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미래를 걱정해야 하는가?/ 우상전

우리는 왜 미래를 걱정해야 하는가?

우상전(연극배우)

‘세월호’ 침몰사고가 터지자, 몇 해 전 ‘동아연극상’ 시상식에 갔다가 충격을 받은 현장이 새삼 다가왔다.

이미 뮤지컬의 ‘쓰나미’에 ‘연극호’가 침몰상태에 빠졌는데도, 연극상 심사자는 평을 통해 내용도 모를 연극에 ‘자가도취’ 되어, 자그마치 10년여 만에 대상을 받을만한 명작이 나왔다고 스스로 만족해하면서 너스레를 떨고 있지를 않나,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시상자는 ‘감격에 겨워’ 자기 혼자 횡설수설, 해외공연 이야기로 20여분을 (너무나 한심해 시간을 재고 있었음) 일관성도 없는 이야기로 수상소감을 늘어놓지를 않나,

누구도 나서서 말리는 사람도 없고, 본인도 말을 멈출 생각도 없이 마냥 지껄이고 있었다. 마치 사이비 종교의 교당에 와 있는 느낌을 받았다.

‘연극호’가 침몰하는데 위기의식은 고사하고 연극인으로의 소명의식조차도 없어 보였다.

이미 한국연극은 강력한 뮤지컬의 공격에 직면해 침몰 위기에 처해 있는데도 스스로 자기 과시와 만족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대표적’ 연극인들의 모습은 정말 ‘세월호’의 선장만큼이나 이기적으로 보일 뿐이었다.

요사이 새로 ‘셰익스피어학회장’으로 취임한 안병대교수가 국립극단의 <템페스트> 공연 프로그램에 흥미로운 글을 올렸다.

“셰익스피어 말기, 로맨스 극의 탄생은 1603년 제임스 1세 이후 연극계의 변화와 대단히 밀접히 관련된다. 궁정에서는 음악과 춤이 어우러진 볼거리 위주의 가면극이 유행하고 있었고, 그가 소속한 왕실극단은 1608년 최초로 인공조명을 이용할 수 있고 새로운 기계장치를 도입한 블랙프라이어즈 실내극장에서 공연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새로운 상황에 부응하여 모험을 감행했다.

그는 비극의 세계가 나타내는 ‘절대적 종말’을 극복하고 불가사의한 부활과 재생을 이루어 내는 희극적 환희를 담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냈다.”

천하의 셰익스피어도 당시로는 뮤지컬인 볼거리위주의 ‘가면극’에 대항해, 위기를 극복하고자 과감히 모험을 감행해 새로 탄생시킨 게 그의 ‘로맨스 극’이라고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가 무대의 기계적 발전에 적응하려는 노력으로 <템페스트>에 스펙터클한 장면들이 삽입되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이번 공연에서 그 당시의 셰익스피어의 고뇌를 담아 한국연극의 지금의 현실과 견주는 이야기를 삽입했더라면 참신하고 개성적인 공연으로 ‘셰익스피어 축제’를 빛냈을 거라는 생각을 한번 해본다.

그런데도 우리는 (셰익스피어도 아닌 주제에) 앉아서 안이함에 빠져 변화를 외면한 채 ‘마스터베이션’만으로 일관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연극은 여전히 현실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누구 뭐래도 우리는 호사가인 ‘아마추어’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마냥 ‘엘리트주의’에 빠져 보잘것없는 자존심에 의존하며, 앉아서 지원금, 복지타령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입으로 그의 탄생 450주년을 떠들게 아니라 그의 ‘창작정신’을 본받는데 의미를 두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연극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단적으로 관객을 향한 공감과 감동일 것이다. 이를 매개하기 위해, 또 그들을 극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시대의 ‘유행’을 읽어야 하고. 또 관객에게 볼거리를 제공해 재미를 주어야 하는데, 우리는 여전히 내용 이해도 불가능한 연극에 호들갑을 떨고 있으니.

많은 연극인들은 ‘이기주의’에 빠져 좋은 환경의 공공극장이 생겨도 앉아서 미래에 대한 기대는 저버리고 소극장 타령만 하고 있으니 ‘연극호’의 침몰은 당연지사가 아닌가.

셰익스피어 시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잡스러운(?) 오락이 넘쳐나는 요즘 세상에서 우리 연극은 어째서 시대의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또 어떻게 변화해야 미래에도 생존이 가능할 것인가를 아직껏 고민조차도 해보지 못하는 연극동네가 된 것일까?

세상이 바뀌어 이미 민주화가 진행되었고, 경제는 먹고 사는 것에서 벗어나 국민들은 주5일 근무를 외치며 ‘즐길’ 것을 찾아 고어텍스를 사 입고 산천을 누비고 있는 게 요즘의 한국의 현실이다.

