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신영미

                      공생하는 열정에 대한 물음 – 연극 <red> 

 

                                                          신영미(이화여대 박사수료)

 

원작: 존 로건(John Logan)
번역: 성수정
연출: 김태훈
출연: 강신일, 강필석
제작: 신시컴퍼니
공연기간: 2013.12.21.~2014.1.26
공연장소: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레드1

레드2

 

 

예술의 상업화, 대중화를 부정적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시대가 도래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의 미학적 가치만큼 경제적 가치 또한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팝아트를 비롯한 특정 미술 사조가 예술을 접할 일반 수용자층의 저변을 확장하고 활력을 불어넣은 것은 사실이다. 심지어 최근에는 ‘누구나 아티스트가 될 수 있다’를 표방한 유화그리기 키트도 판매중이다. 숫자가 적힌 캔버스 위에 동봉된 붓으로 같은 숫자의 물감을 채워 넣는 간단한 방식이다. 일명 성인용 색칠공부로 밍키나 세일러 문이 아닌 리히텐슈타인 작품 속의 여성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이렇게 미술과 무관한 일반인이 제작자로 참여할 만큼 예술은 대중의 일상에 깊이 침투해 있다.

7년 전 리움미술관에서 마크 로스코의 전시를 봤을 때, 스탕달 증후군은 고사하고 ‘도대체 어디서 숭고함을 느껴야 하지?’란 의문이 들었다. 물론 타블로의 크기에 압도되어 굉장한 작품임을 체현했으나 그 이상의 것을 느끼지 못했다. 수직으로 배열된 직사각형의 색면으로 관람객을 영적인 관조의 자리까지 오르게 하겠다는 화가의 의도가 전달되지 않은 것이다. 필자는 르네상스 시대에 모사 기술로 예술의 재능을 인정한, 또 카페에 걸린 팝아트를 보며 기분 좋아지는 딱 그 수준에 머물러 있다. 연극 <레드>는 마크 로스코가 이런 필자의 취향을 끔찍하다고, 작품과 제대로 된 관계를 맺으라고 호통하는 것으로 읽힌다.

<레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중심의 미술시장을 뉴욕으로 옮기는 데 공을 세운 추상표현주의 화가 마크 로스코에 관한 이야기다. 극은 씨그램 빌딩의 벽화 의뢰 사건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현대 건축의 거장 필립 존슨이 설계한 뉴욕 씨그램 빌딩에 최고급 레스토랑이 오픈하고, 로스코는 그곳을 장식하는 대가로 거액의 계약조건을 수락했다. 이때 작업실의 조수로 등장하는 젊은 화가 켄과 반목하며 예술의 순수성과 본질, 철학적인 사유들에 대해 언쟁하는 것으로 극이 전개된다. 초반 마크 로스코는 상업적 이윤 추구와 순수 예술의 본질 사이에서 상호 모순되는 균열된 예술가로서 존재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켄의 집요한 추궁과 통찰로 상업적 프로젝트를 거절하고 예술에 대한 열정을 회복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서사이다.

먼저 작품에 적합한 무대와 소도구가 인상 깊다. 무대와 객석의 벽을 허물어 등장인물의 감정 변화가 관객에게 즉각적으로 전달된다는 점에서 2인극을 명확히 살릴 수 있는 무대였다. 극장에 들어선 순간 관객은 사실적인 장치들로 인해 무의식적으로 극에 몰입하게 된다. 유화 냄새, 담배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고 무대 중앙과 뒤편에 설치된 거대한 작품들로 작업실의 리얼리티를 구축했다. 좌측에는 대량의 클래식 LP와 축음기가, 우측에는 다양한 안료와 붓통이 대형 선반에 놓여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무대 양 끝에 있는 이동식 스탠드다. 연극 <레드>에서 조명의 역할은 단순히 무대를 밝히기 위한 용도에서 나아가 강한 미장센을 주는 연극언어의 장치로 활용되고 있다. 극이 진행되는 동안 배우들은 무대 위에서 조명의 밝기를 직접 조종한다. 로스코와 켄이 작품 전시에서 조명의 중요성을 언급하는 순간, 갑작스럽게 관객석이 밝아진다. 옆 사람의 기미가 적나라하게 보일 정도로 환해지자 관객들은 어색할 수밖에 없다. 관객석을 향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대화하는 두 사람의 시선을 마주한다는 게 내심 불편하다. 일종의 낯설게 하기로 관객의 몰입이 깨지며 두 사람의 대화가 그림이 아닌 관객을 향한 것으로 치환된다. 그 순간 관객은 마크 로스코의 벽화가 되는 연극적 체험을 하고, 이어 궁극적으로는 성찰하고 사유해야 하는 대상이 된다. 스스로의 취향을 의심하고 끊임없이 사유해야 한다는 맥락에서 로스코는 칸트가 말한 취향의 함양을 요구하는 것이다.

