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의 자유에 대한 정치 탄압과 연극인의 생존/ 우상전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정치 탄압과 연극인의 생존

우 상전(연극배우)

 

이번에 할 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열등의식을 갖고 살자’의 제3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학로예술극장에 연극을 보러갔다가, 입구에서 시위하는 젊은 연극인들과 두 번을 마주했다. 처음에는 화가 나서 배우 강애심을 향해 퍼부어댔지만, 다음에는 이제 막 연극에 발을 들인 젊은 후배들이 추위 속에서 밤비까지 맞으며 시위를 하는 모습을 보니 정말 심정이 착잡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히 나는 젊은 시절 연극선배들을 원망하며 살아온 사람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왜 우리가 ‘흙수저’를 물고 연극을 시작해야 하는가에 대한 원망이었다.

그랬던 내가, 이제는 선배가 되어 후배들의 시위를 마냥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는 처지가 되고 보니 자신이 너무나 초라해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이제 막 연극에 발을 들인 그들이 조그마한 종이에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일렬로 비를 맞으며 말없이 서있는 모습을 보면서 하염없이 울었다.

얼마 전에 영화 ‘사도’가 상연을 했다. 우리는 사도세자를 애정의 눈으로 보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가 ‘비운의 왕세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정말 보잘 것 없는 100여명에 이르는 무고한 궁인들을 죽인 왕세자임을 우리는 간과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우리는 한사람의 권력자가 그 많은 사람을 죽이도록 방치한 조선시대의 ‘사회상’에 대해서는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때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오로지 ‘왕세자의 광기’로 인해 죽은 억울한 원혼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하긴 오죽하면 전쟁이 끝난 후 억울한 죽음을 맞이할지 몰라 이순신장군이 전투 중에 스스로 적에게 몸을 내밀어 목숨을 끊은 게 아닐까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절대자인 ‘왕이 분노하면’ 누구나 죽임을 면하기 어려운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재판이 없이 누구도 죽임을 당하지 않는다. 아니 사형 제도마저 폐지된 상태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 시대를 찬양하지 못하고 살고 있는 것일까?

혹 누군가가 이 시대가 ‘행복하지 않다고’ 강요하며 자기의 정권탈취만을 노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분명 우리가 사는 인간세상이 ‘유토피아’가 되기는 영원히 불가능한데도, 혹시 자신들이 정권을 잡으면 마치 유토피아가 될 것처럼 현혹해 추종자들을 ‘이념중독자’로 만들어버린 것은 아닌지?

그런 판이라면 무슨 말을 한들 누가 경청을 하겠는가? 그저 아무 것도 모르고 밤비를 맞으며 시위하는 어린 후배들이 가여울 뿐이다. 어쩌다 이런 연극판이 되었는지? 그저 눈물밖에 흘릴 게 없는 세상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작가 박근형교수는 ‘현역출신’인가?

 

2015년 올 한해 연극계는 문화예술위원회의 ‘탄압’에 시달리며 살았던 한해였다. 특히 그 와중에서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박근형은 최대로 핍박 대상이 된 한해였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정치얘기’는 절대로 꺼내지 않기로 약속하고 술자리을 갖는 사람들이 흔할 정도로 정쟁과 갈등이 극심한 곳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나이든 아버지와 의견이 맞지 않으면 ‘세대갈등’으로, 경제에서 견해가 다르면 ‘빈부의 차이’로 치부하며 극심한 이념대결을 벌이고 있다.

그래서 마음껏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곤 ‘음담패설’밖에 없는 나라가 됐다. 그런데도 흥미로운 것은 교육이나 문화를 이야기해도 결국 정치로 귀착되는 것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정치가 블랙홀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선거를 통해서 정권을 쟁취하면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많아서 그럴 거다. 하지만 누가 정권을 잡든 이제는 ‘국회선진화법’ 때문에 (야당이 뒤틀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듯하다. 절대적 지지를 받지 못하면 누가 정권을 잡든 ‘꽝’이라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지역감정 때문에도 누구도 절대 다수를 차지할 수 없는 게 한국정치의 현주소다.

박근형교수의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가 화제로 떠올랐을 때 나에게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박교수가 ‘현역’인가 아니면 ‘동네방위’출신인가였다.

왜? 우리는 모든 것에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가령 신을 모독하는 발언 등 금기시 하는 것들이 아주 많다. 특히 문화권에 따라서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게 마련이다. 미국에서 ‘낙태찬성’ 발언은 삼가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처럼 남북이 정전상태에 있는 나라에서, 수시로 소규모지만, 그래도 DMZ에서 ‘국지전’이 벌어지고 있는 나라에서 자칫 군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작품으로 오해될 경우 ‘출신’으로 인해 파장이 엄청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북한의 ‘목함지뢰’도발에서 말년군인들이 스스로 전역을 연기한 사건이 전 국민에게 미친 영향이 얼마나 컸나를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문재인대표마저도 안보에 소홀하지 않다는 것을 보이려고 내키지 않아도 해병부대를 시찰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나! 외려 공연이 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일지 모를 일이다. 박근형교수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투쟁’에서 무엇을 얻었는가?

 

먼저 올 한해 서울연극협회를 통한 많은 시위와 소송, 포럼, 삭발, 기자회견, 성명서를 낭독해서 연극인들은 무엇을 얻었는가? 그나마 국민들의 관심을 끌만한 정치, 사회적 이슈라도 얻었는가? 결과적으로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왜? 이제는 국민들이 구호만 듣고도 이를 ‘정쟁(政爭)’으로 받아들여 신물을 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극인들은 결과적으로 ‘마음고생’만 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모든 연극인이 불쌍한’ 한해가 되었다.’

솔직히 배우 김운하, 임홍식의 개인적인 죽음만큼도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니까 국민들은 연극인들의 생존의 외침보다는 죽음이 더 ‘연극적’ 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러니까 연극인들의 외침은 ‘정치적’= ‘상투적’이어서 감동이 없고, 그에 비하여 예술가의 흔치않은 죽음은 ‘드라마틱’해서 감동적이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올 한해 ‘모든 연극인은 불쌍했다’

 

한국은 연극의 생존이 불가능한 나라

 

불행히도 우리는 다음의 다섯 요인으로 인해 (나의 주장이지만) 연극으로 생존이 불가능한 나라에 살고 있다.

  1. 한국은 날씨가 너무 좋다. 특히 봄, 가을은 환상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야외활동을 즐긴다. 일 년에 3분의 2가 실외에서 생활하기에 너무 좋은 기후를 갖고 있다. 겨울과 밤이 긴 러시아와 비교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주 5일 근무’가 결과적으로 실내 활동인 연극의 생존을 더 어렵게 한 게 현실이다.
  1. 한국의 ‘밤 문화’는 공연예술을 접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일단 공짜로 즐길 수 있는 TV가 굉장히 발달한 나라다. 거기다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거리를 돌아다닐 수 있도록 ‘치안’이 확보되어 있다. 그러니 연극과 같은 공연예술을 접할 기회를 쉽게 박탈당하고 있다. 그러니 연극은 생존이 어렵다.
  1. ‘사회안전망’이 전혀 안 되어 있다. 연극으로 돈벌이가 안 되어도 일단 굶어죽지는 않을 만큼의 안전망은 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으니 재능이 있어도 연극에 종사할 마음이 내키지 않는 건 당연할 것이다.

