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사이, 그 간격을 메우는 법
2014 봄 작가 겨울 무대 <미사여구 없이>
장윤정
작가: 허진원
연출: 민새롬
장소: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일시: 2014. 1. 14 ~ 2014. 1. 29
미사여구. 아름다운 말로 듣기 좋게 꾸민 글귀를 의미한다. 꾸밈말이기에 문장에서 필수요소는 아니다. 자칫 문장을 지리멸렬하게도 만들지만 때론 긍정적 효과를 일으키기도 한다. 그런 미사여구 없이 살아보는 것에 대하여 연극은 말하고 있다.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매개로 하여. 그것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지는 알 수 없다. 뚜렷한 결말도 없으며 그 결과에 대하여 책임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다만 ‘미사여구 없이도 한 번 ….’ 이라는 삶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새로운 삶의 방식을 권유하는 것이다. 그렇게 극은 사랑이야기를 하면서도 마냥 사랑이야기가 아니었다.
무대는 사선 방향으로 길게 구성되어 있다. 전면에는 하얀 테두리의 사각형 틀이 놓여있고 뒤편으로 갈수록 좁아진다. 마치 사각뿔대를 눕혀놓은 모습과 같다. 객석을 기준으로 오른쪽 벽면과 천정에는 반투명한 흰색 막이 설치되어 공간의 실내외가 구분된다. 하얀 벽면은 스크린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왼쪽 벽면과 뒤편은 검은 천을 설치하여 공간을 더욱 입체적으로 만들었다. 2인극인데다 프롤로그 이후 단 한 번도 조명이 꺼지지 않기 때문에 무대의 역할이 컸으리라 짐작된다. 이렇게 무대에 대한 인상이 구체적인 이유는 뛰어난 원근감과 상징성 때문이다. 어딘가 모르게 비뚤어진 느낌의 무대는 정형화되지 않은 내용을 기대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이내 그에 적합한 심상치 않은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연극의 내용은 간단하다. 28세의 두 남녀가 육체적 관계를 나누고 10년 후 다시 만나 사랑하는 이야기다. 친구 사이의 남녀가 사랑을 운운하는 내용은 다소 상투적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사여구 없이>가 결코 진부하지 않았던 이유는 날것의 대사 덕분이었다. 역설적이게도 <미사여구 없이>의 대사는 미사여구로 점철되어 있다. 다양한 인용과 은유, 비유들이 연극 중반까지 휘몰아친다. 헤매기 쉬운 그 속에서 중심을 지탱해주고 있는 것은 일상적인 언어였다. 비뚤어진 무대처럼 정제되지 않은 언어들이 속사포처럼 터져 나왔지만 익숙한 언어였기에 알아듣기 쉬웠다. 또, 20대 남녀 사이에서 충분히 오갈만한 대화와 상황은 젊은 관객층의 공감대를 쉽게 형성하였다. 더불어 재치 넘치는 표현들로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2인극을 재미있게 만들고 있었다. 2인극에서 재미란 연출해내기 쉽지 않은 요소다. 1인 다역(多役)이 있지만 물리적으로 2명만이 등장하는 공연에서 거대 서사를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또, 자칫 단조로운 상황 속에 함몰될 위험이 공연 내내 도사리고 있다. 그렇기에 2인극에서 대사의 힘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오랜 시간 관객의 주의를 끌 수 있는 것은 배우의 역량 외에 대사의 역할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연극은 성공적이었다고 생각된다. 특유의 재기발랄한 대사로 상투적인 상황을 무마하고 관객의 흥미를 유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관객과의 소통도 자연스레 가능해졌다.
이 연극이 의미 있었던 것은 단순한 사랑이야기가 아니었던 점이다. 방동구와 윤서현, 28세의 두 남녀는 비가 오는 날 본의인지 본의가 아닌지 즉흥적으로 잠자리를 갖는다. 여자는 표상선배라는 남자친구와 헤어질 만큼 다퉜던 날이었고 남자는 한창 소설가의 꿈을 키우던 중이었다. 이들은 절친한 친구사이였고 그렇기에 서로에게 가릴 말이 없었다. 결국, 한 번의 관계 이후 서로 다른 목적과 생각으로 끊임없는 말싸움이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진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드러난다.
