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아버지/ 장윤정

이 분노는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 <미국 아버지> 리뷰-

 

장윤정

 

작품명: <미국 아버지>

작: 장우재

연출: 장우재

드라마터그: 조만수

단체: 이와삼

공연일시: 2015년 10월 20일(화)~11월 1일(일) 평일 8pm, 토요일 · 일요일 4pm(월요일 공연 없음)

공연장소: 동숭아트센터 동숭홀

관극일시: 2015년 10월 29일(목) pm8:00

 

공연이 진행되는 지금, 여기는 미국이다. 일상을 살아내고 있는 우리의 공간과는 너무나도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 미국. 그럼에도 우리는 왜 이 이야기를 보아야 하는가? 반 전쟁? 인류애? 그렇게 적당히 교훈적인 이야기를 기대했다면 실망하게 될 것이다. 애초에 그런 피상적인 태도로 접근한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스로 제 공연을 ‘실패했다’고 운운하는 이 작품은 그만큼 조심스럽고 신중한 태도로 거시적인 문제에 대한 사유의 지점을 던져놓는다. 그 거시적인 문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화’난 ‘미국’, ‘아버지’에 대한 문제라고 말하고 싶다. 매우 애매한 답이지만 한편으론 가장 적절한 답이 아닐까.

 

앞서 말했듯이 이 이야기의 배경적 공간은 미국이며 등장인물 또한 미국인 혹은 아랍인이다. 거기에 내용마저 철저히 미국인들의 이야기다. 그 속에서 우리가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접점을 찾아야 하는지 헤맨다면 세 가지를 들 수 있겠다. 미국, 아버지, 참수. 그 중에서 미국은 정치적인 부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리라. 어쩌면 많은 이들은 ‘미국’에 대해 각자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면서도 좋든 싫든 이미 친숙한 존재로서의 ‘미국’을 발견하게 될지 모른다. 우리나라와 미국과의 관계는 분단을 기점으로 이미 오래도록 미묘하고 긴밀하게 얽혀있었으므로. 게다가 여러 매스미디어를 통한 미국 이미지의 잦은 노출은 머나먼 타국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기묘하게도 영 낯설지만은 않도록 만들어주었다. 이 멀지만 가까운 나라 미국과의 관계는 좋든 싫든 자본이나 군사적 ․ 외교적 이해관계로 엮여 그동안 여러 가지 결과를 파생시켜왔다. 공연은 그것에 대하여 호불호를 따지는 문제를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 이전에 세계 제일의 강대국과 얽힐 수밖에 없는 이 현실의 밑바닥엔 무엇이 있는지를 들여다보자는 것이다. 이 문제는 비단 한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세계가 얽혀있는 문제임을 보여준다. 참수현장을 재연함으로써 이 세계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패권과 자본주의 관계에 대하여 말이다.

 