그래서 연극에 뛰어들면 현장 활동보다는 생활이 보장되는 ‘대학교수’를 더 선호하며, ‘국공립극단’에서 평생을 보내려고 한다. 그래서 연극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부의 ‘지원’이고, 이를 뒷받침하는 게 ‘정치’인 게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연극인은 불쌍하다.’고 말해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1. 한국에는 (브레히트가 극찬한) 중국의 ‘경극’과 같은 전통연극이 없다. 일본의 가부키, 분락구, 노 같은 것도 없다. 그러니 한국인에게는 연극의 ‘DNA’가 아예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당파싸움을 하는 정쟁의 유전자는 풍부하다. 그래서 항상 정치싸움만은 풍부해 ‘드라마’(픽션) 보다는 ‘다큐멘터리’(논픽션)가 더 흥미롭다. 따라서 드라마인 연극이 살아남기 힘들다.

 

  1. 판소리, 오페라, 발레, 뮤지컬에서는 노래도 못하고 춤도 못 추면 생존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무대에 서는 연희자의 기량을 높이는데 전념한다. 그런데 유독 연극만은 ‘신작희곡’에만 관심을 갖는다. 왜? ‘신작희곡’이 있어야 지원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초부터 생존에 필요한 무대표현기술에 대한 욕구나 개념이 전무하다. 그러니 무대에 생동감이 없어 생존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연극인들의 생존

 

혜화역을 드나들면서 주말이면 저녁 공연시간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전철역을 메우는 것을 지켜보며 이런 생각에 휩싸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연극은 왜 이렇게 사람이 북적이어야만 생존이 가능할까? 어째서 ’관객‘이 연극의 절대 필요요소일까? 대학교수들처럼 조용히 학생들 논문지도만 해도 생존이 가능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말이다.

대학로에서 노는 강아지도, 관객이 없는 한국연극에서 필수적인 것은 지원(금)이라는 것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를 지원하는 기관이 너무나 허술하고 무능하다. 그렇다면 연극계라도 유능해, 지원기관을 잘 활용해 발전은 못해도 생존이라도 잘 유지해야 할 텐데 그렇지도 못한 게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연극인은 불쌍하다’

이번에 지원 탈락한 박근형 작의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만 해도 공모에 의한 지원금이 자그마치 편당 1억 원이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 그러니까 국제통용화폐인 미화(美貨)로 치면 10만 불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따라서 ‘모든 군인~’이라고 하지 않고 ‘어떤 군인~’이라고만 했어도 1억 원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국제환경에 밝은 분에 의하면 이런 정도의 지원은 미국에서도 상상하기 힘들다며 놀라워했다. 일본에도 이런 규모의 지원은 없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번에 지원받는 작품이 총 10편이었다니 ‘100만 불짜리’ 대규모 프로덕션인 셈이다.

이렇게 지원이 풍성한데, 연극인들이 왜 거액의 지원금을 앞에 놓고 ‘마음고생’이 컸다고 말하는 것일까? ‘동반탈락’을 두고 연극인들이 설왕설래, 눈치 보느라고 그랬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연극인은 불쌍하다.’

 

정책과 철학이 없는 문화예술위원회

 

어째서 올 한해 대학로에 소동이 끊이지 않았을까? 아마 당사자인 예술위는 억울하다고 여길 것이다. 항상 연극인들이 몸통은 건드리지 않으려고 ‘꼬리’만 잡고 흔들어대니, 시위도 청와대 앞이나 세종시에서는 하지 않고 ‘마로니에 광장’에서만 한다고 투덜거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자. ‘꼬리’일수록 ‘생존을 위한 철학’이 더 확고해야 수치를 면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야 5년마다 정권이 뀌어도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대학로에서 연극인들에게 만만하게 보여 늘 ‘동네북’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물론 정치권도 예술의 지원제도에 철학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한국의 지원제도는 그저 집권자가 ‘나도 예술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것을 내세우기 위한 일종의 ‘정치 쇼’가 전부인 게 현실이다.

왜? 한국정치가 집권에만 매달려 ‘표’가 적은 곳에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예술위만을 탓하기는 뭣하지만, 그럴수록 긍지와 책임감을 통감해야 한다. 그 이유는 이렇다.

올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미국 프린스턴대학의 디턴교수는 “개발도상국에 원조(지원)를 하는 것은 실제로는 독재자의 생존을 돕는 것일 수 있다. 따라서 ‘질병퇴치’에 쓰이는 최소한의 원조를 제외한 과도한 원조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부정적 결과가 더 크다.”

그는 남한이 북한에 원조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원조가 독재자를 도와 인민들만 수탈당하는 역작용을 일으킬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세계은행도 결국 일부 원조프로젝트를 포기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아는 ‘일반적 인식’과 달리 원조(지원)란 긍정보다는 부정적인 요소가 더 크고, 높은 위험성을 가진 정책임을 알 수 있다. 기업에서도 중소기업의 창의성과 생존력을 빼앗은 것은 정부의 섣부른 ‘지원’ 때문이라는 논의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점에서 ‘연극’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예술위는 연극을 돕는(지원하는) 기관이라는 자부심을 버리고 외려 망하게 하는 기관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오래 전부터) 엉터리 정책과 운영으로 연극판을 멍들게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도 연극으로의 지원이 점점 더 확대되고 있는 것은 정치판의 선심과 ‘불로소득’을 원하는 연극계의 염원이 일치한 결과일 것이다. 따라서 예술위는 연극에 사약(死藥)을 내리는 기관임을 먼저 자각해야 할 것이다. (원래 사약이란 금방 죽게 하는 약이 아니라 서서히 죽게 하는 약이라고 한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연극인의 바른 생존에 도움이 될까 해서 지원기관을 응원하고 용기를 주는 글을 쓰기도 하는데, 여전히 예술위는 연극계에 ‘사약’만 내리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늘 사약을 마셔야 하는 ‘모든 연극인은 불쌍하다’

 

‘두 가지’ 사례

 

그럼 예술위가 얼마나 철학이 없는가를 알아보자. 여러 사례가 있지만, 그 중 핵심적인 두 가지 사례를 들어보겠다.

먼저, 우리나라에서는 연극의 지원이 오로지 ‘극작가’에게만 쏠려 있다. 한마디로 지원기관들은 연극 = ‘창작극 육성’밖에 아는 게 없는 듯하다. 아주 오래된 관행이다. 따라서 이로 인해 연극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고 보는 사람이 나다.

아마 예술위는 (개념이 없어) 연극이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꿈에도 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이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연극 강국인 ‘러시아’를 살펴보자.

