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예술 지원 정책을 생각하며/ 오세곤

(제46호 편집인의 글)

또 다시 예술 지원 정책을 생각하며

예산 편성 시즌이다. 봄부터 시작해서 여름이 되면 부쩍 달아오른다. 중앙정부도, 지방정부도, 산하기관도 모두 내년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인다. 자연히 예술계도 그 방향에 촉각을 세운 채 이런저런 요구 사항들을 전달한다. 연극계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문화부, 문예위, 서울시, 서울문화재단 등을 접촉하다 보면 참으로 이상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도대체 왜 똑같은 말을 매번 반복해야 할까? 왜 예술의 가치와 지원의 필요성을 구구히 설명하고 또 설명해야 할까? 과연 국가가 왜 예술을 지원해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은 있는 것인가? 지원은 돕는다는 뜻인가? 그것은 약한 존재를 돌보는 차원의 도움인가? 결국 예술은 구제의 대상인가? 예술에 대한 지원은 빈민 구제와 같은 맥락인가?

사실 ‘지원’이란 단어가 예술에 붙는 게 적절한지부터 따져봐야 한다. 우리 삶에 꼭 필요한 물이나 공기를 지키는 일에도 ‘지원’이란 단어를 쓸 수 있을까? 예술 역시 물과 공기처럼 인간 사회를 이루는, 또는 유지하는 필수 요소라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 때도 ‘지원’이니 ‘도움’이니 하는 정도의 생각으로 예술을 대할 수 있을까?

10년 쯤 지난 일이다. ‘새예술정책’이라는 일종의 마스터플랜이 마련되던 시기였다. 그때 많은 예술인들이 지원에 대해 이야기했다. 드디어 국가가 예술에 대해 올바른 가치 인식을 한다는 희망을 품으며 속에 두고 있던 얘기들을 열심히들 쏟아냈다. 예술인과 공무원과 지원기관 직원들이 함께 세미나, 토론회 등의 이름으로 수없이 만나 머리를 짜냈다.

문화예술진흥원이 문화예술위원회로 전환된 것도 그런 분위기 속에서였다. 그것은 예술지원의 중심을 관료에서 예술인으로 옮기는 일이었다. 반대도 상당히 많았으나 대세는 찬성이었고 여러 번 실패 끝에 마침내 문예진흥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여 문예위가 출범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예술인들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차츰 깨닫게 되었다.

제도만으로는 개혁을 이룰 수 없다. 그 제도를 운영하는 사람이 달라지지 않고는 오히려 “무늬만 개혁”으로 왜곡되기 일쑤이다. 또한 제도는 계속하여 갈고 또 갈아 정교해져야 하건만 우리 사회에 그런 끈기가 발휘될 여지는 없다. 이렇게 개혁을 위한 시동만 걸었을 뿐 그것이 실제 현실에 영향을 미칠 만한 단계까지 가지 못 했기에 수많은 예술 지원 정책 제안도, 문예위 설립도 모두 공허해지고 만 것이다.

예술계는 조용해졌다. 만족해서가 아니라 절망했기 때문이다. 그런 틈에 정책은 시행하는 쪽의 편의대로 마구 재단되었다. 부작용에 대한 충분한 대비 없이 문예진흥기금이 대폭 지역으로 이관되었다. 서울도 지역 중 하나일 뿐이었다. 대부분의 예술행위가 이루어지는 서울은 그야말로 역차별을 받게 된 셈이다. 지역 균형 발전은 물론 좋은 말이다. 그러나 중심이 무너져 버린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서울의 예술이 충격을 받지 않으면서 지역의 예술을 살릴 방도를 취하지 않고 한 쪽을 죽여 얻은 에너지로 다른 쪽을 살리는 참으로 어리석은 짓을 하고 만 것이다.

문화부에선 모든 지원은 문예위를 통해서 한다고 말한다. 그래 문예위로 가면 전국적인 일이 아니면 지역에서 지원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그래 지역 문화재단에 가면 그런 항목이 없어서 지원할 수 없다고 한다. 같은 사업에 대해 중복지원은 절대 불가라 한다. 너무 청탁이 많아 계기성 지원 사업도 없앴다고 한다. 일견 그럴 듯하다. 그러나 사업의 종류에 따라서는 중복 지원도 필요할 수 있고, 미리 정해 놓은 틀에 들어갈 수 없지만 분명 지원이 필요한 사업들도 많다. 그러나 소위 효율과 형평이라는 기치 아래 그렇게 유연성이 전혀 없는 상태를 만들고 말았다.

또 하나 예술인들을 좌절시키는 게 있다. 바로 정산이다. 국민의 세금이 엉뚱하게 사용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소위 부정사용과 비효율을 막기 위한 대단히 까다로운 신청 절차와 정산 절차가 동원된다. 원래 숫자나 행정에 약한 예술인들은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다. 그런 틈에 이른바 페이퍼 전문가들이 득세를 한다. 앞뒤좌우를 정확하게 맞추는 그들을 지원기관들은 은근히 환영한다. 왜냐 하면 소위 골치 아플 일이 없기 때문이다.

도대체 비리나 부정이라는 단어가 민망할 정도로 소액의 지원을 하면서 정산은 예술 작품을 만드는 것의 몇 배 신경을 쓰도록 한다. 그러고도 예술인들은 계속 지적을 받고 고치고 또 고치고 때로 이미 쓴 돈을 물어내기까지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려면 상당한 출혈을 감수하며 페이퍼 전문가들의 손을 빌려야 한다.

예술 지원의 근본 철학이 없다. 감사원 등의 지적으로 정산이 꼭 필요하다면 예술인들을 죄인으로 만들며 몰아세울 것이 아니라 그 부분도 지원 내용에 들어가야 한다. 효율과 형평도 중요하지만 그로 해서 그늘이 생기지 않도록 살펴야 한다. 사업의 종류에 따른 유연성도 필요하다. 문예위에서는 지역의 일이라며 외면하고 지역 문화재단에서는 항목이 없어서 거절당하는 일 따위는 없어야 한다.

참으로 오랜 만에 다시 예술 지원 정책을 거론한다. 그렇게 강조하던 “맞춰서 지원, 찾아서 지원, 소액다건 무조건 지원” 등의 지원 정책 기조를 다시 주장해 본다. 돌아가는 꼴이 한심해서, 너무 짜증이 나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증에 빠져서 그냥 두고 보았지만, 세상은 그런다고 반성하지 않는 것 같다.

10년 전처럼 다시 머리를 맞대야 한다. 해봤자 소용없다는 생각을 털어버리고 다시 한 번 예술 지원의 철학을 얘기하고 정책의 방향을 주장해야 한다. 잠시 떠들다 이내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갈고 갈아 정말 정교한 제도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세워야 한다. 한 번 실패는 좋은 약이 될 수 있다. 적어도 우리 후배들은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예술을, 연극을 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지고 행동에 나설 것을 제안한다.

2014년 8월 1일

‘오늘의 서울연극’ 편집인 오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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