히려 자신의 예술적 취향을 끝까지 밀고 가는 것이 유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태숙의 <안티고네>는 최고의 배우와 최고의 스태프들을 모아 만든 작품이다. 그러나 최고와 최고가 만나 이룬 결합은 중심 배역인 김호정과 신구 간의 불균형으로 다소 손상되었고 이것은 이 작품으로 하여금 최고와 최고의 화학적 결합이 아닌 산술적 결합 정도에 그쳤다는 평가를 받게 하는 요인이 된다. 못내 아쉬운 대목이다.
한태숙은 이른바 정상의 배우와 정상의 스태프들을 모으는 재주를 지니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아마 과거의 국립극단이라면 전속단원들의 존재가 상당히 거북하였을 것이다. 배우와 스태프에 대한 선호가 너무도 분명한 연출들은 자기의 선택과 상관없이 누군가와 함께 작업해야 하는 상황에 대해 크게 호의적이지 않을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국립극단이 현재 누리고 있는 자유는 일정 부분 예술에 기여하고 있는 듯도 하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이면이 있기 마련이다. 이 경우의 자유가 분명 생산성에 도움을 주기는 하지만 자칫 판단력에 문제가 생길 경우 아무런 안전장치가 없는 위험한 상태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섣부른 인물의 교체가 전체적인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대부분의 정부 산하기관의 책임자들은 임기가 있고 그것은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예술과 관련하여서는 이 원칙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 특히 안정된 전속 체제가 아닌 늘 새로운 선택을 해야 하는 현재의 국립극단 체제라면 2년이나 3년에 한 번씩 책임자가 교체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물론 현재 국립극단이 정말 잘 하고 있는지 늘 감시하고 지적할 필요는 있다. 사실 어린이극 추진에 대해서는 영역을 너무 확장한다는 우려도 있고, 특히 작가나 연출에 있어서 전체적인 인력풀이 너무 좁다는 불만들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부정적인 평가로 의견이 모아지는 경우가 아니고 역시 찬반양론이 존재하는 상황이라면 좀 더 길게 지켜보는 것이 국가를 위해서나 연극계를 위해서나 옳은 태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