러시아에서 극작가라 하면 ‘체호프’ 한 사람밖에 없다시피 하다. 공산주의 정권이 ‘사회주의리얼리즘’만을 강요한 덕분에 역사에 남길만한 극작가와 희곡이 전무한 상태여서 그렇다. 그래서 많은 연극인들이 셰익스피어나 자국의 고전소설 등을 각색해 극장무대를 채우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도 연극(공연)만큼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왜 그럴까? 단적으로 좋은 ‘연출가와 배우’를 끊임없이 육성, 양산한 덕분이다. 이런 좋은 사례가 있는데도, 우리나라는 (무슨 이유로) 오로지 극작가의 의존해 ‘신작창작극’만을 최선의 연극진흥책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이에 대한 글을 써도 읽지도 않는지, 아니면 읽어도 ‘개소리’로 여기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연극계도 대학교수만 있지, 진정한 연극 전문가가 없어서인지 이에 대해 전혀 반응이 없다. 그러니 예술위가 ‘발상의 전환’을 하지 못할 것이다.

연극을 육성한다고 극작가와 신작(新作)창작극에만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는 이런 무지한(?) 지원기관들이 지구상에 또 어디 있을까 싶다.

얼마 전 국립극단의 공연인 김철리연출의 유치진의 ‘토막’을 보고 새삼 나의 주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반 토막’ 난, 희곡이라 말하기도 어려운 희곡 ‘토막’을 ‘연출가와 배우들’이 협력해서 감동이 있는 볼만한 ‘연극공연’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내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우리는 연극이 나빠도 원작이 나빠서라고 하면서 ‘희곡’을 탓이고, 연극이 좋아도 ‘희곡’ 때문이라고 치부하는 나라다. 그러니 좋은 연출가나 배우를 육성, 양산할 개념은 애초부터 없는 나라가 되었다.

그래서 지원금을 모두 다 작가와 희곡에 퍼부었는데, 한국을 대표할 창작희곡은 어느 곳에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동안 구작(舊作)희곡을 무대화해 새롭게 살리는 개념은 아예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항상 지원금을 쏟아 부은 희곡들은 다 쓰레기통에 쳐 넣곤, 다시금 새롭게 지원금을 쏟아 부어 끊임없이 ‘신작희곡’만을 양산해 내고 있는 게 우리의 지원정책이다.

아마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새로운 창작희곡이 아니면 시대의 흐름을 표현할 수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명동예술극장에서 연출가 이상우교수는 번역극을 하면서도 (물론 각색을 통해서) 자기의 정치적 ‘색깔’을 마음대로 표현해 내고 있다. 외려 자기 자신이 쓴 희곡보다 ‘색깔’이 더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연극연출가들이 자신의 창의성과 시대감각을 발휘하지도 못하고 있으며, 아예 그런 노력조차도 할 생각을 안 한다. 따라서 러시아처럼 연출가에 의한 ‘상상력이 풍부한’ 연극무대가 존재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기발한 각색이나 윤색 작업은 언감생심이다. 한마디로 오로지 신작을 양산하는 극작가가 ‘주인’인 연극계가 되었다. 하긴 그래야 혹자는 심사, 시상, 평가 등에서 ‘갑질’이 가능해진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로 인해 되레 극작의 질적 저하가 야기되고 있으며 – 왜? 극작이 모든 예술장르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작업이어서 세계적으로도 신작희곡의 양산은 저조한 게 현실이다. 그런데 문학적 기반마저도 허약한 우리가 이러한 ‘희곡육성정책’을 펴고 있으니 지원정책이 성공할 수 없는 건 너무나 당연할 것이다.

 

심사를 공개하라!

 

얼마 전 쇼팽페스티발에서 1위를 한 피아니스트 조성진에게 프랑스 심사위원이 단1점을 주어 그의 시상 못지않게 심사가 화제가 되었었다. 그건 주최 측이 심사위원과 그들의 평점을 전부 공개하는 관행으로 자연히 알게 된 사실이다.

먼저, 우리 예술위도 모든 심사를 공개하라! 항상 심사를 비밀에 붙이려다 망신을 자초하는 게 예술위 아닌가! 그래야 심사위원들이 일당(日當)받는 노동자로 전락하지 않고 책임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최소한 예술위가 예술의 전문 지원기관이라면 이런 인식정도는 이미 정착시켰어야 하지 않았을까?

이런 정도의 개념이나 철학도 확보하지 못하면, 앞으로 정권이 바뀌어도 계속해 정부의 하수인으로 남아 청와대나 문광부 담당자 전화한통이면 모든 게 뒤집어져 항상 무시당하는 무 개념의 기관으로 치욕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더구나 요사이는 민주화의 발전으로 모든 곳에서 ‘내부고발자’가 속출하고 있다. 대표적인 게 ‘국정원대선개입’사건일 것이다. 이제는 내부고발자가 정권이 바뀌면 국회의원도 될 수 있다는 인식이 자리 잡아 정권말기가 되면 내부고발자가 계속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그런데 아직도 “청와대가 …” 우물거리고 있으면 쪽만 팔릴 뿐이다. 변화된 현실을 직시하라!

이런 결과들이 결국 올 한해 예술위를 괴롭힌 핵심사항들이다. 이제는 지원기관도 자신들의 무(無) 개념이 (민주화가 진행될수록) 자신들에게 점점 더 심한 고통을 안겨 줄 것이라는 것을 인식할 때가 되었다.

그리고 민주화로 인해 이게 한계점에 도달했다고 보는 사람이 나다. 근본적인 수술을 앞둔 환자가 바로 ‘예술위’인 게 현실이다.

이런 지원기관을 곁에 두고 있는 연극계로서는 너무 불행하기 짝이 없는 게 사실이다. 그런 기관에 기대어 살아갈 방도를 찾아야 한다는 점에서 ‘모든 연극인은 불쌍하다’

 

‘모든 극작가는 불쌍하다’

 

희곡을 쓰기로 들면 나도 지원금 몇 푼 받아 그런대로 쓸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시대에 진정으로 내 연극을 볼 관객이 있을까 싶은 의구심이 크다. 그보다 더 크나큰 우려는 내가 쓴 희곡이 30년 후에도 남을 것인가 하는 데는 (솔직히 고백하면) 자신이 없다. 그래서 한심하게도 앉아서 이런 잡문만 쓰고 있을 뿐이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서 (1학년은 교양학부에서 수업하고) 2학년이 되자(1970년) 교재가 있는 수업은 ‘차범석희곡집’에 의한 희곡론이 유일했다. 그러니까 희곡론은 차범석선생에 의한 ‘저자직강(直講)’이었던 셈이다.

지금도 분명히 기억하는 것은 그 희곡집에는 그분의 여러 작품이 실려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산불’을 제외하곤 그분의 다른 희곡작품은 거론조차 되지 않고 있는 게 현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희곡이 있는지도 모르는 형편이다.

이런 현실에서, 이번 ‘차범석희곡상’의 수상자인 작가 장우재는 시상식장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나는 이런 불행한 작가가 되지 말아야지!’ 했을까? 아니면 박명성대표 같은 후배가 있어야 나중에 ‘장우재희곡상’도 만들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을까?