아무리 ‘일거리’가 없고, 경제적 불황을 외치도 ‘보릿고개’를 넘기지 못해 아우성치던 과거의 한국이 아닌지 않는가.

시상식의 고명하신 연극인들은 초대받은 것만으로도 흡족해하며 성의 없는 박수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연극의 위기를 경고해야 할 학식 있는 사람들이 외려 무감각과 매너리즘에 빠져 무감각으로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는 곳이 연극판이다.

어쩌면 ‘너나 잘해!’ 하는 비아냥거림이 무서워 마냥 떨고만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미 ‘연극호’는 무너져가고 있는데

젊은 연극인들은 흔히 이렇게 말하기 일쑤다. “연극판은 오래 버티면 뭐가 되어도 된다면서요.” 하지만 ‘세월호’에서 알 수 있듯이, 일단 수평을 잃은 배는 마냥 기다린다고 해서 다시금 복원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해주고 있다.

한번 기울기 시작한 배는 기다려 보았자 침몰해 죽음을 맞이할 뿐이어서 오로지 ‘뛰어내리는 게’ 유일한 생존을 위한 길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게 ‘세월호’의 참사다.

지금 ‘연극호’도 마찬가지다.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밖을 보지 못한 채) 객실에 앉아 – 배에 탄 단원고생들처럼 심사와 평가자가 내뱉는 ‘기다리라’는 방송만 믿고 있다가는 ‘물귀신’ 되기 안성맞춤일 것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연극호’는 엉터리 선주, 자칭 구원파(?)인 연극판의 엘리트주의자들에 의해서 균형을 잃고 서서히 침몰에 길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저 그들의 말을 믿고 대학에서, 대학로에서 마냥 기다리며 ‘자기의 청춘을 버리는’ 젊은 연극인들이야말로 구원파에게 전 재산과 노동을 받치며 천국을 기다리는, 결국 교주의 치부와 행복을 위해 노력할 뿐인, 희망에 들뜬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아랍의 문화

나는 오랫동안, 그저 삭막한 사막으로 둘러싸여 있는 중동의 아랍 국가들이 고대에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사실에 많은 의아심을 품고 있었다.

지금이야 ‘석유’라도 나오지만, 그때는 아무 것도 없는 오아시스 부족일 뿐인 그들이 한때 어떻게 인류문화를 주도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요사이 한 경제학교수의 글을 읽고 이런 의문이 풀렸다.

그들이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경제적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그들만의 여건(지정학적, 자연적)이 존재해 있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번영과 몰락에는 다 나름의 경제적, 문화적 ‘배경’이 존재해 있게 마련이라는 사실이다.

1. 그들에게는 낙타라는 거대한(?)운송수단이 있었다. 그래서 사막을 용이하게 넘나들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인도에서 낙타가 운반하는 엄청난 짐을 보고 경악한 적이 있다. 말과 소가 ‘1톤’ 트럭이라면 낙타는 ‘5톤’ 트럭에 비유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짐을 운반하는 것을 목격하고 놀란 적이 있다.

 2. 황량하고 드넓은 사막을 상인들이 관통하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었지만, 다른 나라들과 달리 사막에는 강이나 밀림이 없어 이동거리가 짧고, 맹수의 위험이 없었다는 이득이 있었다는 것이다.

3. 기후가 건조해 병원균이 서식하기 어려워 질병에 걸리거나, 물건이 변질될 위험이 적어서 무역을 통한 경제적 번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경제적 번영을 기반으로 여러 나라와 문화교류가 가능했고, 나중에는 육로뿐만 아니라 지중해를 통해 유럽인들과, 또 인도와 동남아시아까지도 해상교역을 하는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인간사의 흥망성쇠의 배경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존재하기 마련이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다.

우리가 ‘세월호’에 절망하는 것도 이게 우연히 발생한 참사가 아니라는 인식 때문이다. 누적된 한국의 모든 사회적 부조리가 한꺼번에 터진 사건이라서 모두에게 너무나 회한이 큰 것이다.

우리 연극인들도 한국연극의 지정학적 특성, 문화적 배경, 종교와 역사적 고찰은 물론이고 세계연극사와 동양연극사 등을 통해 우리의 역사적 자산과 타국의 현실과를 비교 터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명확히 인식할 것은 근본적으로 한국연극이 동아시아 3국 중에서도 가장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것, 또 우리에게는 전통극의 기반이 없어 여태껏 ‘아마추어리즘’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점일 것이다.

우리의 연극사

내 글을 읽은 은퇴한 고승길교수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너는 왜 동양연극사를 가르치지 말라고 하냐?” 당연히 ‘무식’하다고 퉁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맞는 말이다. 무식한 소리다. 하지만 나에게도 할 말이 있다.