먼저, 사랑에 대한 남녀의 심리적 차이가 나타난다. 한 번의 관계 후 남자는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혀 사랑이 느껴지지 않던 남자였기에 여자는 당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남자는 다르다. 그가 전부터 여자를 사랑했었는지, 진심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육체관계를 가진 후 ‘사랑’ 한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여기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사랑’에 대한 남녀의 접근방식 차이다. 공연 내내 두 남녀가 성별에 따라 서로를 비교, 분석, 주장, 항변하고 있기에 개인보단 남녀차이에 가깝다고 판단된다. 결국 여자는 육체적 교감 이전에 정신적 교감으로 사랑을 인식하고 남자는 육체적 교감으로부터 정신적 교감이 발전하는 상황이다. 재밌는 것은 10년 전과 후, 남녀의 상황이 역전되는 점이다. 10년 전, 관계직후 자신의 감정을 사랑으로 확신하는 남자와 달리 여자는 혼란스러워하며 현실을 부정한다. 그러나 10년 후, 사랑 때문인지 여성편력 때문인지 모를 남자의 태도와 달리 이번에는 여자가 뜬금없이 ‘사랑’한다고 말한다. 비록 여자가 10년 전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는 듯 보이지만 그 조차 뜬금없다. 10년 전 여자는 남자를 스토커로 고소하고 접근금지가처분신청까지 했었다. 그 후 처음 만나 이미 표상선배와 결혼하여 아이까지 있는 상황이니 여자의 태도가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서로 이해하기위해 의도적으로 입장을 바꿨어도 상식적으로는 납득하기 어렵다. 이렇게 작품은 남녀 사랑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남녀사랑에 초점을 두고 보면 도저히 해석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애써 해석하자면 남녀의 사랑은 이렇게나 모호하고 설명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라고 정의하겠지만, 매우 무책임한 결말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진정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소통이다. 사랑의 외피를 걸친 채 던지고 있는 화두는 소통이었다. 남녀 간의 소통에서 나아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에 대하여 연극은 말하고 있다. 공연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끊임없이 대화하는 두 남녀가 이를 반증한다. 끊임없이 대화하지만 그들의 대화는 각자 자기 발언들일 뿐이다. 자기변호, 자기 고백, 자기 미래, 모두 각 개인의 입장으로 가득하다. 어떤 말로든 자신을 대변하고 싶었기에 미사여구로 가득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하지만 그럴수록 본질은 가득한 미사여구 속에 가려지고 만다.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 20대의 이들은 그렇게 본질을 회피하고 있다. 미사여구로 가득한 20대 동구의 소설처럼. 복지에 대한 논쟁을 벌이면서도 뉴욕의 삶을 부러워하는 서현처럼. ‘사랑’에 대하여 논하지만 정작 본질적으로 사랑은 회피하는 이들처럼. 결국 서로 소통을 원하면서도 소통되지 않는다. 다행인 것은 10년의 시간을 보낸 이들이 각자 성숙해졌다는 점이다. 10년 후 동구의 소설과 이들의 대화 속에 미사여구가 상당히 사라졌음에서 알 수 있다. 이제 더 이상 에둘러가지 않는 것이다. 10년 후 동구는 소설가로 성장하며 성숙의 시간을 가졌고, 서현은 결혼 후 삶에서 인고(忍苦)의 시간을 거치며 성숙해졌다. 부유한 결혼생활을 하던 친구의 자살시도 또한 서현을 성장시켰을 것이다. 성숙은 소통의 가능성을 가져왔고 소통은 각자의 외로움에서 시작되었다. 이혼의 과정을 거치며 육체적 관계에서 안정을 찾는 동구. 결혼 후 삶에서 점점 자신을 잃어가는 서현. 이들은 각자 외로웠으리라. 그렇기에 서현은 그 누가 되었든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며 동구는 그것이 당황스럽지만 싫지 않은 것이다.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 것만이 가장 이해받는 소통의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서현은 ‘동구’였기에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면 동구만이 가장 서현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고양이 마을 이야기에서 나타난다.