하지만 그가 “내가 나서서 ‘차범석희곡’의 가치를 새롭게 살려보겠다!”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작가들에게는 후세에 자신의 희곡의 가치를 찾아줄 뛰어난 연출 적 재능을 가진 후배가 절실한 게 현실이다. 그렇지 못하면 모든 극작가들에게 ‘차범석희곡상’과 같은 사연이 ‘남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솔직히 ‘산불’은 남북통일이라도 될 양이면 아예 그 흔적마저도 지워야 할 형편에 놓여있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도 왜 한국의 극작가들은 이런 현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럼 결과적으로 조만간 ‘차범석희곡’은 후세에 전해질 작품이 하나도 없게 되는 셈이다. 그렇게 되면 희곡(작품)은 사라졌는데 작가이름을 표방한 ‘희곡상’은 남아 시상을 하게 되는 ‘기현상’(?)이 야기될 것이다. 그러면 다음 세대 젊은이들의 입에서 “차범석이 누구야?” 하는 말이 나오게 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하나, 그런데도 우리는 왜 신작희곡에만 관심을 갖는 것일까?

둘, 우리는 왜 구작(舊作)희곡을 재창조하려는 연출가도 없고, 그런 구작에 출연하려는 배우도 없는 것일까? 이는 한마디로 시대를 관통할 뛰어난 작품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즉 시대의 변화에 상관없이 새롭게 주목할 희곡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셋, 이는 ‘체호프’를 보면 알 수 있다. 그의 희곡을 살리는 것은 러시아의 뛰어난 연출가와 배우들이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뛰어난 연출가와 배우를 양성하지 않는 것일까? 그들의 가치를 모르는 것일까?

넷, 여기서 깊이 생각해야 할 게 어째서 희곡에는 ‘유효기간’이 존재할까 하는 것이다. 동시에 고전에는 왜 ‘유효기간’이 없을까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희곡에는 시공간을 관통할 인간과 인생에 대한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 작가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내 희곡이 후세에까지 남아 한국연극을 빛낼 것인가’하는 인식이다. 자기의 사후에 누가, 어떻게 내 희곡을 무대에 올려 나와 내 희곡을 빛나게 할 것인가 하는 궁금증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당장 몇 푼의 지원금에만 연연할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섯, 그동안 연극계는 ‘창작극 육성’에 온 힘을 기울여 왔다. 따라서 극작이 후퇴하면 동시에 연극도 후퇴하게 되어 있다. 거기에만 모든 정성을 쏟았기 때문이다. 그럼 연극계가 쇠퇴하는 것은 결국 극작가의 책임이 될 것이다. 작가들은 이런 책임감을 느끼는가! 후세에 공연될 작품도 남기지 못하는 미래의 무명작가(?)의 ‘희곡상’이 도대체 연극사에 무슨 의미를 갖는단 말인가?

어째서 연출가와 배우에게도 지원이 필요하고 그들을 위해서도 투자를 해야 하는지를 이제는 명확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단적으로 연극판과 지원기관은 깨어나야 한다.

어느 작가의 경우는 “사후에 내 희곡은 모두 불태워라!”라고 말할 듯하다. 왜? 지금도 자기 이외에 누구도 자기의 희곡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다. 연산군시대도 아니고, 출판으로 모두가 작품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불안해서 어떻게 저승으로 갈 수 있을까 싶다.

지금의 이념싸움도 10년 후면 다 사라질 것이다. 기성세대는 늙어버릴 것이고, 신세대는 점점 수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거기다 모든 관심은 경제에 쏠리게 마련이다. 일본처럼 ‘잃어버린 20년’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게 현실이고, 중국에 대한 경제의존도는 갈수록 높아져 불안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30년 후에 어떤 희곡이 남을 것인가? 요즘 소란을 피우는 ‘정치극’들은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박근형의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러니 1회 사용하고 버릴 희곡에 1억 원씩 지원금을 퍼주고 욕은 욕대로 먹는 예술위도 불쌍하고, 쓰레기통에 들어갈지도 모를 희곡에 전념하는 ‘모든 극작가도 불쌍하다’

 

연극인들은 차별받고 있는가?

 

‘프랑스 테러’가 유럽에 거주하는 무슬림들의 ‘백인 기득권세력’의 인종차별을 향한 ‘외로운 늑대’들의 저항이라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래서 솔직히 식민지를 경험한, 동양인인 나로서는 조금은 소회가 다르다. 한마디로 테러범만을 탓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연극인들은 내 나라에서 무슬림처럼 차별받고 있는가? 그래서 툭하면 정부와 지원기관을 공격하며 ‘저항’하고 있는 것인가? 또 그렇다고 치자. 그렇다면 이기는 싸움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요즘 화제인 IS만 해도 홍보전에게 탁월함을 보여 세계 각국에서 젊은이들을 끌어 모으며 세력을 확대해 가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 연극계는 어떠한가?

예전 군사독재시절에는 ‘표현의 자유’니 ‘검열’이니 하는 말을 아예 입에 올리지도 못했다. 그래서 그때를 살아본 대다수의 사람들은 연극인들이 그런 구호를 입에 올리면, 역설적으로 ‘민주화’가 크게 진전됐다고 여기게 마련이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자체를 우리사회의 ‘진화발전’으로 여긴다는 말이다. 이렇게 세상은 변했다. (젊은이들은 잘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그런데 연극계에서 이런 시대감각에 뒤떨어지는 ‘구호’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하다. 구닥다리로, 전혀 호소력을 못 갖는 구호로 투쟁에 나서니 국민들과 매스컴이 연극판을 외면하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예전에 연극은 일요일에도 2회 공연을 했다. 물론 월요일도 쉬지 않았다. 그 뿐인가, 그때는 나라가 가난해 아르바이트할 곳도 없었다. 지금은 부지런히 일하면 아르바이트로 월 100만 원가량의 수입은 올릴 수 있다고 한다.

그때, 내가 하루에 5회까지도 공연을 한 적이 있다. 샘터 파랑새극장에서 아침 9시 반에 입장해 어린이극을 3회하고, 저녁 4시 반부터 시작해, 밤 9시 반까지 성인극을 2회하고 집에 돌아갔다.

점심시간에 극장 밖으로 나와 잠시 햇볕을 쬐고 다시 극장으로 들어가서 공연을 계속했다. 그러니까 극장에서 12시간 근무(?)를 했다. 그것도 장장 3개월을 공연했다. 20여일 지나자 여배우가 극장무대에서 갑자기 졸도를 해서 공연이 중단되기도 했다. 그때는 제작비를 건지겠다는 욕심으로 웬만하면 2개월, 많이는 6개월까지도 공연을 하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지원금이 풍족해) 월요일도 쉬고 일요일도 1회만 하고 그것도 지원금을 남기려고(?) 해선지 길어야 10여일 공연하고 끝낸다. 경우에 따라서는 배역을 트리플까지 정해 자기 아르바이트 다 하면서 출연하기 일쑤다.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손님이 없어서 하고 싶어도 못합니다.” 그때는 손님이 있었는가! 기다리다 손님이 단 두 명밖에 안 와서 “다음에 와주십사” 하고 되레 초대권을 주며 양해를 구하고 그날 공연을 취소하기도 했다.

그런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옛날엔 연극판의 형편이 어떠했는지를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지원받아 10분짜리 공연을 하지를 않나, 앉아서 ‘표현의 자유니 검열이니’만 떠들고 있으니 누가 공감을 하고 감동을 받겠는가? 좌우간 이렇게 지원을 확대해도 날로 불만, 불평분자들만 늘어나는 연극계가 안타깝다.

