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다] 너에게 빛의 속도로 간다/ 정명문

현실과 마주하는 가능성

– 뮤지컬 <너에게 빛의 속도로 간다>

 

정명문(뮤지컬평론가)

 

작/연출 : 김명환

작곡 : 박기영, 주영민

출연 : 강태을, 김도신, 김민주, 김영철, 김찬호, 김현진, 김형균, 김호섭, 민우혁, 박세미, 박세웅, 손성민, 안재영, 전재홍, 최석진, 최연동

제작 : WE Network

일시 : 2015.6.26.~ 8.16.

장소 : 대학로 TOM 1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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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 확장의 현주소

 

뮤지컬은 해피 엔딩만 그려야 할까? 제66회 토니 어워드에서 닐 패트릭 해리스가 선보인 6분짜리 오프닝은 뮤지컬의 컨벤션(약속)과 일루전(환상)이 현실과 다르다는 점을 발랄하게 지적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에서 사회 이면을 다룬 작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퍼포먼스는 뮤지컬 장르의 기본 원칙(어쨌든 결말은 희망적이어야 한다)이 조금씩 변화하는 징조라고 할 수 있다.

2015년 한국 창작 뮤지컬은 다채로웠다. 동화 패러디, 괴물, 괴팍한 예술가, 전쟁포로, 조선의 마지막 옹주, 자살, 청년실업, 스포츠, 타임 슬립 등의 소재가 발굴, 재연되며 관객과 시장성을 확인해주기도 했다. 주인공이 죽는 엔딩도 가능해졌고, 사회적 이슈와 함께 비주류에 대한 시선들을 허용하기도 한다. 현재 한국 뮤지컬은 데이트 족, 중년, 마니아 등 다변화된 관객층을 겨냥한 방식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이런 확장은 여러 가능성을 타진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스포츠는 각본 없는 드라마라 할 만큼 극적인 측면이 있기에 영화, 만화에서 감동적인 소재로 활용되었지만 공연물에서 다뤄진 적은 드물었다. 그런데 2015년에는 유도와 야구를 소재로 한 작품(유도소년, 너에게 빛의 속도로 간다)이 흥행됐다. 연극<유도소년>과 뮤지컬 <너에게 빛의 속도로 간다>(이하 <너빛속>)는 여러모로 비슷하다. 1990년대 스포츠 키즈, 당대를 연상케 하는 음악, 운동만 아는 촌놈과 엄친아가 실력과 여자 둘 다에 경쟁 관계가 된다는 얼개들이 그렇다. 게다가 이 작품들은 경기 혹은 훈련 장면을 배우의 몸으로 보여주는 역동성까지 확보하였다. 시각적 효과가 난무하는 시대에 현장성을 중시하는 공연물의 출현은 반가울 수밖에 없다. 거기에 뮤지컬 <너빛속>은 주류적 시선으로 보면 성공하지 않은 인생을 다루면서 장밋빛 환상이 빠진 결말을 보이기에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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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과 실패는 생각의 차이?!

 

<너빛속>은 김건덕 선수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시작은 1994년 세계 청소년 야구대회 우승부터 이다. 이 대회에서 국가대표로 활약한 건덕은 시속 160km를 던지는 능력으로 주목받으며 MVP 수상을 한다. 귀국 후 이승엽과 김건덕은 치열한 스카우트 전쟁을 마다하고 동기를 위해 대학 진학을 결정한다. 건덕은 승엽의 친구이자 스카우터가 꿈인 효정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다. 승엽과 건덕은 예비 선수 신분으로 대학에서 합숙 생활을 하지만 강압적인 환경에 실망하며 대학에 떨어지기 위해 노력한다. 그 와중에 건덕은 새우잡이 배 선장인 아버지와 노동자의 실랑이에 어깨를 다치며 자신의 환경을 원망하게 된다. 효정은 건덕의 재활을 권하지만 비뚤어진 건덕은 결국 승엽과 무리한 승부 대결로 상태를 악화시킨다. 결국 승엽이 야구선수로 이름을 알리는 동안, 건덕은 불운의 20대를 보낸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건덕은 야구 코치로 제2의 삶을 선택한다. 2015년 건덕과 승엽은 목동야구장 기념행사에서 시구와 시타로 예전처럼 마주서고, 건덕은 여전히 160km를 던지는 걸로 끝난다.