‘역사를 가르치려면 제대로 가르쳐야 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솔직히 들어서다. (나의 짧은 생각에는) 한국연극사만 제대로 가르쳐도 연극판이 이렇게 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우리가 연극사만 제대로 배웠어도 이 꼴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첫째, 이성계가 세운 조선조는 (요즘 말로 하면) 전혀 ‘공연문화’나 연희나 예능에 무능했다. 아예 관심조차 없었다. 그저 하는 짓이란 (말년으로 갈수록) 당파싸움이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조 말년의 모든 왕들이 ‘독살설’에 시달리는 것만으로도 이미 왕권은 신하들의 붕당정치에 의해 맥을 못 추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흔히 망국의 역적으로 이완용을 꼽는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매국노가 되었는가를 역사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조선조의 막판까지 기득권 당파였던 ‘노론’의 세력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오로지 그가 한 일이라곤) 노론인 이완용이 자기 당파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서둘러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일본이나 중국의 전통극을 보면 너무나 부러움이 앞선다. 우리의 ‘연희문화’가 무관심 속에 홀대받고 있던 것과는 달리 그들은 찬란한 전통극 문화를 꽃피웠던 것이다. 그들과 우리는 전통예술의 유산과 역사에서 너무나 격차가 크다.

(신분마저도) 그저 ‘광대’나 ‘기생’에 지나지 않을 뿐, 연희자들도 전혀 ‘연극성’을 갖지 못한 너무나 초라한 천민계급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래서 궁중이나 양반들이 즐기는 격조 있는 ‘귀족예술’로도 발전이 불가능했고 그저 천민을 위한 놀이에 지나지 않았을 뿐, 그런 대접밖에는 받지 못했다.

중국의 경극을 본 브레히트가 이거야말로 인류의 최고의 ‘공연자산’이라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는 일화는 우리로서는 그저 부러움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대만의 경극배우 둘이서 국립극장 해오름 무대에서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한 적이 있었다. 그들의 탁월한 발성과 몸의 유연성은 놀라움의 극치였다. 이처럼 그들에게는 제대로 된 ‘전통극’의 유산이 존재하므로 해서 여전히 뛰어난 연기, 연출술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미약한 연기술과 연출기법에 머물러 있는 것은 조선조가 유교의 원리주의에만 매달려 제대로 된 전통극 하나도 만들어내지 못한 유산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결과 우리에게는 연극창작의 DNA가 없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다.

그에 반해 정치싸움의 DNA는 풍부해 지금도 대통령만 뽑히면 ‘탄핵소동’을 벌리고. 퇴진압력으로 날을 지새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새삼 유전자의 위대함(?)을 실감할 수 있다.

둘째, 현대의 ‘신극’의 역사로 오면 더욱 한심하다. 겨우 일본의 영향으로 발아한 신극마저도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묶여 대부분의 연극인들이 김일성에 속아 월북한 후, 북한에 가서 ‘숙청’ 당하는, 남북분단의 비극으로 막을 내려 아무런 유산도 건져내지 못한 비참한 역사가 이어지고 있을 뿐이다.

이런 비극적인 역사는 결과적으로 한국연극에 ‘프로정신’을 실종시킨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선배들이 남북분단으로 소멸되지만 않았어도 한국연극이 오늘날까지 이런 초라한 ‘아마추어리즘’에 빠져 허우적거리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현재의 한국연극은 불행한 한국역사의 결과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니 우리의 예술사에서 연극이 제대로 된 ‘전통’으로 바로 설 수가 있겠는가!

이래서 여태껏 ‘아마추어리즘’의 고리를 끊어내지 못한 채, 한국연극은 툭하면 ‘외래종’의 침략에 무방비로 당하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 하에서 아무런 기술도 전문성도 갖지 못한 사람들이 연극인 행세를 하려니 자연히 ‘아마추어리즘’을 ‘엘리트주의’나 ‘아카데미즘’으로 포장시킬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어떤 사회적 변화에도, 이를 인식하는 능력에서도 항상 부족함으로 일관 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을 것이다.

마치 사고를 접하면 그저 쩔쩔매기만 하다가 (해난구조의 매뉴얼도 없이) 해체되는 수순을 밟는 ‘아마추어 해경’과 한국연극은 너무나 닮아있지 않은가.

이런 배경으로 인해 연극은 60년대 영화와 TV가 밀려들어오자, 다시금 90년대 ‘뮤지컬’의 물결이 밀려오자, 한국연극은 하루아침에 기반을 잃고 구석에 쳐 박혀 숨을 죽이며 ’복지타령‘만을 일삼는 한심함으로 일관하고 있을 뿐이다.

‘황소개구리’의 교훈

지금 한국의 산천은 외래종인 황소개구리에 의한 ‘생태계 파괴’로 엄청난 신음소리를 내고 있는 게 현실이다. 식용으로 키워보겠다는 짧은 생각으로 이 외래종을 수입을 했는데, 이게 생존력이 너무 강해 토종 물고기를 몽땅 잡아먹어 골칫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건 국민들에게 즐거움을 주겠다고 무작정 수입한 한국의 ‘뮤지컬 현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지금 이 ‘외래종 공연’의 무분별한 수입으로 한국연극은 기사상태에 빠져 있는 게 숨길 수 없는 현실이다.