원래 정치적 편향성을 넓히려면 진정으로 소외받고, 차별을 받아야 국민들에게 공감을 얻고, 국민들이 안타깝게 여겨 동조를 하는 법이다. 자기 자식은 취직을 못하고 놀고 있는데 일명 ‘귀족노조’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되레 과격 시위를 하니 이게 국민들에게 먹히겠는가! “놀고 있네!” 할 것이다.

그걸 모르고 지금 연극계에서는 그저 목소리만 높인다. 어떻게 연극을 하는 사람들이 관객에게 주는 ‘감동’을 모르고 시위를 하는가! 그러니 아무리 떠들어도 연극계 소식은 TV뉴스에서도 화면 밑에 ‘자막처리’로 끝내고 마는 것일 거다.

연극판은 지금 교주가 지배하는, 마치 터무니없는 지구의 종말을 외치는 ‘사교집단’처럼 되어가는 느낌을 사람들에게 받게 하는 게 사실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정부의 지원이 넘쳐나는 시절에 ‘탄압’이니 ‘표현의 자유’니 ‘검열’이니 하는 말로 국민을 설득하려 들겠는가!

시대에 적합한 ‘구호’를 찾아야 한다. 그러려면 정치구호를 접고 ‘생존의 구호’를 외쳐야 그나마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솔직히 남을 설득할 논리마저도 없어 보인다. 그저 ‘정치냄새’만 풍겨 식상하기 짝이 없다.

 

‘행복한’ 연극인은 누구인가?

 

올 한해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제공자인 박장렬 서울연극협회장부터 살펴보자. 올 한해 투쟁의 핵심에 있던 박장렬 서협회장은 ‘영전’을 꿈꾸며 내년에 있을 ‘한국연극협회’ 이사장이 되겠다고 선거에 출마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그 일로 신이 나서(?) 연극인들을 접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젊은 연극인들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본인(박회장)은 얼마나 행복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고생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

이번만 해도 지원금이 1억이니 당연히 연극인들 사이에 ‘동반탈락’을 놓고 설왕설래가 많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자연히 연극인들 사이에서도 죄의식 등으로 ‘마음고생’이 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박회장은 한협이사장이 되겠다고 연극인들을 만나고 다니니 한심스럽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 예전에는 페이스 북에 박회장 글이 올라오면 ‘좋아요’가 500명 정도였는데 이제는 겨우 25명 정도라고 귀띔을 해 주었다.

상식적으로, 옛날처럼 안기부(국정원)에 불려가서 헛물을 켜는(물고문) 탄압을 받던 시절이었다면 감히 박회장이 한국연극협회의 이사장을 꿈꿀 수 있겠는가! 정말 민주주의가 좋긴 좋다.

그러니 불쌍한 젊은 협회원들만 (밤비를 맞으며) 시위를 한다고 대학로 예술극장 앞에 나와서 고생을 하지, 박장렬회장은 정치적 편향성을 마음껏 누리며 나름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올 법 할 것이다.

아직도 박근혜정부의 임기가 2년 남았는데 협회원들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으면서 자신은 일신의 영달을 꾀하겠다고 이사장을 꿈꾸니 정말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행복한 연극인으로 치면 극작가 박근형교수를 따라갈 연극인이 없을 것이다. 우선 교수로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 그것도 사립대학도 아니고 자신이 비방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정부 소속의 국립 한예종 연극원교수다. 그래서 국민들에게 한국이 민주화가 잘 된 나라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홍보하고 있는 사람이 그다.

거기다 매번 지원 대상에서 빠질 때가 없다고 한다. 젊은 연극인들은 “역대 지원금 랭킹 3위 안에 들걸요” 하나같이 부럽다고 말하고 있다. 좌우간 온갖 심사에 다 참여하며 선심을 남발하는 평론가 언니들에게 잘 보인 덕분일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행복한’ 연극인들이 반정부투쟁의 선봉에 나서고 있으니, 정부가 밸이 꼴려 ‘영혼을 상실한’ 말단 지원기관에 압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왜 연극계가 ‘정치적 중립’을 고수해야 하는가?

 

그동안 나는 연극계가 지원이 아니면 생존이 어려운 현실에서 꼭 필요한 게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펴온 사람이다. 왜 그럴까?

미국에서는 대통령을 뽑는 대선이 다가오면 많은 유명연예인들이 특정 후보를 지지한다면서 나선다. 외려 그런데 명단을 올려야 유명인으로 ‘가호’가 서는 것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리고 지지후보에 정치헌금도 거침없이 하곤 한다.

더 놀라운 것은 월스트리트를 주름잡는 경제계인사들이 공개적으로 자신의 지지자를 발표하는 현실일 것이다. 그리고 지지후보에게 막대한 정치자금을 제공한다.

그런데 한국은 어떤가? 연예인은 고사하고 재벌들마저도 숨을 죽이고 있어야만 한다. 단적으로 ‘정치적 보복’이 두려워서다. 반드시 ‘정치보복’이 뒤따르는 ‘후진성’을 아직도 한국이 벗어나지 못해서 그렇다.

한국의 연극인(연예인)들 중에 특정 정당이나, 같은 당이라도 다른 계파에 몸담았다고 해서 참혹한 보복을 당하고 숨을 죽이며 살았던 사람이 하나 둘이 아니다. 아직도 정치적으로 후진성을 면치 못해서 그렇다.

좌편향의 연극인들은 우편향 정권이 ‘싸가지가 없어서’ 그렇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다 마찬가지다. 이건 내가 국립극장에 근무하면서 좌편향정권의 횡포를 익히 보아온 터여서 잘 안다. 모든 국가예술기관의 수장은 모두 좌편향 일색으로 꾸려진다. 그리고 자파가 아니면 공공연히 임명도 보류하며 탄압을 하기도 했다.

지금 박원순 서울시장도 동색(同色)인 자파의 서울대 인맥으로 서울시 문화계를 꾸려가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좌파는 곧잘 자기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욕하기 일쑤다.

솔직히 좌편향이 집권하면 우편향은 그저 세월이 가기만을 기다리며 조용히 있는데 반하여, 좌파는 일단 젊고 열성적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나름 투쟁경력이 있어서 그런지 조용히 있지를 못한다.

그렇다 해도, 우파인 박근혜정부가 유독 좀 별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대통령 스스로가 “나는 겁나거나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이다.” 이렇게 천명하니 말이다. 거기다 TK의 ‘콘크리트 지지층’을 갖고 있어서 그런지 너무 자신만만한 게 사실이다.

이제는 내가 어째서 그동안 연극계의 ‘정치적 중립’을 주장해 왔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연극이 정부의 지원에 의존하지 않으면 ‘보복’ 같은 건 전혀 염두에 둘 필요가 없을 것이다.

거기다 자기의 주장이나 정치적 편향성을 확대하려면 ‘설득력’을 확보해야 한다. 그런데 너무나 ‘원색적’이고 ‘직설적’으로 정치적 견해를 드러내는데서 사태의 심각성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 나다. 그래서 반정부 조직의 하수인(?)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러니 힘없는 지원기관마저도 위로부터의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서 더욱 연극계를 ‘탄압’하는 것일 거다. 사실 이명박정부는 우파인데도 불구하고 조용히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유인촌, 정병국의원 같은 친연극적 인사들이 문광부장관을 역임해서 그랬던 것 같다.

