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데아 네이처/ 백소연

‘악녀’에 대한 다른 상상

– 연극 <메데아 네이쳐>

 

백소연(연극평론가)

원작 : 에우리피데스 / 작가 : 홍창수
연출 : 주요철
드라마터그 : 하형주
단체 : 인천시립극단
공연일시 : 2015.01.30 ~ 2015.02.07
공연장소 :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소공연장
관극일시 : 2015.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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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조국을 등지면서까지 사랑했던 이아손의 배신에, 그의 약혼녀는 물론 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까지 무참히 살해하고 만 여인. 이 오래된 강렬한 복수담의 주인공인 메데아는 에우리피데스를 필두로 여러 세기 동안 많은 작가들의 관심을 모으며 다양한 관점에서 재해석되어 왔다. 영웅 이아손의 모험담을 성공으로 이끈 결정적 인물이었지만 메데아가 내린 극단적 선택으로 인해 그녀는 오랜 세월 악녀 혹은 마녀의 대명사로 손쉽게 기억되어 왔다. 인천시립극단 25주년 기념공연으로 올려진 <메데아 네이쳐>는 이러한 해묵은 관념에서 탈피하여 그러한 선택을 내리기까지 겪었을 인간 메데아의 심리적 고뇌와 불안에 초점을 맞추면서 상처 받은 한 여성의 모습을 설득력 있게 조망하고 있었다. 동시에 현대적 관점에서, 이아손으로 대변되는 도시 문명 혹은 근대화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비판적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연극은, 고향을 등지고 이아손을 따라 온 메데아가 그 도시의 지배자의 딸인 글라우케와 남편 이아손의 결혼 소식에 혼란스러워 하며 절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스 신화에 어울릴 법한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예상하기 쉬웠겠지만 단출한 무대에 아이패드를 소지한 여러 코러스들의 등장은 신선한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어두운 조명 아래 차갑게 빛을 발하는 아이패드들의 어지러운 움직임, 그리고 그 아이패드로 즉흥에서 연주되는 전자 기기음과도 같은 기계적 선율은 숲의 부족이었던 메데아가 낯선 대도시 안에서 느꼈을 이질감과 고독, 분노의 심리를 적절히 표현해 주는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메데아의 호소와 설득,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로운 연인과 장난스럽게 사랑을 속삭이던 이아손은 조금의 죄책감도 없이 앞으로 글라우케와 함께 나눠가질 대도시의 권력에 대한 부푼 꿈만을 안고 있을 뿐이었다.
좌절한 메데아는 급기야 부상을 입고 추격당하던 자신의 오빠와 재회하게 되면서 이아손이 자행한 배신의 전모를 뒤늦게 확인하게 된다. 황금을 약탈한 이아손으로 메데아의 아버지와 삼촌은 서로를 불신하여 전쟁을 시작하였고 그 전쟁으로 가족과 이웃은 모두 목숨을 잃었으며 고향이었던 숲은 처참히 파괴되었다. 그리고 약탈한 황금으로 대도시 지배자의 환심을 살 수 있었던 이아손은 마침내 그의 딸 글라우케와의 결혼에도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마주한 끔찍한 진실에 제대로 경악할 사이도 없이, 메데아는 오빠가 살해당하는 것을 지켜보며 겨우 죽음만을 모면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것을 잃은 채 무력하게 고통에 함몰된 듯 보이던 메데아는 이아손의 비열함에 처절한 복수의 의지를 다지게 되고, 사건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체념한 듯 평온해 보였던 메데아는 글라우케와 이아손을 만나 두 아들을 그들에게 맡기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순순히 물러서는 메데아의 모습에 글라우케는 진의를 의심스러워하며 그녀를 조롱하지만 결국은 이아손과의 정사 중 메데아가 준비한 독배를 마시고 고통스러운 최후를 맞이한다. 이아손도 글라우케와 함께 죽어가지만 메데아의 해독제로 잠시 정신을 차리게 되고, 희미한 의식 속에서 아들들이 죽어가는 모습까지 참혹한 심정으로 지켜봐야 하는 상황에 이른다. 이아손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들을 죽여 그에게 지우지 못할 처참한 고통을 안긴 메데아는 이로써 모든 복수를 마무리 한 듯 보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메데아는 주술로 숲의 영을 불러내고 나무를 심는 의식을 통해 무고하게 죽어간 생명들은 물론, 증오스러웠을 글라우케를 향해서도 애도를 표한다. 그리고 그 의식의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줄로만 알았던 아이들은 잠에서 깨어나듯 일어난다. 이처럼, 죽은 자를 위한 깊은 애도와 아들들의 소생은 메데아를 악마적 이미지로 구축하게 만든 원래 이야기의 결정적 장면들과 완전히 배치되는 부분이었다. “무고한 두 아들을 희생양으로 삼지 않는” 메데아의 이러한 행동은 도시 안에서 자연과 생명의 가치를 역설하며 탐욕에 눈이 먼 이아손을 꾸짖었던 작품 속 캐릭터에 어울리는 적절한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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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대로 <메데아 네이쳐>에서는 메데아가 지니는 상징성, 즉 자연과 생명의 가치가 거듭 역설되면서 이아손으로 대변되는 물질문명의 비정함과 권력을 향한 맹목적 탐닉을 효율적으로 비판하고 있었다. 작품의 이러한 시선 한편으로, 메데아가 보여준 입체적 면모들은 이 인물에 보다 깊이 공감할 수 있게 만드는 요소가 되었다. 이아손과 글라우케의 축하 연회에서 마치 넋을 잃은 듯 광기 어린 춤을 추거나 자신이 죽인 글라우케를 향해 애도를 표하거나 이아손에게 극도의 고통을 주려 하면서도 끝내 자신의 아들들을 해치지 못하는 일련의 행동 등은 연민 어린 시선으로 메데아의 내면과 외적 선택을 진지하게 되돌아볼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원작에 대한 이와 같은 개연성 있는 재해석에도 불구하고, 무대 위에 펼쳐낸 여러 오브제들과 음향은 특정 부분에서는 그 표현이 과잉되어 불편한 느낌을 주었다. 이를테면 아이패드와 기계적 음향은 메데아의 이야기를 지금 이 시점의 우리의 삶과 접속하여 이해할 수 있게 했지만, 도리어 극을 어지럽게 하는 요소가 되기도 했다. 또한 메데아에 대한 섬세한 접근과 달리 이아손과 글라우케를 지나치게 평면적인 인물로만 해석한 부분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보여준 일부 배우들의 다소 도식적이고 과장적인 연기 역시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으로 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과 자본의 힘에 사로잡힌 채 생명의 질서를 거슬러 살아가는 현재의 우리들에게 이 낡은 이야기가 다시 소환되어 다르게 상상된 “악녀” 메데아를 통해 새로이 발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메데아 네이쳐>는 충분히 기억에 남을 만한 작품이었다.

 

 

*사진 출처: 인천시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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