일본 연극판의 현실과 비교하면 우리의 자화상을 쉽게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거야말로 ‘프로정신’이 자리 잡지 못한 연극의 역사가 빚어낸 참혹한 현실임을 부인하기 힘들다.

제대로 된 ‘전통극’이 존재하지 못한 나라에서 무분별한 외래문화의 수입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일본이나 중국과의 비교를 통해 명확히 알게 해주는 사례다. 그러니 뮤지컬이 한국의 토종 창작극(연극) 세상을 초토화시키는 것은 ‘식은 죽 먹기’ 일 것이다.

따라서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서도 연극은 늦게라도 ‘프로화’된 연극전문가와 ‘프로정신’을 살려내는 게 급선무일 것이다. 해경처럼 ‘어리버리’해서는 장래에도 생존이 불가능할 것은 너무나 뻔하지 않은가!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앞서야 할 게, 기술의 축적을 통한 진정한 의미의 ‘프로 연극인’을 길러내어 이를 통한 기술수준 높은 상급의 ‘연극호’를 새롭게 건조해 예술의 바다에 띄우는 것만이 최상의 길일 것이다.

극작은 말할 것도 없고, 배우와 연출은 물론이고, 평론가마저도 지금처럼 ‘아마추어리즘’에 머물러 있는 한, 한국연극은 앞으로 지속될 ‘외래종’의 침입에 속수무책으로 생존을 위협당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통찰을 통해서 현재 우리가 놓여 있는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1. 극작에 ‘사랑이야기’가 부재하다는 점

2. 관객과 마주치지 않는 비현장인이 한국연극을 주도하고 있는 점

3. 극작가가 여전히 연출가를 겸하고 있는 점

4. 배우를 양성하는 과정이 너무나 부실한 점

5. 흥행을 죄악시(?)하는 점

세상은 어느 장르를 불문하고 수많은 ‘사랑이야기’로 넘쳐나고 있다. 그런데도 한국연극에는 ‘사랑이야기’가 없다. 이는 아직도 우리 연극인들이 정신적으로 ‘미성숙’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나는 간주하고 싶다.

아직도 예술이 외설이 될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우리 연극인들은 성에 관한 한 극심한 ‘결벽증’을 보이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게 한국연극에 ‘사랑이야기’가 없는 원인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연기만 해도 그렇다. 국립극장에 있을 때 깊은 자괴감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오로지 연극만이 기본기 없이 무대에 오르는 장르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럼 연출은 어떤가? 이번에 모스크바의 골든마스크 축제에 다녀온 한국공연예술센터의 박계배 이사장은 ‘극장과 나’에 이런 글을 남기고 있다.

“한마디로 연출문법의 경연장이었다. 여기엔 무대디자이너들도 한몫 했는데 너나할 것 없이 무대 위에서 금기시 돼왔던 물, 불, 밀가루 등을 원 없이 동원하여 그야말로 물불 안 가리고 빠지고, 뒹굴고, 뿌려댔다.

원로들의 연출 작품들은 젊은 연출 뺨칠 정도로 템포 있고 에너지 넘치는데다 깊이까지 더해 작품마다 신선하고 묵직했다.” 우리와 너무나 비교되지 않는가!

결국 한국연극의 ‘아마추어리즘’이 한국연극을 외래문화와의 경쟁에서 언제나 존재감을 잃게 하고 있으며, 아무리 우리가 신극 100년이라고 떠벌려도 결국 우리는 ‘아마추어리즘’에 발목이 잡혀 있는 꼴이다.

우리 연극인의 반성

여기서 분명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게, 연극인들이야말로 ‘토종물고기’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생존을 책임지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물고기’처럼 무방비로 ‘외래종’에게 당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고기야 자기가 생태계를 바꿀 능력이 없어 그렇다지만, 연극인은 (셰익스피어처럼) 스스로 이를 예측하고 판단해서 자신의 처지를 바꿀 능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물고기마냥 그저 ‘환경단체’들의 도움만을 기다리고 있어서야 되겠는가. 그저 자신의 미래를 예감하지 못하는 ‘물고기’와 다름없이 행동해서야 되겠는가.

어째서 뮤지컬이 공연예술의 대세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가를 파악하는 능력조차도 (인지능력마저도) 없어 보이는 게 우리다. ‘침몰’을 모르고 선실에서 하염없이 ‘카톡’을 주고받으며 기다리고 있는 어린 학생들처럼 보일 뿐이다.