  1. 우선 여당을 보자. 배우협회를 적극 지원했고 문화부장관까지 역임한 새누리당의 4선의원인 문화예술통인 정병국의원을 우연히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연극계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배우협회로 인해 연극계에 실망이 너무 크다고 솔직히 말하고 있었다.

거기다 한국연극의 대표 극작가인 박근형교수가 ‘박정희는 나쁘다’ 운운한 경력까지 있으니, 항상 ‘배신의 정치’를 거론하며 ‘눈으로 레이저를 쏘아대는’ 박근혜대통령이 있는 한 연극계가 편안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앞으로도) 새누리당이 집권하는 한 청와대는 자기들이 소장하고 있는 ‘블랙리스트’를 들이대며 연극계를 구박할 게 뻔하다. 그래서 그나마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대통령이 되기를 기원할 뿐이다.

 

  1. 그럼 야당이 집권하면 어떨까? 현재 가장 유력한 대선후보인 박원순시장을 서협의 박장렬회장이 그토록 사랑(?)했건만 박시장은 ‘서울대’출신이 아니면 상대를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데 연극계는 서울대출신이 한예종에만 있다. 따라서 그에 맞춰 서협회장을 뽑는다면 ‘색깔’도 일치하는 차이무의 이상우 대표가 적격일 것이다. 그런데 직을 맡으려고 할까? 그러니 박시장이 집권해도 절대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1. 문재인 대표는 어떤가? 문대표는 아다 시피 ‘친노의 대표’이시다. 그렇다면 ‘민예총’이니, 예총 소속인 서협이나 한협은 역시 찬밥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그들 눈에는 서협은 아무리 용을 써도 ‘회색분자’로 보일 뿐이기 때문이다.

내가 서협이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터뜨리는 이유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지원을 받아야 하는 연극계가 정치적으로 ‘사면초가’에 있는 게 현실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극작가는 러시아의 ‘체호프’일 것이다.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는 소설, 단편 등의 전 작품을 통해서 그만큼 알기 쉽게 다면성을 가진 인간의 삶을 그려내는 작가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그의 인생의 조망이 평범한 인간들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연극인들은 그의 작품을 수시로 대하면서도 그런 접근보다는 되레 ‘흑백논리’ ‘진영논리’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현실은 너무나 역설적이다. 정신적으로 정치투쟁의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한창 논란의 한가운데 있는 ‘국정교과서’ 사태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사실 우파가 ‘교학사’ 교과서를 만들었을 때 좌파가 가만있었으면 이런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유를 부리며 “그래, 그걸로 배우겠다고 나서는 학교가 얼마나 되는지 두고 보면 알거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극심한 외압으로 이를 제지하니 결국 우파가 (요사이 국민들이 우파로 기울어지데 기운을 얻어) ‘국정’으로 이에 맞서고 나선 것이다.

따지고 보면, 지금 한국이 ‘한국사교과서’ 때문에 정치적으로 이념이 갈리고 정쟁을 하고 있는 것인가? 별도로 만든 교재(?)가 더 크게 기능을 하고 있는 게 현실인데도 말이다.

북한의 ‘목함지뢰’ 도전에 젊은 병사들이 스스로 전역을 연기하며 싸우겠다고 나서는 게 다 ‘좌편향교과서’로 한국사를 배운 결과인가? 박대통령은 교과서를 국정으로 만들면 이념 싸움이 사라질 것이라고 진정으로 믿고 있을까?

요즘처럼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전교조교사가 “남한이 북한을 침략한 것 알지!” 이렇게 가르친다고 “네” 하고 대답하는 학생이 있는 줄 알면 정말 오산이다. 그런 바보는 외려 기성세대에 더 많다는 것을 연극계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요즘 10대들에게 아무런 가치도 발휘하지 못하는) ‘한국사교과서’ 건으로 양진영이 목숨을 걸고 싸우니 그야말로 꼴불견이 아닐 수 없다. 바로 이게 허접한 한국의 이념투쟁의 현주소다.

그러니 우리가 이념으로 파생된 사태에 관해 왈가왈부 해보아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내가 아무리 눈물을 흘려도 효용이 없는 게 숨길 수 없는 현실이다.

 

투쟁에 ‘구호’가 중요한 이유

 

내가 왜 후배 강애심한테 짜증을 냈을까? ‘고래싸움(예술위와 서협)에 왜 새우들(젊은 연극인)만 고생을 해야 하는가’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추운데 왜 나왔어, 이런 짓은 박장렬 회장이 해야지! ‘결자해지’도 몰라” 그러니까 일을 꾸며놓은 사람(원인제공자)이 나서서 해결도 하라는 게 나의 주장이다.

“검열을 하잖아요.”

“누가 검열을 해?” 그러자 극장을 가리키며 “여기서 그러잖아요.”

“검열이 무슨 말인지 몰라! 다 자기들 극장에서 공연하면 아무도 시비 거는 사람이 없잖아, 그런데 경제적 능력이 없어 이런 극장에 의존을 하니까 설움 받는 것이지, 이건 검열이 아니야! 다 모이면 검열이 무엇인지를 설명해 줄게”

극장의 젊은 직원이 공연을 보고 ‘생존의 두려움’으로 (요즘 얼마나 직장구하기가 어려운가!) 스스로 죽음을 무릅쓰고(?) 자신의 몸을 던져 막았다는 게 이 사태의 정설이다.

위로부터 문책 당할까 봐 두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차라리 연극인들이 ‘직원의 생존을 위협하는 예술위는 영원히 문을 닫아라!’고 외쳤어야 했다. 그러면 외려 “이게 무슨 소리야?” 하며 의구심을 가진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검열’ 때문에 예전에 서울고등법원에서 재판도 받아 본 전문가(?) 아닌가! ‘검열’은 그런 게 아니다. 처음부터 아예 공연을 못하게 하는 것이다. 정부에 의해 예전처럼 ‘사전검열’이 이루어진다면 나부터 나서지 가만있겠는가! 그런데 누가 그런 구호를 내세워 투쟁하도록 지령을(?) 내리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이런 식으로 (사태가 발생할 때마다) 엉뚱하고 생소한 구호를 외치니, 우선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고, 사회적 이슈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연극계는 알아야 할 것이다. 그걸 모르니 ‘모든 연극인은 불쌍하다’

나는 올 한해 연극계가 투쟁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지만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한 채 ‘헛고생’을 한 중요한 원인이 바로 엉터리 ‘투쟁구호’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한국연극’을 읽어보았는가?

 

이번 ‘한국연극’ 11월호는 특집좌담으로 ‘예술 검열과 표현의 자유’를 싣고 있다. 아마 이번 기회에 임인자 편집위원은 ‘동네어른들을 내세워’ 이른바 진영논리를 확대하고 싶었을 것이다.

한동안 ‘한국연극’은 젊은 연극인들을 모아 ‘이념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발행인 윤봉구이사장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래서 이번에도 ‘한국연극’을 통해 정부가 검열로 ‘표현의 자유’를 침범하고 있다는 논리를 확대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감의 발로’로 명망 있는 원로인 김정옥선생, 이강백선생, 신혜숙선생, 기국서선생을 모신 듯하다.

