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가지 소원 / 오세곤

(제64호 편집인의 글)

네 가지 소원

새해 첫 달이 지나갔다. 허무하다. 그러나 원숭이해가 시작되는 설날이 곧 있어 다시 한 번 새 출발을 다짐할 수 있다. 다행이다. 그래 1월에 정리 못 했던 희망을 이제 “네 가지 소원”으로 모아보기로 했다.

첫째. 예술 지원 정책의 기조 전환이다. 턱없이 적은 지원 예산을 가지고 생색도 내고 예술계 길들이기도 하려는 잘못된 의도를 포기해야 한다. 당연히 예술 지원에 합당한 액수를 편성해야겠지만 만약 정말로 부족하다면 우선순위가 필요하다.

언제부턴가 예술 지원에 있어 “선택과 집중”이 무슨 바이블처럼 지원 정책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그건 예술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명백한 오류이다. 예술은 실패 확률이 높다. 아니, 성공 확률이 거의 0%에 가까우니 기적이라 부를 만하다. 그런 실패를 무릅쓰고 덤벼드는 것이 예술인들이다. 그중 일생 단 한 번이라도 성공해서 이름을 남기는 사람은 정말 극소수이다. 나머지는 실패만 하다 삶을 끝내고 만다.

불행히도 우리에게는 성공 가능한 경우를 미리 찾아낼 정확한 눈이 없다. 그래서 예술적 수월성을 기준으로 하는 “선택과 집중” 정책은 합당하지 않다. 그보다는 수많은 실패를 지원하는 “소액다건” 정책이 옳다. 물론 거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실패할 일에 세금을 쓴다면 국민들이 반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국가라면 옳은 정책에 대한 확신을 갖고 사회적 합의를 위한 설득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둘째. 연극 관련 정책의 일관성이다. 예를 들어 대학로 문화지구만 보더라도 그 명칭에 맞게 전체 정책 방향의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도처에서 서로 어긋나는 정책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종로구는 한국연극인복지재단이 위탁 운영하는 ‘대학로어린이집’에 대해 느닷없이 “연극인 자녀 우선 입학” 기준을 포기하도록 하였다. 그나마 여기에 희망을 걸고 있던 연극인 부모들은 갑작스런 기준 변경에 당황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또 하나 ‘대학로 문화지구’ 내 극장들에 대한 융자지원도 연말에 신청을 받았는데 실제 상황을 보니 철저하게 극장대표의 신용도를 따지는 방식이었다. 정부가 보증을 서는 게 아니고 이자 차액만을 보전해 주는 것이라 은행으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신청액수에 턱없이 못 미치는 액수가 결정되고 있었는데, 그러니 결국 있으나마나한 제도였다.

진정 연극 중심의 문화지구를 원한다면 연극인이 행복한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그것과 계속 어긋나고만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적어도 상식 차원의 일관성 확보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셋째. 입시 제도의 개혁이다. 연극 관련 학과의 입시 경쟁률은 최고 2-300대 1에 이른다. 수시와 정시를 합쳐 심하게는 20번 정도 시험을 보는 학생들도 있다. 심사하는 교수들도 여러 학교를 순회하면서 같은 학생들을 여러 번 만나게 된다. 많은 이들이 이런 낭비적 상황을 지적한다. 그러나 전혀 달라지지 않고 매년 같은 일이 반복된다.

고등학교에도 교육과정이 있다. 대학입시는 그 교육과정에 의거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연극학과 입시에서는 그런 체계성이란 찾아볼 수 없다. 거의 연극 현장 오디션과 비슷한 방식으로 진행되는 입시는 그 목적을 가늠하기 어렵다. 연극을 전공한다고 모두 배우가 될 것은 아니다. 스태프도 있고 교육자도 배출해야 한다. 따라서 연극 관련 다양한 소양을 기준으로 학생을 뽑는 것이 옳다.

이에 있어 적어도 교육과정에서 명시하고 있는 “연극의 이해”, “연기”, “무대기술”, “연극제작실습”, “연극 감상과 비평” 다섯 과목만이라도 골고루 살피는 제도가 필요하다. 아울러 연기 실기에 대해서도 지금처럼 동일한 학생들이 같은 내용을 가지고 여러 번 같은 심사위원을 만나는 방식이 아니라 기초 연기력에 대해서 합동으로 점검받아 그 점수를 가지고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넷째. 연극이론의 정립이다. 이론은 현실로부터 출발한다. 실제 현상을 분석하고 정리한 것부터 그것을 정리하고 또 정리해서 도출되는 형이상학적 담론까지 모두 이론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연결고리가 없는 이론은 미신이 되기 십상이다. 근거 없이 목소리만 높이며 현실을 압박하는 괴물 같은 이론들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

특히 연기에 대한 이론은 수만 많을 뿐 정확하게 현장까지 연결되는지 확인할 수 없다. 그러다보니 입시 현장에서마저 연기에 대한 정확한 기준이 없어 심사 교수에 따라 전혀 상반되는 결과를 내놓기 일쑤이고, 평론에서는 연기에 대한 판단은 아예 없거나 대단히 막연한 감상적 수준에 머물며 현장을 왜곡시키기도 한다.

아주 작은 것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치열하게 머리를 맞대고 다투는 상황을 그려본다. 그래서 옳고 그름이 분명한 판별 기준들이 계속해서 축적돼야 한다. 그렇게 작은 것을 다루는 학자들이 존중받아야 한다. 사실 형이상학적인 거대 담론을 갖고 얘기하기는 쉽다. 설령 근거가 없어도 그 진위를 판별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론도 아니고 그런 사람은 학자도 아니다. 무늬만 이론이나 무늬만 학자는 사라지고 근거가 확실한 것부터 차근차근 쌓아가는 참다운 연극학계 풍토의 확립을 기대한다.

201621

오늘의 서울연극편집인 오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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