연극은 유사 이래 그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 항상 경쟁관계에 있는 오락물에 대항해 끊임없이 생존을 위한 투쟁과 몸부림을 멈추지 않았다.

현대연극이 난해성을 취하면서도 현대연극은 연출적으로- 즉 연기나 무대미술, 영상이라도 동원해 관객들에게 현장감 넘치는 뛰어난 볼거리를 보여주기 위해 미적 감각과 지혜를 총동원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저 ‘아마추어리즘’에 매달려 (구태의연한 태도로) 단순성(?)만으로 앉아있기도 불편한 소극장무대의 부활만을 외치고 있으니, 관객들의 외면을 면치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우리의 과제

내 생각에 한국연극의 ‘프로화’와 ‘활성화’를 가로막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연극인들의 상업화에 대한 두려움 또는 알레르기성 거부감에 있다고 여겨진다. 왜 그럴까? 연극인들이 겉으로는 ‘엘리트주의’를 내세우지만, 안으로는 전문성과 프로화를 도모할 능력이 없음을 스스로 인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마추어리즘’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연극판에서 할 일이 없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엘리트주의자’를 고수하면서 연극에서의 변화를 막으려고 안간 힘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거기다 고령화 사회가 되가니 점점 미래가 두려워져서 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그래서 툭하면 ‘상업주의’라고 매도를 하고 나서는 것은 아닐까? 자신들은 대학에서 월급이 나오니 ‘생존’에는 걱정이 없고, 그래서 연극판에 앉아서 잘난 척만 하면 대접을 받는데 부족함이 없으니 그저 앉아서 연극을 ‘실험’과 ‘상업’으로 구분하는 데만 온 힘을 기우릴 뿐 아닐까?

자본주의 하에서는 ‘예술’이 성공하려면 당연히 대중성을 확보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를 상업성이라고 매도를 하니 한국연극이 ‘아마추어리즘’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예술로 성공한 연극이나 연극인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면서 오로지 ‘실험예술’이나 ‘실험성’에만 가치를 두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래서 기술수준의 낙후만을 조장시키고 있을 뿐인데도.

모든 예술이 성공하면 ‘대중성’을 가져야 하고 이게 ‘상업화’로 이어지는 게 자본주의의 상식인데, 우리 연극계는 자신들이 ‘프로화’에 자신감을 갖지 못해 대중화내지는 상업화를 겁내하고 있는 것일 거다. 이런 패배의식이 ‘프로화’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지금 ‘셰익스피어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한국연극이야말로 ‘대학극’정도의 아마추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도 연극인들은 이 정도만으로도 예술성이 충만하다고 여기는 듯하다. 그래서 ‘구닥다리’ 연출과 연기에 박수만 나와도 그저 흡족해 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니 자연히 어른 관객들과 소통이 불가능해지고, 그러니 당연히 ‘프로화’가 어려워지고 있으며, 객석은 어린 학생들로 채워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대중화와 상업화가 불가능해 지원금, 복지타령밖에 할 게 없다.

거기다 무대기술에 대한 지식이 없는 이론가들에 의한 안목이 평가와 심사기준이 전부이니, 당연히 모든 공연이 ‘재미와 볼거리’와는 거리가 너무나 멀어져 있는 게 현실이다.

이러니 당연히 동시대 관객들과의 교류나 소통에 무관심할 수밖에 없어, 다른 장르와의 경쟁에서도 밀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악순환을 벗어나려는 노력과 실천이 없이는 한국연극은 영원히 ‘아마추어리즘’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어떻게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하는가?

혹자는 ‘지원제도’를 아예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제는 연극공연의 성과를 관객에 의한 ‘시장경제’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유경쟁체제에 맡겨 적자생존의 원칙이 적용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면 한동안 연극은 양적, 질적인 면에서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나 대신에 연극계의 부조리와 불합리가 한순간에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러니까 요즘 식으로 말하면 국가적 차원의 ‘연극개조’를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지원제도’가 연극인들의 안이함과 나태함만을 불러오고 ‘기득권자’들에게 소일거리만 제공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른 혹자는 ‘지원제도’를 없애기보다는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즉 지금처럼 ‘공평무사’함만으로는 아무런 발전을 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욕을 먹어도 ‘발전가능’한 집단이나 사람에게 ‘선택과 집중’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의 가장 심각한 고민은 누가 이 역할을 수행할 ‘권위’를 갖느냐 하는 것일 거다.

가령 대기업의 문화재단이 자기들의 판단에 의해 선별하면 말이 없겠지만, 정부나 지자체처럼 국민 세금을 사용할 경우에는 말썽의 소지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처럼 공평무사한 지원제도로는 문제를 해결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 대안으로 지원제도의 ‘계량화’를 주장하기도 한다. 즉 연령으로 제한하거나 아니면 평생 받을 수 있는 지원회수를 정하든가, 아니면 관객동원 인원(흥행)으로 정하든가 하는 것이다.

