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포트 베이비/ 최승연

발랄하게, 경쾌하게, 쿨하게
– 뮤지컬 <에어포트 베이비> –

 

최승연(뮤지컬평론가)

 

작: 전수양
작곡: 장희선
연출: 박칼린
단체: 신시컴퍼니
공연일시: 2016/2/23-3/6
공연장소: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1관
관극일시: 2016/2/23 8pm

 

airport

‘감염된 관객’을 양산하는 뮤지컬이 반드시 ‘좋은’ 작품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쉽게 밑천을 드러내지 않는 작품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 이유가 배우들 사이의 ‘케미’에 의해서든, 황홀한 넘버와 탄탄한 드라마에 의해서든, 작품은 동시대 관객들과 소통할 수 있는 자질을 어느 정도 갖춘 셈이다. 그러나 그동안 창작뮤지컬은 감염된 관객을 양산하는 주된 텍스트가 아니었다. 관객들의 취향을 선도했던 것은 라이선스 뮤지컬이었고 그 틈바구니 속에서 창작뮤지컬은 민족, 연애, 힐링, 코미디라는 키워드를 반복적으로 재생했다. 드라마와 음악은 항상 문제적인 요소로 지적되었다. 창작뮤지컬을 향한 각종 지원제도와 그 수혜작들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작품들이 비교적 안정적인 환경에서 각종 검증 단계를 거치며 상업 무대 진출의 기반을 다진다는 점 때문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2015년부터 창작산실에서 뮤지컬 분야를 분리시켜 창작뮤지컬 육성사업과 통합하여 시행하고 있는 ‘창작뮤지컬 육성 지원사업’은 대본공모-시범공연-우수공연-재공연의 전 과정을 지원하는 비교적 대규모의 지원 시스템으로서, 그동안 앞의 두 관문을 거쳐 ‘우수공연’에 선정된 다섯 작품에 업계와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 중 <에어포트 베이비(Airport Baby)>는 박칼린과 최재림의 참여 외에도 ‘입양아’를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일찌감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과연 이 작품은 창작뮤지컬의 새로운 레퍼토리로 정착할 수 있을까.

 

‘갈라진 혀’, 하지만 괜찮아

<에어포트 베이비>의 주인공은 조쉬 코헨이다. 그러나 그는 한국에서 조쉬가 아닌 ‘조씨’로 불린다. 조씨라는 이름에는 김승수라는 한국 이름이 겹쳐있다. 미국으로 입양된 한국인 김승수는 그렇게 한국에 잠시 머무는 동안 조쉬가 아닌 조씨가 된다. 한국인들은 스스로를 ‘아메리칸’이라 정의하는 조쉬를 조씨라 부르며 조소와 애정을 보낸다. 이러한 조씨 옆에는 딜리아가 있다. 이태원에서 게이바 딜리댈리를 운영하는 게이 할아버지다. 딜리아는 전라남도 벌교 출신이지만 고향집에서는 이미 ‘삭제된’ 존재로서, 갈 곳 없는 성소수자들과 유사 가족을 이루며 살고 있다. 조씨는 미국 음식이 먹고 싶어 우연히 딜리댈리에 흘러 들어가고 이내 이들과 ‘가족’이 된다. 결국 조씨는 엄마와 외삼촌을 찾게 되지만, 진짜 가족보다 이들-유사 가족이 정서적으로 훨씬 가깝다.

작품은 입양아 조씨의 엄마 찾기 여정을 다루는데, 이 핵심 드라마는 의도적으로 신파를 거부한다. 이는 작품이 조씨와 엄마의 직접 대면을 최대한 피하고 조씨가 딜리아와 함께 좌충우돌하며 엄마를 찾는 과정과 ‘그 이후’에 집중함으로써 거두는 효과다. 가난 때문이든 현실적 선택 때문이든 버린 엄마와 버려진 아이와의 해후는 눈물과 후회, 탄식과 슬픔으로 상상되기 마련이다. 특히 이 작품에서처럼 가난과 운명이 입양의 원인을 제공했을 때는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에어포트 베이비>는 조씨와 엄마가 직접 만나는 순간을 최대한 지연시키고 만남의 순간을 최대한 덤덤하게, 그리고 ‘연극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작품의 관점이 이들의 슬픈 만남자체를 클라이막스로 다루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려준다.