마크 로스코는 “언젠가 블랙이 레드를 삼켜버리는 것이 두렵다.”고 토로한다. 로스코에게 블랙의 의미는 즐거움을 위한 수단으로 예술을 이용하는 현대인, 예술을 비즈니스로 격하시키는 큐레이터, 미술평론가, 팝아트, 상업화 등이다. 미에 대한 근원적인 고민이나 인문학적 교양 없이 일시적인 즐거움을 위한 예술은 숭고한 레드를 집어 삼키는 블랙으로 이분화 됐다. 마크 로스코는 지금을 뛰어넘는 무엇, 관객을 사유하게 하는 그림, 붓질 한 번에 비극이 담긴 작품을 추구하는데 이는 전언했던 취향이나 가치관의 문제와 직결된다. 켄은 로스코가 블랙을 인격화시켜 악의적으로 보는 편협한 시각에 일침을 가하지만, 로스코는 램브란트의 작품 ‘벨사살의 향연’을 언급하며 독단적인 자의식을 굽히지 않는다. 덧붙여 작품 안에 묘사된 램브란트의 히브리어가 형편없다는 식으로 평가한다.

마크 로스코는 켄에게 위대한 작가를 평가하지 말고 침묵한 채 존경하라 비난하지만 그 역시 전 시대 사조인 큐비즘을 짓밟아 숨통을 끊어놓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추상표현주의 화가이다. 게다가 자식은 아버지를 존경하되 살해해야 한다는 살부의식도 언급하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로스코 자신을 겨냥한 말이 된다. 부모가 없는 켄에게 로스코는 내면화된 부성애로 상징적인 아버지 역할을 수행하고, 켄 역시 아버지의 상징질서를 위반하고 흔드는 아들의 모습으로 상정되기 때문이다.

본인을 제외한 예술가 모두 배고파야 한다는 로스코의 말에는 이중적이고 모순된 사고방식이 내포되어 있다. 로스코는 부르디외가 규정한 예술의 순수성과 미학적 우월성에 헌신하는 가난한 예술가 상도, 상업주의로부터 침투된 타율적 영역의 장에서 인정받고자 한 욕망의 예술가도 아니다. 그는 소비의 사원에 거액의 돈을 받고 그림을 판매한 위선자다. 더욱이 자신의 그림으로 기득권층의 입맛을 떨어트리려는 숨은 악의가 있었다. 결국 자신도 팝아트처럼 예술을 수단으로 이용하려 했음을 자각하고 상업적 계약을 파기한다. 이 두 사람의 대화는 상대의 모순과 불일치를 지적하며 변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상담의 한 형태인 직면과도 같다. 프로이드 식으로 과거의 상처를 기억하고 언급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러한 과정을 거쳐 피상적인 수준이 아닌 깊은 수준의 통찰을 얻은 느낌이다. 로스코의 변화를 종용한 것은 켄이지만 켄 역시 성장해서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예술의 장으로 나간다는 점에서 두 사람 모두 정체되어 있지 않다. 이로써 인식론적 변화 없이 사조 또는 시대가 바뀌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다소 해소된 듯 보인다.

두 화가가 모차르트의 흥행사에 맞춰 경쟁하듯 밑칠을 하는 장면은 압권이다. 계란 노른자와 안료를 개서 물감을 만든 후 로스코는 좌측 상단부터, 켄은 우측 하단부터 캔버스를 채워 나가는데 이는 일출과 일몰의 은유로 읽힌다. 의식을 거행하는듯한 격정적인 붓질이 비슷한 속도로 진행해 중간에서 만나 완성된다. 갈등이나 전복이 아닌 이해와 공생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매우 적절한 장치이자 퍼포먼스였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장면에선 예술가의 철학적인 고민과 페이소스까지 전달됐다. 이 극은 표면적으로는 미학과 미술 사조에 대한 언쟁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순환하고 변화하는 인간의 삶에 대해 천착한 이야기다. 문제는 광의의 개념으로 볼 때 세대 간의 갈등과 이해, 소통이라는 주제의식이 독창적이지 않아서 익숙한 클리셰로 전달될 위험이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의 순수성을 회복한 구세대가 상징적으로 거세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사조, 세대에 긍정적인 영향으로 이어질 것을 암시하기에 진부한 결말로만 치부할 수 없다. 다만 후반부에 마크 로스코의 자살을 암시하는 장면이 연극 안에서 전개되는 극적 상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코믹 릴리프로 작용할 지는 의문이다. 한편 연극 <레드>는 2인극의 형식이라 배우의 호흡이 매우 중요한데 명확한 갈등 구조와 팽팽한 긴장감을 강신일, 강필석 두 배우가 밀도 있게 재현했다. 여기에 의미망을 형성하는 음악 장치, 조명 모두 극의 완성도에 기여했기에 전체적으로 균형 있는 작품이라 판단된다.

5미터의 거대한 벽화 앞에서 관객을 응시하는 로스코의 눈은 당신의 레드가 무엇이냐고 묻는 듯하다. 이는 곧 각자의 레드를 규정해서 끊임없이 사유하라는 눈빛이다. 커튼콜도 배우 강신일이 아닌 로스코의 눈빛으로 관객석을 주시한 상태에서 암전된다. 배우의 시선 처리로 커튼콜까지 연극의 연장이라는 느낌을 준 연출의 의도가 신선했다. 검찰에서 全 일가의 미술품 중 마크 로스코의 작품을 추적했다는 정보를 들었다. 현대미술 작품과 관련된 소식을 문화면이 아닌 사회면에서 자주 듣는 게 아닐까 싶어 씁쓸하다. 이렇듯 연극 <레드>는 작품의 본질과 무관하게 수요되는 미술품과 예술가의 철학적 사유에 대해, 또 비단 예술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일반 관객, 나아가 인간이 살아가면서 품어야 할 열정이나 가치관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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