이런 주장 이면에는 심사자들의 안목을 믿을 수 없다는, 다시 말해 현행 이루어지고 있는 심사제도에 대한 불신이 깔려있음을 부정하기 힘들다. 좌우간 이는 지원제도에도 어떤 식으로든지 공평이 아닌 ‘경쟁’을 도입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곁들여 연극인들의 모순된 사고를 탓하는 사람들도 있다. 국립극단 예술감독이 ‘비현장인’ 이라고 사퇴를 요구하면서 왜 시상이나 심사는 ‘비현장인’이 맡아도 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항상 고분고분 따르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연극제작에 대한 지원제도를 포기하고 연극인들의 개개인의 활동에 의한 개인복지를 늘리는 방향으로 지원제도를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상당히 일리 있는 주장이기도 하다.

연극공연장의 풍경

대형 뮤지컬 공연 첫날 초대받은 연극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하나 같이 자기 부인이나 자녀들을 대동하고 구경을 오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그런데 연극 공연에는 첫날 이런 광경을 보기가 어렵다. 그러니까 연극인 가족 모두가 나서서 구경을 하는 장르는 불행이도 연극이 아니라 뮤지컬인 셈이다.

우리 가족부터도 ‘재미없다고’ 연극구경을 마다하는 게 현실이다. 지금 연극공연은 이런 처지에 놓여 있는 게 현실이다. 자신들의 선배나 후배가 공연에 관계되어 있어서 마지못해 구경을 간다고 해야 하나? 그러면서도 ‘지루하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에 떨면서 극장 문을 들어서는 게 현실이다.

하긴 70년대만 해도 연극은 상당한 대우를 받았던 게 사실이다. 아직 영화나 TV가 예술성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여서 공연이 ‘지루해도’ 참고 보았다. 또 번역극은 나름의 예술성을 담보해서 한국연극이 상당한 지적예술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그리고 80년대 민주화를 열망하던 시절에도 역시 연극은 나름 ‘지성적’ 예술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월요일도 쉬지 않았고 그것도 밤낮으로 2회 공연을 했으며, 토, 일요일도 하루 두 번씩 꼬박꼬박 공연을 했던 게 사실이다.

이런 연극이 ‘찬밥신세’를 면치 못하게 된 것은 바로 민주화가 정착되고 나서부터다. 그러니까 정치, 경제적으로 안정기에 들어서자, 관객들은 오락성을 찾게 되고 대학에서도 인문학이 찬밥신세가 되면서, 가장 치명타를 입은 장르가 다름 아닌 연극이 된 것이다.

거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뮤지컬’의 광풍이 불어 제킨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말년처럼’ 노래와 춤으로 그저 즐기는 공연에 관객들이 심취하기 시작하면서 연극은 공연예술로서의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여기다 한국영화의 약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또 TV드라마도 한류 붐을 이룰 정도로 장족의 발전을 이루고 있다. 어디 이뿐인가, 인터넷의 발달과 SNS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면서 전문화와 ‘프로화’를 달성하지 못한 한국연극은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동시에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이런 현실에 대한 도전은 고사하고 비판, 현실조망이나 전망, 진단, 그리고 변화를 위한 새로운 비전의 제시 없이 그저 판에 박힌 소규모의 소극장 공연 위주의 ‘아마추어리즘’에만 연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활성화’의 허구

그동안 한국연극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가 있다면 ‘활성화’일 것이다. 툭하면 ‘활성화’를 외친다. 그도 그럴 게 연극이 점점 쇠락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등장하는 게 ‘지원 대책’에 관한 논의가 주를 이룬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연극판에 가장 중요한 것은 연극인들의 ‘의식’ 내지는 ‘인식’의 변화다. 동시에 도전과 모험, 개혁의 의지를 되살리는 것이다.

단적으로 한국연극의 활성화를 가로막는 우리 내면의 장애를 극복하는 게 급선무인 셈이다. 그리고 우리 내면의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을 제거하는 일이 될 것이다.

지금 지원금이 적다고 아우성치지만 애초부터 적지 않았다. 우리 스스로가 ‘적어지게’ 만들었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떼먹고, 낭비하고,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으며, 그렇다 하더라도 ‘공연의 질적 수준’만은 추락시키지 않아 지원기관의 신뢰를 잃지는 않았어야 했다. 한국배우협회의 몰락이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이제는 우리 스스로가 자생의 노력을 보이지 않는 한, 우리를 신뢰할 기관도, 사람도 없는 게 명확한 우리의 현실이다.

어떻게 ‘활성화’를 도모할까?

오래 전부터 어떻게 하면 복잡다단해진 현대사회에서 한국연극이 살아남을 것인가가 숙제가 된 게 사실이다.