그보다 작품은 경계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을 경쾌하게 다루는데 더 힘을 쏟는다. 정체성을 ‘언어’의 문제와 연관시켜 조씨와 딜리아의 ‘갈라진 혀’를 극적인 에피소드로 적극 활용한다. 이 작품의 초반부 리듬을 경쾌하고 밀도 있게 주도하는 에피소드는 조씨가 어학원 영어강사로서 영어를 가르치는 장면과 곧이어 이어지는 한국어 학습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영어의 ‘p’와 ‘f’ 음가를 구별하지 못하는 한국인들과 한국어의 ‘카’와 ‘까’ 음가를 구별하지 못하는 조씨를 각 장면의 포인트로 설정하여, 그들의 발음을 교정해주는 조씨와 발음을 교정당하는 조씨가 빠른 템포로 이어진다(넘버 ‘Different’). 엄마와의 만남을 준비하는 과정을 ‘카’와 ‘까’를 구별하기 위해 애쓰는 조씨의 모습으로 압축한 작품의 의도 안에, 엄마와 한국어로 소통할 날을 기다리며 눈물짓는 조씨의 모습 같은 것은 없다. 오히려 조씨가 목포 엄마집에서 만난 외삼촌의 전라도 사투리를 알아듣지 못해, 그의 ‘워짜쓰까잉’을 ‘와치 아웃 스카이(watch out sky)’로 번역하는 장면처럼 상황의 아이러니가 주는 희극성만 두드러질 뿐이다.

마찬가지로 딜리아 역시 이중언어적 상황에 놓여 있다. 그의 일상은 게이의 언어와 몸짓으로 구성되어 있고 고향의 언어는 그의 생물학적 성을 표상하며 삭제된 상태로 존재한다. 이 작품이 게이를 주요 인물로 내세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덤덤한 색채를 유지할 수 이유는, 게이를 연기하는 남자 배우의 육체를 상업적으로 전시하는 수많은 뮤지컬들의 전략 대신 지금/여기를 살고 있는 경계인으로서 딜리아의 리얼리티를 전경화했기 때문이다. 작품에서 딜리아는 조씨의 엄마를 함께 찾으며 폭발하듯 고향의 언어를 되찾는데, 그 시작이 마치 ‘쇼 스타퍼(show stopper)’의 특별한 무대를 위한 것처럼 흥미진진하다. 내내 작은 목소리와 젖은 눈으로 이야기하던 딜리아가, 조씨를 받아주지 않는 목포집 대문 앞에서 남성의 진한 전라도 사투리를 폭발시키는 장면에서 고향의 언어를 찾은 애잔한 노스탤지어 같은 정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에게 고향이란 자신을 배제시키는 곳이지만 오래 전부터 이 상황을 체념해 왔던 딜리아는 게이의 언어로 이를 일상화할 뿐이다.

이처럼 중심인물들의 정체성과 언어의 문제를 발랄한 에피소드로 만든 것은 이 작품이 입양아 이야기를 하면서도 참신한 방향성을 취할 수 있었던 이유가 된다. 슬프되 치명적으로 슬프지 않고, 코믹하되 그 뒷맛은 오히려 씁쓸하다. 닫혀 있던 목포집 문이 열리고 엄마를 만난 조씨가 예상과 달리 냉담한 엄마를 만난 후, ‘김밥도 천국이 있고 떡볶이도 천국이 있는데 날 위한 천국은 없네’라며 노래하는 장면은 작품의 방향성을 집약해서 보여준다. 격정적인 파토스보다 덤덤한 자기 수용의 자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지속시키기 위한 동력이 된다는 이야기일 터. 뮤지컬이라고 해서 반드시 치명적일 필요도, 자기 파괴적일 필요도 없다는 일관된 관점은 그 자체로 매력적이다.

 

기본기에 충실한 웰 메이드 뮤지컬

<에어포트 베이비>의 가장 큰 미덕은 무엇보다도 음악과 드라마가 자로 잰 듯 딱 떨어진다는 점에 있다. 드라마에서 음악이 들어가는 지점을 찾는 ‘스팟팅’은 뮤지컬을 뮤지컬답게 만드는 핵심적 요소로서, 만약 뮤지컬의 드라마가 음악 없이 잘 흘러간다면 스팟팅에 실패한 것이 된다. 반대로 ‘웰 메이드’ 뮤지컬은 스팟팅에 성공한 작품들이다. 작가와 작곡가의 ‘합’이 좋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에어포트 베이비>는 이에 대해 교과서와 같은 답안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선택된 음악의 장르가 드라마의 관점과 잘 부합되어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 작품의 메인 테마인 ‘Airport Baby’는 컨트리 음악으로서 작품 전체의 인상을 결정짓는다. 이 넘버는 오프닝과 엔딩으로, 그리고 작품 전체에 라이트모티프로 반복됨으로써 근원을 알 수 없는 입양아 조씨의 처지를 주제화한다. 입양아의 슬픈 자기 인식이 5음계의 컨트리 음악으로 재현됨으로써, 슬프지만 치명적으로 슬프지 않은 작품의 관점이 음악적으로 형상화된다. 한국에 오자마자 자기 자신을 ‘공항에서 배달된 에어포트 베이비’로 정의하는 조씨, 엄마를 만나고 자신의 뿌리를 찾게 된 이후에도 여전히 자신을 ‘에어포트 베이비’로 정의하는 조씨는 컨트리풍의 ‘Airport Baby’를 부르며 작품을 열고 닫는다. 애잔한 듯 명랑하고 촌스러운 듯 세련된 메인 테마의 감각은 드라마의 방향성과 잘 부합된다. 게다가 드라마 안에서 조씨의 자기 인식이 일어날 때마다 울려 퍼지는 메인 테마의 라이트모티프는 관객에게 작품의 핵심을 무의식적으로 기억하게 만든다. 아이리시 풍으로 작곡된 ‘No Heaven For Me’의 끝자락에 ‘Airport Baby’의 라이트모티프를 덧붙임으로써 주제를 반복하고 정서를 이어가는 방식은 창작뮤지컬에서 흔히 발견되는 감각이 아니다.