주인공 건덕이 가장 빛난 시기는 첫 장면이었다. 과거 고교 야구에서 주목받던 투수 대다수는 우승을 위해 혹사당했고 그 결과 20대에 부상 슬럼프로 야구를 그만두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는 팀의 승리가 곧 나의 승리라는 구호가 개인의 희생을 담보로 한 것임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공동체를 위해 움직이던 개인의 순수성은 개천에서 용이 날 만큼 실력이 있어도 그 몸이 부서질 때 무너지기도 했다. 성공한 것으로 보이던 공인이 추락하면 절벽 끝까지 내몰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은 전환점에서 잘못된 선택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열정과 노력을 하지 않은 결과가 아니라, 성공에 대한 잘못된 판단 때문에 무너졌을 수도 있는 것이다. 김건덕의 쇠락은 타인 착취, 성공 신화의 허상, 관리되지 못한 재능 등 덮고 싶은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이렇게 <너빛속>은 성공 신화 저편의 개인을 그려냈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완전히 불타오른 순간이 우리 삶에서 몇 번이나 있을까. 뮤지컬은 승엽과 건덕의 대결(넘버 ‘넌 죽을 때까지 나 못 이겨’, ‘9회말 2아웃’)로 이 화두를 던지고 두 사람의 운명을 엇갈리게 한다. 건덕의 스피드를 뛰어넘을 수 없던 승엽은 타자로 전환했고, 투수 대 타자로 승부하여 자신의 콤플렉스를 극복한다. 건덕은 ‘완전연소’를 외쳐보지만 부상으로 인한 연습부족이 그를 무너지게 한다. 두 사람의 대결은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받아들였을 때의 결과로도 해석할 수 있다. 현재의 상황이 본인이 원하는 모습이 아닐 때 절망으로 치닫게 될 수 있다. 사실 환경 탓으로 돌리는 건 도피에 불과하건만 주어진 상황과 세계를 뛰어넘기란 참 만만치 않다. 건덕은 본인이 원하는 모습이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받아들이는데 많은 시간이 든다. 이 뮤지컬은 하고픈 것을 선택하고, 자기 자신과 마주한 그 순간이 결국 ‘완전연소’라는 것을 전달하고자 한다.

우리네 일생이 변하려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걸 직접적으로 이야기 하면 뻔한 조언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너빛속>은 EBS 수능 강사가 ‘시간의 운동성’을 발랄하게 풀이하는 것으로 대체한다. 빛은 1초에 2억9천9백7십9만2천4백5십8미터를 움직이는데 이 속도를 넘어서면 시간여행도 가능하며 그를 통해 과거와 미래를 움직일 수 있단다.(‘엄청 쉽게 설명하는 특수상대성 이론’) 이 작품은 공의 속도, 사랑의 설레임, 성공과 추락의 속도감을 보여주되, 그보다 빠른 것이 ‘생각의 전환’임을 은근슬쩍 던져준다.

<너빛속>은 건덕이 빛나던 과거에 3/4의 시간(봄, 여름, 가을)을 투자한다. 특히 봄은 밝고 과장되어 있다. 이후 1/4(겨울)은 건덕의 내리막인데 10여년의 시간을 그림자와 대사로 짧게 처리한다. 이로 인해 극이 급격히 마무리되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빛의 속도’로 뛰어넘는 생각의 전환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였지만 관객에게 어필되기 위해서는 친절한 설명이 아쉬운 지점이기도 하다. 또한 건덕이 다치는 상황들이 신파적으로 보일 수 있기에 급격한 상황 변화에 대한 개연성이 추가되어야 작품의 의도가 확실히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실패와 좌절을 겪는 젊은이의 모습은 굉장히 가까운 사람으로 여겨지게 한다.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며 미래를 기대하기 보다는 현재에 충실할 것. 간단하지만 지키기 힘든 이 시선은 여전히 지금의 관객에게 공감을 줄 수 있는 이야기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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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동성과 현장감, 뮤지컬 넘버의 가능성

 

무대는 야구장이 연상되는 빈 공간을 중앙에 배치하고, 양 사이드는 연습실과 건덕의 집으로 보이는 장치를 간단한 회전으로 보여준다. 여기에 플랜카드나 야구장의 조명을 추가하여 시공간의 변화를 느끼게 한다. 특히 스포츠 중계 해설은 배트로 공을 직접 치지 않아도 역동성을 부여하는데 기여한다. 스포츠 소재에 대한 이미지를 잘 반영하면서, 무대의 특성을 살려낸 영리한 장치라 할 수 있다.