공연은 이라크 무장단체에 의하여 2004년에 참수당한 니콜라스 버그의 사건을 두고 그의 아버지 마이클 버그의 입장을 이야기한다. 닉 버그를 윌이라 칭하고 마이클 버그를 빌이라 칭하며 가상의 이야기를 덧붙였다. 2004년, 이라크, 참수라 하면 무언지 모를 기시감이 들지 않는가? 그해 닉 버그의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동일한 이라크 무장단체에 의하여 한국인 故김선일씨 피살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중동이라면 전혀 관계없는 남의 나라로 여겼던 대다수 국민들은 적잖은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작은 나라라 눈에 띄지도 않았을 한국, 멀어서 알지도 못할 한국, 서양 열강에 끼지도 않고 아시아권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에 바쁜 이 한국이 저 먼 중동지역의 경계대상에서 제외된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당시 故김선일씨를 피랍한 ‘유일신과 성전’이라는 단체는 인명을 걸고서 이라크 내에 파병된 한국군을 철수하라는 협상을 시도했다. 물론 한국정부는 타협하지 않았고 결국 참혹한 결과가 일어났다. 당시 국가의 태도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시비를 논하자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 때문에서라도 공연 상에서 진행되고 있는 닉 버그의 참수문제가 결코 다른 나라의 문제가 아니라는 지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왜 하필 이 ‘미국’인이 참수대상이 되었는지, 나아가 왜 하필 우리 ‘한국’인은 그 대상의 범주에 포함될 수밖에 없었던 것인지에 대하여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공연은 시작되자마자 벽면에 투사된 몇몇의 글자들과 음성으로 마이클 버그의 실제 편지 한 통에서 감명을 받아 시작되었다고 언급한다. 마이클 버그는 자신의 아들이 이라크 무장단체에 의하여 살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비난의 화살을 당시 부시정부를 향해 겨누었던 인물이다. 그는 역설적으로 자신의 아들을 살해한 단체를 이해하는 동시에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하여 강하게 비난하고 무자비한 이라크 전쟁에 대하여 미군철회를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궁극적으로 바란 것은 평화였다. 그것은 한 개인의 아버지로서 취한 태도가 아니었다. 사적인 감정의 차원을 넘어서서 거시적 관점으로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사유하는 인간 그 자체였다. 아마도 <미국 아버지>는 이 역사적 사실이 흥미로웠나보다. 공연이 진행되는 내내 마이클 버그의 편지는 인용되었고 공연이 끝난 후에는 마치 영화의 엔딩 크레딧처럼 활용하기도 하였다. 객석에 불이 들어온 후에도 벽면엔 마이클 버그의 실제 편지내용이 투사되었으며 관심 있는 관객들은 끝까지 읽어내고 일어났다. 덕분에 사유하는 인간 마이클 버그의 편지를 마주한 관객들은 공연이 끝남과 동시에 새로운 사유를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관객들을 끌어당길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한 ‘아버지’의 이야기라는 연결지점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미국인 아버지나 한국인 아버지나 아버지는 아버지인 것이다.

 

<미국 아버지>의 또 다른 제목은 <An angry American man>이다. 한국어 제목에는 ‘화’가 빠져있는 셈이다. 그래서 남은 ‘미국 아버지’는 중의적인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미국인’ 아버지가 아닌 ‘미국’ 아버지로 표기된 탓이다. ‘미국 아버지’는 ‘미국인 아버지’의 의미를 지니는 동시에 마치 아버지인 ‘미국’을 연상시킨다. ‘아버지’라는 단어에는 수많은 함의가 존재하는데 그 덕에 ‘미국 아버지’는 권위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아버지로서의 미국이라는 의미까지 만들어질 수 있다. 물론 그 권력은 세계를 향한 권력일 것이다. 결국 미국 아버지는 한 개인으로서의 아버지일 수도 있고 한 국가로서의 아버지일 수도 있으며 세계 수장으로서의 아버지일 수도 있다. 어쩌면 제목 하나를 두고서 너무 비약적인 해석을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사실 이 다양한 상상은 작가의 의도에 따라 진행된 것 아닐까 짐작한다. 의도적으로 탈문법화된 제목은 다양한 해석을 낳을 수밖에 없고 덕분에 작품까지 다각적인 태도로 접근하게 되는 것이다. 제목에서 나타나는 ‘아버지’에 대한 다양한 의미는 공연의 전반적인 의미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다시 공연으로 돌아가 보자면 <미국 아버지>는 윌의 아버지 빌의 입장을 조명하고 있다. 빌은 한때 월스트리트에서 일을 하며 자본주의의 세상 흐름에 맞춰 살다가 소모된 후 버려진 인물이다. 이후 재취업을 시도하던 과정에 과거 친구였던 데이비드를 만나게 되면서 다시 마약을 시작하게 된다. 빌은 젊은 시절 사랑하고 선망했던 낸시를 평생 동안 잊지 못했고 그런 낸시와 데이비드 사이에는 스캔들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의미로 평생 데이비드를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빌에게 있어서 데이비드는 절멸해야할 대상이었다. 그와 동시에 미국까지 절멸 대상이었다. 이후 9.11 테러로 데이비드는 실제로 사망하게 되고 윌은 ‘알라의 뜻’이라는 노래에 맞춰 춤을 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 윌의 참수 소식을 접하게 된다. 빌은 그제야 자신이 그동안 무엇에 분노하고 있었는지, 왜 분노하고 있었는지, 그것이 어째서 잘못된 방향의 분노였던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명징한 시선으로 진정한 분노의 대상을 향하여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신념에 찬 어조와 신중한 태도, 인류애가 묻어나는 감성으로. 그리고 이내 자살을 하고 만다. 윌의 자살에 대하여 공연에서는 직접적으로 ‘실패’한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실제 삶을 살아내고 있는 마이클 버그의 그 내밀한 마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이 실패에 대한 솔직함은 관객에게 진정성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내 그 실패가 결코 실패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용기 있게 내뱉은 이 ‘실패’덕분에 한 아버지에게 생긴 상처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관객은 가늠할 수 없는 것을 가늠하게 되는 것이다.