이 작품의 또 다른 음악적 특징은 하나의 컨셉으로 상황이나 사연을 묶어 넘버를 입체화한다는 점이다. 이 방법은 작품의 드라마와 음악이 하나의 구조 안에서 움직이는데 큰 역할을 한다. 조씨와 딜리아의 아리아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음악은 드라마가 속도감 있게 진행되도록 입체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기다리는 사람에게 전화가 오지 않는 조씨와 딜리아의 사연을 한데 묶어 놓은 ‘No Call’, 장례식의 구음과 딜리아의 후회 그리고 구치소에 갇힌 조씨의 슬픔이 묶인 ‘어이야’, 지나간 삶들이 나름 괜찮았다고 이야기하는 딜리아와 이제 한국을 떠나가는 조씨가 스스로를 위로하는 ‘It’s OK’가 대표적이다.

<에어포트 베이비>가 전반적으로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극의 흐름을 보이는 것은 이처럼 기본기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극적 효과를 위해 최소화된 영상과 조명의 사용 역시 극의 흐름의 기여하고 있다. 현재 뮤지컬 무대는 기술적으로 난이도가 높은 영상을 자유자재로 구현함으로써 세트가 움직이는 아날로그적 무대에서 대부분 탈피해 있다. <에어포트 베이비> 역시 영상을 무대화하고 있지만 비행기를 모티브로 한 무대 상단의 구조물 안에서만 영상을 제한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오히려 극의 주제와 배경의 움직임을 깔끔하게 구현했다. 전반적으로 작품의 주제와 관점과 공명하는 박칼린 연출의 개인사가, 입양아 및 경계인에 대한 예술적 가공 작업에 시너지를 일으키고 있었다.

 

해결되지 못한 숙제들

그러나 아직 해결되지 못한 요소들 역시 눈에 띈다. ‘작위성’의 문제는 이 작품의 가장 큰 약점으로서, 향후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숙제이다. 먼저, 작품의 형사는 신파를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로 보인다. 따라서 인물이 드라마의 필요에 따라 도구화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조씨와 엄마의 만남이 성사된 이후 형사가 딜리댈리에 들이닥쳐 조씨의 마약 소지 여부를 캐기 시작하면서, 조씨는 죽어가는 엄마를 더 이상 ‘직접’ 만날 수 없는 상황으로 돌입하게 되는데 작품은 이렇게 조씨의 염원을 철저히 거스르면서까지 깔끔하고 쿨한 정서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조씨는 구치소에 갇혀야 하고 엄마는 동시에 죽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조씨의 상습적인 마약 복용 문제는 처음부터 부각될 수밖에 없었는데, 이를 조씨가 한국에서 일자리를 얻기 위해 쓴 이력서에 ‘미국에서 마리화나 소지로 벌금형’이라는 항목을 첨가함으로써 해결한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 부유한 유태인 가정에서 제대로 교육받은 조씨가 한국에서 사용할 이력서에 범법 행위를 적는다는 것은 넌센스에 가깝다. 같은 맥락에서 형사는 조씨의 목포집까지 올 정도로 조씨를 따라 다니는데, 이 역시 인물 스스로가 “지금 단속기간인데…줄줄이 엮다 보니 어째 여기까지 왔네요?”라는 궁색한 변명을 할 정도로 ‘신출귀몰’의 프레임을 벗기 힘들다. 이처럼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헤어졌던 엄마와 아들의 만남을 신파적으로 그리기 거부하는 작품의 태도에서 모자 관계에 게재된 한국 대중서사의 관습을 탈피해 보려는 의도가 드러난다.