<너빛속>의 넘버들은 락, 왈츠, 발라드, 펑키한 리듬을 가지고 있으며, 다양한 가창방식으로 각각의 상황을 표현하는 기능을 이행하고 있다. “슈퍼스타”는 경쾌한 응원가 스타일의 곡인데 후렴구를 먼저 배치하여 시작과 흥분된 감성을 표출한다. 이후 경기 진행에 맞물려 건덕과 승엽의 희망이 한 소절 씩 쌓여지고, 하이라이트에서는 후렴구를 통해 승리의 함성을 연상하게 하는 구성을 취한다. 게다가 이 곡은 베이스 반주나 곡 진행이 90년대 풍으로 이루어져서 과거의 꿈, 희망의 느낌도 살려준다.

두 번째 넘버인 “빛의 속도로 날아가”는 첫사랑의 아련한 감정을 발라드와 왈츠 멜로디의 독창으로 표현한다. 이후 “야구선수세요”는 앞의 곡과 상황을 믹스하여 극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 곡은 3번의 변화가 있다. 먼저 건덕이 상상하는 효정의 이미지는 앞 곡의 멜로디를 활용하되 옥타브 올리고 박자를 늘여 섹시하게 표현한다. 이때 한번 씩 나오는 벨소리는 분위기를 전환시키는데 이는 남자의 환상임을 인지시키는 기능도 한다. 이후 효정의 질문과 건덕의 대답으로 이어지는 듀엣은 점차 강화되는 건덕의 소망을 보여준다. 효정은 ‘야구 선수세요?’라는 질문만 할 뿐이다. 그런데 건덕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 점점 더 확신하는 대답을 한다. 이 곡 은 건덕이 자신이 처한 환경을 효정을 통해 도피하고 있음을 가사나 멜로디로 보여주되 10대다운 상상력으로 재미있게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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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르면”은 건덕, 승엽, 효정 셋의 10대적 설렘이 발라드로 표현되는데 이들의 하모니는 미래에 대한 바람과 연결되면서 노래와 플롯을 자연스럽게 이끌어주는 역할을 한다. 이후 “안녕 바다야” 는 여름이란 계절에 맞게 발랄하면서, 지금에 대한 가치를 끌어내어 분위기를 고조시키는데 기여한다. 이 곡은 90년대 댄스 그룹의 곡처럼 구성된 것이 특징이다. 전반부의 노래는 발랄한 분위기라면 후반부는 복잡하고 어두운 분위기를 조성하는 경향이 있다. ‘내 삶은 왜 이래’, ‘멍텅구리’, ‘넌 죽을 때까지 나 못 이겨’는 단조의 남성 솔로 혹은 중창으로 불안정한 상황, 상대와의 갈등을 표출한다.

<너빛속>은 ‘아프니까 청춘이다’ 식의 열정을 강요하지 않고 성공 뒤 그늘을 보이는 것이 뮤지컬에서 가능함을 보여준다. 또한 대화하듯 극과 넘버를 유기적으로 결합시킨 장점도 갖추었고, 복고가 철저히 관객을 고려한다면 세대 간의 접점을 찾는 코드가 될 수 있음도 증명한다. 이는 결국 탄탄한 극과 넘버라는 충실한 기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해진 결과이다.

이 작품은 창작산실에서 리딩을 거치면서 관객 요청에 의해 수정된 부분이 있다고 한다. 대중성과 주제의식 중 무엇에 초점을 맞출 것이냐 는 선택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이 작품은 ‘야구’라는 소재로 인해 가족들이 함께 보러올 가능성이 높다. 타깃에 따라 방향성은 분명 달라질 수 있다. 사회적 기준에서 성공이 아닐지 몰라도 김건덕이란 인물을 선택한 이유는 분명 “생각의 전환”에 방점이 찍혔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가능성은 흔히 볼 수 있는 성공담으로 마무리하지 않았다는데 있다. 익숙한 소재를 다른 각도로 조명하는 반전의 즐거움이 뮤지컬에서 더 많이 찾아지길 바란다.

 

*사진 제공: 위네트워크

**이 글은 웹진 문화 다에 실린 것을 수정하여 재수록한 것입니다.

http://www.munhwada.net/home/m_view.php?ps_db=culture_public&ps_boid=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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