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호수와 뜨겁게 불타오르는 집 / 오민아

(집중, 천자평)

차가운 호수와 뜨겁게 불타오르는 집

오민아

작: 이강백

연출: 이성열

드라마터그: 김옥란

단체: 백수광부

공연일시: 2014/08/26-09/21

공연장소: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관극일시:2014/09/12 8pm.

르네상스 시대의 시인들은 역설을 기반에 둔 모순어법oximoron을 즐겨 사용했다. 그들은 모순어법을 통해 우회적으로 정치•문화적 견해를 내세우고 이를 비판했다. 어쩌면 알레고리극에 능한 이강백 작가가 이러한 모순어법을 사용해 정치세태를 풍자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최신작 <즐거운 복희>에서 상호 모순되는 듯이 보이는 이미지들을 결합해낸다. ‘슬픈 복희’와 ‘즐거운 복희’가 그러하며 이 작품의 주요 이미지가 되는 물과 불의 결합도 그러하다. 이러한 이미지들의 결합은 관객의 정서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필자는 이러한 모순적 이미지들의 병치를 보며 마치 흥미로운 이미지 놀이를 보는 것 같았다.

<즐거운 복희>의 배경은 한적한 호수 옆에 위치한 펜션촌이다. 퇴역장군인 복희 아버지의 임종이 가까워지자 펜션촌은 이웃들의 음모로 술렁거린다. 이 음모의 발단은 펜션주들이 복희 아버지가 펜션의 고객유치를 위해 정리한 인맥장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데 있다. 펜션주들은 장군의 장부를 탐낸다. 그들은 복희의 이웃에서 ‘장부의 획득과 펜션촌의 부흥’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세우고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이익집단으로 변모한다.

펜션주들은 화가, 전직 레스토랑 경영자, 전직 수학교사, 자서전 대필가 등, 그 이력이 다양하나 새로운 삶을 위해 이 곳에 몰려들었다는 데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따라서 펜션은 중요한 자산이자 새로운 삶의 공간이다. 이들에게 펜션촌의 몰락은 새로운 삶의 몰락이기도 하기 때문에 반드시 펜션촌은 부흥해야만 한다. 이들은 ‘딸을 보살펴 달라.’라는 장군의 유언으로 그들 행위의 정당성을 획득하고 자신들의 이익창출을 위한 수단으로 ‘슬픈 복희’의 이미지를 적극 활용한다.

이들은 복희를 아버지의 죽음을 매일 아침 애도하러 가는 소녀로 상품화시켜 관광객을 유치한다. 그러나 정작 복희는 이들의 움직임에는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 오히려 수동적이라는 인상마저 풍긴다. 복희는 의도치 않게 펜션주들의 바람을 충족시키고 ‘슬픈 복희’의 판타지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욕망을 충족시킨다.

이런 복희를 능동적으로 만드는 계기가 생긴다. 바로 나팔수 재섭이다. 그의 존재는 몹시 신비스럽게 처리되어 관객의 동화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재섭의 존재는 복희가 매일 매일 반복해야만 하는 슬픔을 기쁨으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내 재섭은 서울의 음악대학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복희가 능동적인 태도로 ‘슬픔’을 극복할 것을 기대하지만 펜션주들은 복희의 능동적인 태도를 반길 리 없다. 결국 자신의 것을 지키고자 하는 펜션주들의 방해로 ‘즐거운 복희’가 되려는 시도는 좌절된다. 이 과정에서 재섭이 호수에 빠져 죽고 진정 ‘슬픈 복희’가 탄생한다. 펜션주들은 한층 심화된 ‘슬픈 복희’의 이미지가 만족스럽다. 펜션주들은 재섭의 죽음과 복희의 사랑마저 관광상품화 시켜버리깅에 이른다.

<즐거운 복희>는 건달이자 미래를 예언하는 능력이 있는 청년의 대사 “호수 속에 불타는 집이 있어요. 그 집 안에 따님이 앉아 있어요.”로 정리될 수 있다. 평온하고 잔잔한 호수 속에 위치한 펜션촌은 아이러니하게도 불타오르고 있다. 각자가 목적하는 바를 위하여,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불타오르는 사회 속에 인간이 있다. 청년은 이를 예견하지만 호수는 “아무 표정도 없다.” 이는 마치 거시적인 것에 무관심한 우리 사회를 은유하는 것도 같다. 이 대사는 극 초반에 가볍게 객석에 전달되지만 극의 결말에 이르러서는 묵직하게 다가온다. 아마도 인간이 불타오를수록 호수는 더욱 깊고 차가워질 것이다.

호수를 형상화한 무대가 몹시 좋았다. 바닥재에 반사되는 인물들의 뿌연 모습이 마치 그들의 욕망에 가려져 진실을 바라볼 수 없게 만드는 안개와 같았다. 그 호수와 불의 이미지가 ‘호수 속에 불타는 집’ 자체를 그려내고 있었기 때문에 극의 분위기를 살리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작가 이강백과 연출가 이성열이라는 환상 조합에도 <즐거운 복희는>에 약 두 가지 아쉬움이 남는다. 첫 번째는 청년이고 두 번째는 복희이다. 연출이 작품 전반부 청년의 가벼움을 후반부의 무거움으로 전복시키며 메시지를 강화시키려는 연출의 의도는 알겠지만 그 가벼움을 표현하는 과정이 미흡했다고 판단된다. 청년의 설익은 랩과 시대에 뒤떨어지는 의상은 관객에게 청년을 설득시키는 과정에서 방해가 되었다.

복희를 대상으로 한 감정 또한 잘 쌓이지 않는다. 복희의 ‘슬픔’과 ‘즐거움’이 관객의 마음을 출렁이게 해야 하는 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관객들이 복희의 ‘슬픔’과 ‘즐거움’에 동조할 때, 그녀를 향한 감정이 쌓일 것이고 그 때에 이르러서만 그녀의 독백이 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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