먼저 결론적으로 말하면 교육기관에서부터 ‘연기과’니, ‘극작과’니 명칭부터 달라져야 한다. 이제는 ‘스토리텔링과’ 라든가 아니면 ‘신체표현학과’ 등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제는 고전적인 의미의 연극으로는 생존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왜냐면 이런 방식으로 접근해서는 좋은 인재를 영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연극을 전업으로 해서는 생존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지만 인재가 모여 들어야 활성화를 도모할 수 있다. 다른 장르의 예를 들어보면 미술만 해도 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데생’의 중요성이 사라졌다. 미술가가 꼭 손으로 그림을 그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실물사진을 캔버스에 옮겨도 충분히 미술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극도 활성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인재가 모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가령 영상촬영에 능한 사람들도 충분히 연극이라는 장르에서 자기의 표현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무대문법이 개방(?)되어야 한다.

지금 국립무용단을 이끄는 사람이 다름 아닌 제일모직에서 ‘의상 디자이너’ 로 근무했던 사람이다.

방송작가나 시나리오 작가들이 얼마든지 무대극작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한마디로 그들이 연극을 구경하고 자신들이 뛰어들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연극 스스로가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과 같은 심사나 평가시스템은 빨리 사라져야 한다. 지원금의 배분도 이제는 너무나 구태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또 하나는 아무리 좋은 공연이라는 자체 평가를 받아도 관객이 없으면, 또는 관객들의 호응이 약하면 ‘좋지 않은’ 공연이라는 인식으로 바뀌어야 ‘아마추어리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요사이 자신의 영화 ‘일대일’이 흥행에 실패하자. 김기덕 감독은 다음과 같은 넋두리를 올렸다고 한다. 우리도 새겨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어렵게 구한 극장이 텅 비는 것을 보면서 큰 절망감에 배우들에게 너무 미안하고, 제 영화에 대한 불신의 뿌리를 뼈아프게 돌아보고 반성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런 반성조차 하는 사람이 없으니.

솔직히 우리 모두가 지난날 좋은 공연으로 평가되었던 작품(공연) 중에 현재까지도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게 과연 얼마나 존재하고 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도 이제는 극작보다도 ‘연출의 기능’을 더 높이 평가하는 인식의 변화가 필요할 것이다.

창작극 중흥을 앞세워 극작가에게 모든 걸 의지해서는 영원히 생존이 불가능할 것 같아 그렇다.

너무나 위선적(?)인 사람들

지금 연극판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여성인력의 대거 진출이다. 극작가는 물론이고 연출가, 무대스텝에 이르기까지 여성인력이 연극과 공연을 주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특히 기획, 극작, 평론에서 압도적인 게 현실이다.

하지만 이런 현상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게 우리의 아픔(?)이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 극작에는 ‘사랑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 창작극에는 다음의 단어들을 붙일 만한 공연을 찾아보기 힘들다.

‘관능적’, ‘섹슈얼’, ‘에로티시즘’ 말이다. 소재도 주제도 스토리의 전개도 너무나 구태의연이고 내용도 너무나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다. 아니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모범적이라고 하는 게 더 옳을 것이다.

TV드라마에서도 항상 ‘막장’이라고 해서 말썽이 생기지만, 실제로 시청률을 확보하고 있는 것은 ‘막장 드라마’다. 즉 우리 국민들의 이중성이 문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고지식함이 연극에서도 절대로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은 어쩌면 이를 ‘상업성’이라고 하면서 매도당하지 않을까하는 ‘엘리트주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또는 ‘자기 검열’ 때문일지도 모른다.

따져보면 체홉의 ‘갈매기’도 (그 시대로서는) 서로 얽혀 사랑노래를 부르는 ‘막장 치정극’이다. 그런데 누구도 이를 상업성이라고 매도하지 않고, 이를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하지도 않는다. 단지 우리 창작자들이 이런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을 뿐이다.

연극의 생명은 객석에서 무대(배우)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현장성’에 있다. 도저히 다른 장르가 따라갈 수 없는 ‘라이브’가 강점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연극은 이런 강점을 하나도 살려내지 못하고 있다.

돈 내고, 시간 내서, 먼 길을 나서서 극장에 오면 안방에서 보는 TV만큼도 이야기가 새롭지 못하다. 맨 날 ‘그 밥에 그 나물’일 뿐이다. 판박이 소재에다 구태의연한 스토리전개, 변화 없는 무대문법으로 관객들의 아까운 시간을 빼앗고 있을 뿐이다. 단적으로 ‘19禁’도 없다. 창작자들이 자기체면 구겨질 것만 걱정하고 있는 곳이 연극판이다. 그러니 누가 이런 현장예술을 보러 구경을 오겠는가!