동구는 서현에게 고양이 마을 이야기를 해준다. 어떤 한 사람이 기차를 타고 가다 고양이 마을에 내렸는데 결국 고양이도, 사람도, 아무도 그를 보지 못하더라는 이야기다. 마냥 지나가는 기차 앞에서 손만 흔들게 되던 이야기. 그 사람이 마치 서현과 같다고 말한다. 10년 전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손만 흔들고 있는 것 같다고. 아마도 그것이 서현의 진심에 와 닿았으리라 짐작된다. 공연이 끝나고 하얀 벽면에 짧은 장면이 상영되는데 한 여인이 지나가는 기차 앞에서 그저 손만 흔드는 장면이다. 마치 서현의 모습과도 같다. 결국 서현은 10년 전부터 지금까지 아무에게서도 진정으로 이해받지 못했던 것이다. 서현이 말하거나 움직이는 곳에 시종일관 고양이 소리가 들리거나, 대답 없는 전화 또한 상징적으로 이 점을 묘사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것을 동구만이 알아보았으니 ‘사랑’한다고 할 수 있었으리라. 아마 이제는 서현에게 더 이상 대답 없는 전화가 울리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작품은 ‘소통’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쉬운 것은 정작 제목 그대로 미사여구 때문에 본질이 가려지고 있는 현상이다. 이들의 사랑과 육체적 관계가 너무 대부분을 차지하여 정작 소통에 대한 이야기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진심으로 의미파악에 집중해야지만 겨우 짐작해볼 수 있을 정도이다. 한 두 번 보고 지나칠 관객에게는 과도한 요구다. 그러니 대부분의 관객들은 그저 가벼운 이야기로 여기며 유쾌하게 웃고 지나쳐버릴 뿐이다. 더군다나 버젓이 가정이 있으며 심각한 문제없는 주부 서현의 ‘사랑’ 운운과 즉흥적인 육체관계는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행동의 당위성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 또한 소통에 대한 문제의식이 잘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결과다. 역설적으로 연극 전반을 차지하는 미사여구 때문이라 짐작된다. 특히 갑작스런 체홉의 <세 자매>인용은 작위적인 느낌을 전했다. 연극 공연 속에서 연극을 언급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 자칫하다가는 관객들에게 연극과 거리감만 느끼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체홉 같은 경우는 고전 중의 고전이기 때문에 위화감 없이 자연스럽게 표현되어야 한다. 철저히 현대적인 이야기가 진행되는 와중에 뜬금없이 등장하게 되면 관객은 어색함을 느끼며 팔짱만 끼고 보게 될 수 있다. 이외에 스웨덴의 ‘뉘그렌’을 언급한 것 또한 자칫 지적 허영으로 느껴지게 만든다. 물론, 서현의 성격을 알 수 있기에 나름의 역할이 있는 예였다. 그러나 좀 더 보편적인 인물이나 상황을 예로 드는 것이 관객의 이해를 더 도왔으리라 생각된다. 사실 관객은 스웨덴의 복지체계를 알 필요도 없고, 스웨덴의 ‘뉘그렌’을 알 필요도 없다. 다만 서현의 성격을 알기 위해 듣게 되는 것이다. ‘뉘그렌’의 상황에 대한 설명은 충분하였으나 이미 낯선 이름과 낯선 공간에 대한 예였기 때문에 관객은 그 순간 거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체홉과 뉘그렌, 둘 다 극 중에서 전혀 의미 없는 장치는 아니었다. 단지 이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예들이 좀 더 자연스럽고 보편적이며 쉽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일상적인 언어로 애써 형성한 공감대를 자칫 과한 예들로써 무너뜨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미사여구 없이>는 아쉬운 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면에서 의미 있는 작품이었다. 미사여구로 자신을 대변하기 보다는 솔직하게 미사여구 없이 자신을 바라보길 권한다. 미사여구로 점철되었을 땐 남에게 나를 보이기 바쁜 시간이었다. 반면 미사여구가 사라지는 순간은 내가 나를 진정으로 바라보게 된 순간이다. 즉, 가득한 미사여구로 본질을 회피하지 말고 미사여구 없이 용기 있게 나를 마주해보라는 권유의 연극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한편으로는 이 작품이 봄 작가 겨울 무대의 작품이었기에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신춘문예 등단 자들은 등단이후 꾸준한 작가 활동을 이어가기 쉽지 않다. 그런 면에서 <미사여구 없이>를 봄 작가 겨울 무대의 작품으로 만난 것이 반가웠다. 일회성으로 그치기에는 아까운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주제의 명확성이 드러나도록 수정과 보완의 과정을 거친다면 충분히 지속가능한 공연작품이라 짐작된다. 그렇기에 새롭게 거듭날 <미사여구 없이>의 미래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