 

공연은 주로 빌의 환상으로 진행되는데 아마도 앞선 ‘실패’와 관련 있으리라 짐작된다. 결코 보편적일 수 없는 과정으로 아들을 잃은 한 아버지의 내면을 환상 외에 어떠한 형식으로 파고들 수 있을 것인가? 만일 실제 서사를 구축하는 방식이었다면 자칫 정보전달의 역할에 함몰될 위험이 있었을 것이다. 한 인물의 심리를 파고들기 위해서 선택한 환상은 그래서 적절한 방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환상과 현실의 이중구조가 단선적 형태로 구성되어선 안 된다는 점이다. 그렇게 되면 기껏 환상이라는 거대 세계를 만들어놓고서도 의미 확장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 무대 위에 등장하는 환상 속 인물들과 빌의 내면이 비록 동일한 의미일지라도 그것들은 끊임없이 서로 갈등을 이루어야 한다. 물론 공연 내내 환상 속 인물들과 빌은 갈등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 갈등은 외적 갈등이다. 이 경우 자칫 환상 속 인물들은 옳고 현실 속 빌은 그르다는 단선적인 결론을 도출하게 될 위험이 생긴다. 지속해서 빌에게 조언을 하고 훈계를 하는 태도의 환상 속 인물은 자칫 공연을 선형적인 형태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 환상 속 인물들은 빌의 내면이기에 얼마든지 입체적으로 사유하고 행동할 수 있으리라. 만일 그들이 진정 빌의 내면 중 일부라면 그들은 얼마든지 태도가 돌변할 수 있는 인물인 것이다. 그에 따라 현실의 빌 또한 복잡한 혼란을 겪게 될 것이다. 내면이 내면과 갈등하고 내면이 외면과 갈등하는 형태는 극을 더욱 복잡다단한 구성으로 진행되도록 할 것이다.

 