아마 임편집위원은 이번에야말로 원로들을 통해 박근혜 정권을 정면으로 공격할 ‘절호의 찬스’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 세상에는 얼마나 다양한 견해가 있는가를 아는 ‘절호의 기회’된 게 사실이다.

왜? 김정옥, 이강백선생이 ‘검열과 표현의 자유’에 관한 예상치 못한 견해를 내보였기 때문이다. 아마 크게 당황했을 것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견해가 존재할 수 있는가를 스스로 실감했을 것이다. 젊은 연극인들과 함께 모여 다닌 것을 후회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정말 지성(知性)이 있다면 말이다.

그리고 어떻게 ‘같은 시대를 살아온’ 신혜숙, 기숙서 선생이 그토록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는가도 눈치 챘을 것이다. 지혜는 단순히 공부를 하고 학위를 딴다고 해서 생기는 게 아니라는 것도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신현숙 선생은 “20세기 말에 검열이 폐지됐는데 창조한국을 부르짖는 이 시대, 21세기에 다시 ‘검열’을 한다는 것이 부조리하다는 것이죠.”

그에 김정옥선생은 “검열이라는 말은 사실상 없어지는 것 같아요. 제 생각에는 ‘표현의 자유’를 여러 세력이 침범하는 거지 ‘검열’이라는 형식으로 하는 건 아니예요.” “정권차원이 아니라 그 뒤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말하자면 하수인의 역할을 잘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기국서 선생은 “검열제도는 없어졌잖아요. 문화예술계에서 반정부적 태도를 취하거나 좌편향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표적으로 삼는 경우가 계속 있었어요.”

이에 반하여 이강백 선생은 “저는 조금 다른 시각으로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사실 언젠가는 이런 일이 생길 것이라고 예상을 충분히 할 수 있었어요. 이제 연극이 지원금을 받아야만 생존할 수 있는 환경이 됐잖아요.

(그러면서 미국의 인디언 보호구역의 실정을 길게 설명한다.) 인디언들이 정부의 지원금으로 행복하게 살 줄 알았는데, 오히려 거의 대부분이 알코올 중독이나 마약으로 삶의 활기를 잃어버리게 됐어요.

옛날 검열이 있던 시절에는 오히려 하고 싶은 말을 직설적인 표현을 통하지 않고 아주 교묘하게 소위 예술화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죠. 지금 우리가 논의하려는 것을 검열로 봐야 하는지 아니면 근본적으로 연극의 환경이 달라진 것으로 봐야하는지가 중요하죠.

지금은 어떤 상황이냐 하면, ‘이 희곡이 예술위나 서울문화재단에서 지원금을 못 받으면 공연을 취소하는 것으로 아십시오’ 하고 (작가에게) 꼭 단서를 붙여요. 그래서 지원금의 결정권을 가진 이런 기관이 두려움의 대상이 된 거죠. 제도적으로는 검열이 없어졌지만 이런 기관의 입맛에 따라 이런 사태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이죠.

몇 년 전부터 이런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해서 올해 두드러진 것이죠. 지금은 지원금을 못 받은 사람도 피해자지만 받은 사람도 죄의식을 느낄 수 있고요.”

이에 김선생은 “사육당하지 않아야 해요.” 이렇게 이야기를 받고 있다. 그러면서 당시의 검열을 어떻게 극복하며 연극을 하셨는지를 길게 설명하고 계신다. 두 어르신들의 세상을 보는 지혜와 혜안에 감탄이 나올 정도다.

이에 반하여 신선생은 너무나 실망스럽다. (여기서 기국서 선생은 생략하겠다) 여기서 한국의 연극평론가들의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골방에서 논문심사만 하신 분들의 ‘현실감각’은 정말 답답할 따름이라고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연극제작에 한 번도 참여해 본 적이 없으신 분이 ‘돈의 존귀함’과 ‘돈의 천박함’이라는 이중성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내가 누구를 비난하고자 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우리 젊은 세대가 어떻게 해야 정치적 단순논리에 빠지지 않고 복합적인 사고를 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다. 특히 극작가들은 그렇다. 자기의 희곡이 후대에 남으려면 어떻게 ‘사고’를 해야 하는가를 알리고 싶어서 하는 말이다.

입만 열면 ‘자유’ ‘독재’를 읊어대는 분들에 의해서 – 이미 지난시대의 구호만을 외치는 기성세대에게 젊은 세대가 이끌리게 되면 남는 것은 그저 ‘진영논리나 흑백논리’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긴 이야기를 이곳에 늘어놓을 수 없으니, 진정으로 ‘복합적인’ 사고를 하고 싶은 분들은 꼭 이 특별좌담을 숙독해 주기를 권한다. (우선 임인자위원의 사고에 변화가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자기의 예술관과 인생관의 폭을 넓히고 싶은 젊은 연극인들은 필히 숙독해주기를 권한다. 세상에 대한 안목을 높이기 좋은, 정말 오랜만에 마주치는 좋은 좌담기사다.

내 입장에서는 이런 분들이 계시는 연극계가 어쩌다가 이런 통속적인 세상이 되었는지 한숨만 나올 뿐이다. 인간에게 연륜이 무엇이며, 진정한 예술가의 인품이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는 좌담이다. 예술가의 집의 ‘자료원’이나 ‘서울연극센터’에 가도 누구나 볼 수 있게 ‘한국연극’ 11월호의 열람이 가능하니 필독을 바란다.

 

 

6 thoughts on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정치 탄압과 연극인의 생존/ 우상전

  1. 우상전 선생님께,

    우선 월간 을 열독하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2015년 11월 특집좌담 편이 오랜만에 좋은 좌담으로 평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2015년 11월 특집좌담에서 김정옥 선생님, 신현숙 선생님, 이강백 선생님, 기국서 선생님을 통해서 우리 연극계가 함께 고민해야 할 ‘예술 검열’의 문제에 대해 다각도로 논의할 수 있어서 편집위원으로서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다만, 선생님께서 정치적 편향성을 언급하시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예술의 자유’문제는 인간의 기본권으로서 침해받지 않아야할 가장 기본적인 권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원이라는 정책에 의거했을 때, 예술적 수월성 이외에 정치적 판단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바로 그것이 이번 검열 사태의 핵심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술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정치적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의 정치성에 대해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술의 자유’는 정치적인 발언이 아니라 선생님께서 언급하시는 예술의 ‘생존’과 결코 떨어 질 수 없는 이야기이며, 더 나아가 예술가로서의 ‘실존’에 관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께 ‘생존’이 중요한 문제인 것 만큼, 저 개인에게도 ‘생존’은 중차대한 일이며, ‘실존’의 문제는 예술가로서의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질문이기도 합니다. ‘생존’과 ‘실존’ 사이에 정치가 개입해서는 어떤 논의도 더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정치적이다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는 선생님의 의도를 저는 ‘생존’으로 단순화하여 귀결하고 싶지 않고, 또한 충정어린 말씀으로 이해하고자 합니다.
    항상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국가의 후원은 결코 통제의 장치로 사용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강백 선생님이 언급한 ‘인디언보호구역’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논지라고 생각합니다. 예술 후원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자존심 굽히지 않고 연극하고 싶은 후배들의 충언에도 귀기울여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선배님으로서의 역할도 해주십시오. 그것은 꼭 거리에서의 일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후배를 꾸짖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길들여진 예술을 하라고 강요하지는 말아주십시오. 고맙습니다. 2015년 12월 2일 새벽 임인자 올림

  2. 우상전씨는 두 가지를 간과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본인은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 가 어떻게 쓰여있는지 모른다는 사실. 그러면서 박근형이 현역이니 방위니 하는 헛소리만 지껄이면서 인신공격으로 글을 전개하죠. 또 상상으로 작품을 그리며 쉐도우 복싱을 하고 있구요. 정작 본인은 보지도 못했는데 말이죠.