우리의 여성인력들은 이런 소재를 다루면 본인들이 나쁜 인상의 여자로 오해받아 처신이 어려워진다고 여기는 것 같다. 그렇다면 남성들은 또 어떠한가? 자신의 점잖고 고매한 인격에 손상이 온다고 여기는 것 같다. 왜? 직업이 교수라서. 그래서 언제나 현실성 없는 사극에만 몰두해 ‘옛날이야기’만 늘어놓기 일쑤다.

그래서 인생에 대한 통찰과 성찰이 없는 ‘모험’미달의 창조자들의 집합체가 연극판임을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영화나 시나리오작가로 진출을 꿈꾸지도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더욱 더 TV작가로도 성공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야기 구성에 서툴다.

그러면서도 이런 일련의 것들을 모두 ‘예술성’을 고양하기 위한 것으로 착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게 연극세상인지도 모른다.

‘드라마투르거’의 필요성

 극단 민들레의 송인현대표가 월간 <한국연극>의 좌담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예술가들이 (연극인이라고 꼭 집어서 말하기 힘들어 하는 말인 듯) 반성해야 할 부분 중 하나가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진솔하게 써낼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도 필요합니다.”

송대표가 중견 연극인으로서 그동안 느낀 소회를 짧지만 정확하게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기의 생각을 조리 있게 설명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들이 어떻게 많은 관객들을 상대로 설득시킬 수 있을 것이며 또 감화시킬 수 있겠는가!

이는 한국연극의 ‘프로화’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점으로 여겨진다. 한마디로 지금 한국연극은 창조자가 무엇을 말하고, 무슨 생각으로 창작을 했는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건 난해성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이는 창작자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하는 목적의식의 결핍에 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이를 전혀 중요시하지 않는 한국연극의 풍토 때문일 것이다.

이게 은연중 창작에서 목적의식과 주제의식의 결핍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건 연극인들이 ‘명확한 생각(관)’을 갖지 않고 창작에 임하는 습관성에도 문제가 있는 듯하다.

특히 번역극의 번안이나 윤색 등에서 너무나 뚜렷이 들어나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요사이 벌어지고 있는 ‘셰익스피어 축제’에서 너무나 뚜렷이 들어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창작자가 분명한 의도를 갖고 있어야 이게 명확히 상대에게 전달되게 마련인데, 아무리 공연을 봐도 그들의 공연에서 천재라고 하는 셰익스피어의 가치를 알 수가 없다. ‘셰익스피어 축제’가 무대미술의 경영장은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공연이 알맹이 없는, 이른바 ‘앙꼬 없는 찐빵’처럼 되어 버렸다.

(배우 최원석으로부터 전해들은) 안민수교수가 늘 안타까워하시는 게 “우리나라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 공연작품(연극)을 이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객석에서 무대를 이해하기가 너무나 힘든 게 한국연극이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이거야말로 창작자가 자신의 창작목적을 상실했거나 아예 모르고 시작하는 게 주요한 원인일 것이다. 그리고 이게 거의 무감각화 되어 있는 게 현실이다.

이건 연기도 예외가 아니다. 자기 자신이 무대에서 무슨 말과 짓을 하고 있는지를 철저히 교육받지 못한 게 원인이다. 한마디로 (내가 주장하는) 배우 자신의 ‘주체적 입장’이 없이 연기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 무대는 현실감(리얼리티)이 현격하게 떨어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도 우리의 무대는 이걸 실천하기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언제나 증거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독일연극에서는 ’드라마트르거‘의 임무를 부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절대로 만만한 일이 아니어서 그럴 것이다.

‘소설’처럼 상세한 설명이 가능한 장르도 아니고 ‘시’처럼 은유와 상징을 생명으로 해서 ‘상상력’을 자극하는 장르도 아닌 ‘희곡’을 텍스트로 하고 있는 연극은 정말 이를 달성하기가 절대로 쉽지 않은 일인 듯하다.

따라서 이에 대한 관심과 논의. 숙고, 성찰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게 한국연극이다. 이게 한국연극의 ‘프로화’의 가장 커다란 장애요인으로 등장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다. 그리고 이로 인해 관객들로부터 ‘관심’을 잃어가고 있는 게 한국의 연극이라고 여겨진다.

한마디로 아무리 열심히 만들어도 항상 ‘재미없는’ 연극이 되는 게 (바로 이런 것에 연유하고 있는 게) 우리 연극공연임을 부정하기 힘들다. 다시 말해 지금 한국연극의 가장 커다란 문제점은 ‘전달 기능(테크닉)’에서 너무나 무능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내가 무대에서 상대방에게 무엇을 전달할 것인가 하는 의욕도 노력도 보이지 못하니, 이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테크닉이나 형식에도 관심을 가질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우리가 현재 반성(?)하고 시정해야 할 최대의 과제가 여기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바로 나다. 왜? 이게 결여되면 영원히 한국연극이 ‘아마추어리즘’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연극에는 자연히 창작자로서의 ‘자기 이야기’가 없을 수밖에 없는지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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