<미국 아버지>에서 빌은 공연 내내 데이비드에게 미국에게 신에게 분노하지만 마지막에 가서 진정 분노해야 할 대상은 자신이었음을 깨닫는다. 더불어 권력을 행사하는 자들을 향해야 함을 깨닫는다. 빌은 세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분노해왔던 것이다. 그것을 결코 모르지 않았음에도 애써 외면해왔다. 그 분노의 방향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결국 피해를 입는 것은 권력을 갖지 못한 시민의 문제임을 발견하게 된다. 근본적인 문제는 자본주의로 형성된 세계의 문제와 맞닿아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마르크스 또는 푸코가 연상될 것이다. 빌은 전혀 자신과 상관없으리라 생각했던 이라크 참수의 문제를 갑작스럽게 맞닥뜨렸고 그 이면에는 교묘한 자본주의와 권력이 작동하고 있었다. 이것을 발견하기까지 교묘한 형태로 작동하는 자본과 권력 속에서 빌은 함몰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공연 내내 사회와 세상에 대하여 통찰력 있는 발언들을 늘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빌의 모습은 결국 곧 우리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빌은 결국 실질적인 문제의 근원을 발견하였고 제대로 된 방향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서 차이가 있으리라. 그것은 세상에 대하여 진정으로 사유를 하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잃고서 깨달음을 얻을 것인가? 그 어떤 것도 잃기 전에 사유할 순 없는 것인가? 그 무엇을 잃고서도 빌과 같은 이성적인 사유가 과연 가능할 것인가? 현재 가지각색의 분노가 점철되고 있는 이 한국사회에 공연은 생각해볼만한 화두를 던져주었다. 이 외에 이 작품의 또 다른 흥미요소로는 현대 한국사회에서 불거지고 있는 여러 문제들이 녹아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빌은 과거 젊었던 세대가 현재 기성세대가 되어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는 현실에 대하여 꼬집는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철저히 자본주의화 되어 그 꼭대기로 올라서야 한다고도 외친다. 이것은 시대를 관통하는 문제일 것이다. 이렇게 <미국 아버지>는 미국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임에도 결국 한국의 이야기인 것이다.

 

환상에 등장하는 젊은 시절의 빌과 낸시, 데이비드는 빌에게 이야기를 건네고 화해를 시도한다. 이들이 시도하는 화해는 빌을 흔들리게 만들었다. 나아가 이 흔들림은 관객들에게 또 다른 울림으로 전해져야 한다. 다행히 윤상화라는 배우의 역량이 컸기에 이 울림은 여과 없이 전달되었다. 윤상화 배우는 이 땅의 아버지 그대로였다. 울고 웃고 격분하며 성찰하는 아버지였다. 윤상화 배우의 연기에 대해서는 더 언급할 필요도 없다. 매번 빌의 역할을 맡을 때 마다 더욱 치밀하게 파고드는 것으로 짐작하는데 그저 그가 앞으로 연기할 빌을 기대해볼 뿐이다.

 

장우재 연출은 이 작품을 통하여 확실히 그의 세계관이 거시적임을 드러내었다. 그는 언제나 미시적으로 이야기를 서술하는 것 같지만 그 주제관은 항상 거시적 관점이 나타났다. 그것은 <여기가 집이다>에서도 그러했고 <햇빛샤워>에서도 그러했다. <미국 아버지>와 유사한 크기의 작품을 거론하자면 <환도열차>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환도열차>는 시공간을 초월하기에 상대적으로 <미국 아버지>에 비하여 더 거대한 서사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미국 아버지>가 다루고 있는 사건이나 의미는 시공간을 떠나 세계를 논하고 있는 것이기에 <환도열차> 못지않게 거대한 이미지를 형성한다. 이 지점은 현재 한국 연극계에 있어서 중요한 지점이다. 현재 국내 연극계서 거대 서사를 논하는 작품을 찾아보기란 쉽지가 않다. 세계의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더욱이 찾기 어렵다. 세계의 문제 속에도 보편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화두가 존재하고 나아가 그 세계의 문제를 통해 국내의 문제를 돌아볼 수 있게 만드는 작품은 생각보다 드물다. 그렇기에 이번 <미국 아버지>는 국내의 연극세계를 더욱 풍성하게 해주는 미덕이 있다.

 

<미국 아버지>는 그동안 장우재 연출 특유의 재치나 대사, 재미난 인물들이 등장하는 작품은 아니다. 재미나게 푸는 것 같지만 내심 무거운 이야기를 무겁게 하고 있다. 무거운 것을 무겁게 푸는 방식을 경계하는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진행을 선택했던 것은 마이클 버그에 대한 조심스럽고 진심어린 마음 때문이리라 짐작한다. 그래서 이 무거움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싶다. 그리고 이 진정어린 마음이라면 지속해서 끊임없이 이 작품을 발전시키리라는 믿음이 있다. 그렇기에 새로이 만나게 될 또 다른 <미국 아버지>에 대하여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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