    두 번째는 검열이라는 팩트의 누락입니다. 검열 좀 겪어봤다는 본인의 무용담을 늘어놓는데 결과적으로는 무식담이죠. ‘지금 검열이라고 떠들어대는 건 본인이 겪였던 수위에 비하면 새발의 피니 떠들지마라 어디 그거 가지고 검열이라고 하냐? ‘ 유신과 5공 때 수준으로 완전한 사전 통제가 이뤄지지 않으면 검열이라고 하지 말라는 거죠. 사고의 수준이 5공에 멈춰있습니다.

    애초에 지금 행해지는 사태를 검열로 인정조차 안하니 논의 자체가 안됩니다.이 분에게 지금 이뤄지는 작태도 검열이라고 먼저 설명해야 합니다. 근데 그게 될까요? 장관과 문예위원장이 검열 사실을 인정하고 여당 의원들은 앞으로도 사회적 논란 예방을 위해 멈추지 말고 검열하라는 지시를 대놓고 하고 있는데도, 그거 검열 아니라고 하는 사람과 무슨 대화를 할 수 있을까요?

    이런 지령을 내리는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하다는 배후설까지 던집니다. 자기 생각에 반하면 어디에서 세뇌당해 지령 수행하고 있다는 사고 방식. 누구랑 되게 비슷하죠?

    뭐 이런 헛소리도 의견으로 받아들일 수는 있습니다. 우상전씨랑 달리 저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민주 시민이니까요. 우상전씨가 어떤 지령을 받아 이런 글을 썼다고는 생각은 안합니다.
    다만 지면에 실리는 글 수준이 너무 엉망아닌가요? 논지 전개도 엉망입니다. 갈피를 못잡고 무슨 일기 쓰는 것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토픽 이동. 이러면 매체를 신뢰할 수가 없죠.

  3. 아 하나 더. 늘 연극계 이슈를 정쟁으로 만든다고 비판하는데…서협이 박원순 시장과 무슨 커넥션이 있든 없든, 늘’여야’ 를 거론하며 모든 이야기를 진영논리로 해석하는 건 우상전씨인데 본인만 모르는 듯 하다. 아저씨. 아저씨만 늘 여야가 어쩌고 얘기해요.

  4. 내가 쓴 글이 이곳에 실린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내가 이 글을 쓸 때의 제목은 ‘모든 연극인은 불쌍하다’였다. 그랬는데 오세곤 편집장이 ‘표현의 자유’ 운운으로 허락도 없이 바꿔버렸다.왜 제목을 바꿨을까? 너무나 자극적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이 제목을 채택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나도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가 너무 자극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걸 실제로 확인시켜주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한국의 분단현실에서 이런 자극적인 제목을 박근형이라는 한사람의 작가가 책임지기는 힘들다는 생각을 한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이를 ‘표현의 자유’를 침해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편집에서 무단으로 내가 쓴 제목이 바뀐 사실이 이를 잘 대변해주고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정치투쟁은 이제 너무 무의미하다. 왜? 정치투쟁은 실제로 민주화로 유효기간이 끝났다. 그걸 모르고 지속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역사를 모르고 있다는 반증일 뿐이다. 세계의 흐름을 잘 보았으면 좋겠다. 내가 이재진선생의 나치와 연극검열의 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지금은 ‘나치시대’와 다르다는 것을 모두가 확인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 우리가 예술가로서 너무 답답한 것은 아닐까? 내 자유가 소중하면 남의 자유도 소중한 것이다. 언젠가 또 긴 이야기를 하고 싶다.

  5. 월간 ‘오늘의 서울연극(TTIS)’은 서울연극협회와 연극기록실이 공동으로 발간하는 인터넷 연극지입니다. 본지에 실리는 원고는 청탁과 자유 투고, 2종류가 있습니다. 물론 두 경우 모두 가능한 한 필자의 원고를 그대로 싣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만 사실과 다른 것이 명확하거나 다른 개인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내용에 대해서는 다소 신중한 태도를 취합니다. 우상전 선생님의 글은 자유 투고 원고인데, 과거 게재 후 다른 개인의 항의를 받고 수정한 적도 있었고, 위의 글에서도 “연극협회를 문화부 산하”라고 하신 건 틀린 내용이라 삭제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전화를 드린 적도 있었고 아주 사소하거나 미처 그럴 겨를이 없이 임의로 수정한 적도 있었습니다. 우상전 선생님께서는 62호 발간 후 댓글을 통해 원고 제목이 바뀐 일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셨습니다. 선생님이 보내오신 글의 제목이 박근형 작가에 대한 조소로 들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선생님이 보내신 메일 제목을 활용하여 제목을 달았습니다만, 그래도 직접 여쭤보고 결정하는 게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 사과드립니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어 부담스러울 박근형 작가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의 상처가 된다면 절대 쓸 수 없다는 건 분명합니다. 즉, 결과가 달라지진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절차상 잘못을 인정합니다. 앞으로는 철저하게 절차를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6년 1월 4일
    오늘의 서울연극 편집인 오세곤 올림

  6. 박근형씨 작품을 검열했다고? 그랬으면 애초에 올라오지도 못했지요. 심사를 통과했으니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그걸 문예위가 사회적 논란(?)이 일까봐 막았으니 이 점에서 사과를 한거지요. 세월호이야기도 애초에 검열을 했으면 공연이 불가능했지요, 그렇지 않았으니 결국 직원이 공연을 방해한 거지요. 이건 검열이 아니지요. 공연방해나 지원반대(비토)라고 해야지요, 나아가 정치적 보복이라고 할 수도 있지요, 왜? 작가가 전에 공개적으로 ‘박정희는 나쁘다고 외쳤으니까요.’장관이나 국회의원도 잘못 용어를 사용한거지요, 그리고 사태가 진짜 헌법을 위반한 것이었으면 이 정도로 그치고 말 것인가요.벌써 헌재로 갔겠지요. 가만 있을 사람들인가요.아무 내용이나 들고나와서 못하게 하면 표현의 자유니 검열이니 외치는 사람들이 문제지요. 공연을 하게 하는 게 제일 좋은 일이지요, 하지만 이로 인해 일이 파생하면 또 얼마나 시비를 걸겠어요. 제발 다음에 정권을 잡아서 잘 좀 나라를 다스려주세요, 연극협회에도 지원금도 많이 주시고, 서울대 안 나와도 사람대접 잘 해주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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