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혈 : 섞일 수 없는 피 – 모성의 딜레마
이양숙
극작: 김민정
연출: 박장렬
공연장소: 예술공간SM
공연일시: 2014/09/26 ~ 2014/10/19
단체명: 연극집단 반
‘이혈’은 만화가 강준을 주인공으로 한 그의 이야기이지만, 조금 더 들여다보면, 아들과 어머니의 이야기이다. 이혈이란 서로 다른 피를 뜻하는 단어지만, 작품‘이혈’에서 그 뜻은 결코‘섞일 수 없는 피’의 의미로 다뤄진다. 이는 서로 한 몸 속의 하나이나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관계를 뜻하기도 하는데,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소녀 강예분이 겁탈당하고 유린당해 낳은 아들이 강한구였고, 또 강한구는 당시 그 부대 일본인 장교였던 스즈키가 아버지인 줄 알고 찾아갔으나 거부당하고 모욕당하자 그의 딸 에이코를 겁탈하고, 에이코는 아들 강준을 낳는다.‘이혈’을 보는 내내 짓눌렀던 답답함은 피해자인 강예분과, 또 다른 피해자 에이코에게 모성을 강요할 수도 없고, 그렇게 태어난 강한구와 강준가 아들로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거절당하고 외면당해서는 안된다는 이중성 때문이었다.
극에서 가장 극적이고 가슴 아리던 장면은 모든 저주의 운명을 자신의 죽음으로 종결시켰던 강준의 자살이나, 복수로 인해 직접적 연고도 없는 사람들의 얼굴을 난도질하고 혀를 뽑는 가학적 연쇄살인, 또는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자신의 손으로 처단하는 존속살인의 극악무도한 장면도 아니었다. 오히려 전체적인 분위기나 내용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마지막 장면이었다. 이 장면에서 죽었던 인물들, 특히 강준의 가족들, 강예분 할머니, 어머니 에이코, 그리고 아버지 강한구가 모두 되살아나, 마치 가족사진을 찍는 것처럼 한자리 모여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다. 같은 피를 나눈 가족이면서도 서로의 존재를 부인하고 증오해 왔던 그들은 사실 그만큼 서로를 갈망하며 사랑해 왔다는 반증 같았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것이 새삼스러웠던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이 작품이 신선하고도 의미 있게 느껴진 이유는 위안부 문제의 초점을 ‘가족관계’에 맞췄다는 데 있다. 이는 미국의 사실주의 작가이자 노예제 반대자인 해리엇 비처 스토의 대표작인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통해 고발하고자 했던 바와 같은 맥락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스토 여사는 노예제도가 폐지되어야만 하는 이유가 노예들이 사고 팔리게 되면 그들이 형성한 가족이 와해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가족’에 대한 강조는 동시대 백인들의 마음까지 움직일 수 있었고, 남북전쟁의 발발까지 이어져 결국 노예제대로는 종식될 수 있었다.
‘이혈’공연을 보고 나온 관객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같은 국민으로, 새로운 인식과 연대감을 구축해야 할 것이다. 강한구나 강준처럼 똑 같은 방식으로 복수는 할 수 없고, 해서도 안될 것이다. 사실 위안부 할머니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명예회복이라고 한다. 그들은 몸을 판 여성이 아니라 순결을 가장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짓밟혔던 여성으로, 원치 않는 임심과 출산, 그러나 모성을 발휘하지 못한 이중적 고통에 시달려야 했던 여성들이고, 그러한 상태에서 태어났던 아들, 딸들은 한 생명으로, 아들, 딸로서, 아버지, 어머니로서 존귀성을 인정받아야 하는 인간임을 재인식해야 한다. 무엇보다 가장 소중한 관계인 모자, 모녀간의 관계가 사고 팔리는 노예들의 운명처럼 그렇게 묵살되어서는 안되었다는 비판의식도 아울러 가져야 할 것이다.
끝으로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군주가 했던 작품 마지막 대사를 적으며 이 글을 마무리한다. “여길 떠나 이 슬픈 일들을 더 얘기해 보라, 용서받고 벌 받는 자들이 있으리라, 줄리엣과 그녀의 로미오 얘기보다 더 비통한 얘기는 절대 없었으니까”
사실, 로미오와 줄리엣보다 더 비통한 얘기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바로 일본 위안부 소녀들의 이야기이며 이름 없이 죽어간 많은 그녀들의 자녀들의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