또한 작위성의 문제는 넘버 ‘No Call?’에서도 발견된다. ‘No Call’은 딜리댈리 식구들에게 떠밀려 <사람을 찾습니다>에 TV 출연한 조씨가 ‘엄마를 찾았다’는 전화를 기다리는 과정과 심정을 묘사하는 넘버이다. ‘No Call’은 조씨가 엄마를 만났을 때 할 말을 연습하고, 존댓말을 입에 붙일 수 있도록 노력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말을 배운다’는 일관된 드라마의 맥락을 강조하기 위해 앞에서 가창된 넘버 ‘Different’의 라이트모티프가 반복, 확장되어 있다. 그리고 사이사이에 조씨가 엄마한테 전화가 왔는지 안 왔는지를 딜리댈리 식구들에게 확인하는 ‘No Call’이라는 가사가 삽입되어 있다. 그러나 기다리는 전화는 오지 않고 조씨는 점점 지쳐간다. 그러자 넘버는 지쳐가는 조씨를 딜리아와 오버랩시킴으로써 둘의 사연을 겹쳐 놓는다. 딜리아가 40년 전 자신을 떠난 유태인 남자친구를 아직도 기다리고 있지만 ‘전화가 오지 않는다’는 사연이다. 넘버는 이렇게 ‘No Call’을 매개로 둘의 사연을 겹쳐 놓아 노래의 폭과 깊이를 확장시키는 명민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지만, 조씨에서 딜리아의 사연으로 넘어가는 순간의 개연성이 확보되어 있지 않아 시점의 이동이 그다지 자연스럽지 않다.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을 연습하던 조씨가 갑자기 딜리아 남자친구 사진으로 시선을 돌리며, 그가 누구인지 질문하는 방식에 완전히 동의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특히 직전의 조씨가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을 연습하며 감정의 수치를 높이고 있었기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러한 작위성의 문제들은 향후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 판단된다. 적어도 크리에이터들이 방법을 몰라서 우왕좌왕한 것이 아니라, 선명한 결론과 방법론을 고집한 부산물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조씨가 엄마를 만난 이후 작품이 길을 잃는다는 점이다. 넘버 ‘No Heaven For Me’ 이후 후반부는 어떻게 해서든 조씨와 엄마와의 관계를 풀어야 할 극적 해결점을 마련해야 했는데, 이를 뜬금없는 쇼 스타퍼 장면 ‘이태원 공작새’와 다소 진부한 쌍둥이 동생으로 해법을 찾으려 했다. 이는 밀도 있던 극의 리듬을 헐겁게 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일련의 질문들을 낳는다. 조씨가 엄마의 냉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으로 가지 않고 한국에 남는다는 설정이 완전히 설명되고 있는가? 무의식에서 자신을 설득하는 쌍둥이 동생 준수를 본능적인 ‘혈연의 호출’로 생각해야 할까? 혹은 조씨의 분열된 자아가 자신의 과거를 똑바로 보도록 채찍질 하는 것일까? 이 모든 질문들에 긍정적인 답을 내놓는다고 해도, 쌍둥이 동생을 활용한 연극적 해법은 참신하지 않다. 추리소설의 계율 중, 결말에서 쌍둥이를 반전으로 활용하지 말라는 조항이 있을 정도로 쌍둥이 결말은 사실상 손쉬운 해법에 속한다. 또한 가난한 집안의 쌍둥이 형제가 우연히 부자와 빈자로 갈린다는 설정은 뮤지컬 <의형제(Blood Brothers)>를 상기시킨다는 점에서도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설상가상으로 이번 공연에서 조씨의 동생 준수를 연기한 오정훈은 ‘그렇다 치고’ 본다고 하더라도 최재림이 연기하는 조씨의 쌍둥이 동생으로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다. 조씨와 준수를 연기하는 배우 사이의 균형감이 (재공연이 가능하다면) 차후 캐스팅에 중요한 요소가 되어야 할 듯하다. 특히 이 작품은 ‘It’s OK’라는 완결된 결론과 비교적 공백이 없는 드라마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텍스트 내부에서 팬덤이 일어나기는 힘들어 보인다. 조씨와 딜리아, 그리고 조씨와 준수역을 맡은 배우들 사이의 케미가 팬덤의 진원지가 될 것이라 생각된다.

이제 창작뮤지컬은 동시대의 사회적 이슈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작품의 소재로 적극 활용하며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미국에서 고군분투 중인 김현준의 뮤지컬 <컴포트 우먼(Comport Women)>(2015)과 올해 8월 오프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될 신작 <그린카드(Green Card)>가 위안부 문제와 미국 내 한국 유학생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면, 한국에서는 노인의 죽음, 출산, 입양아가 소재로 활용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사실 뮤지컬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직전인 1990년대 중반에도 존재했다. <에어포트 베이비>처럼 ‘공항’을 배경으로 한 <인터내셔날 에어포트>(1995)라는 작품도 존재했다. 이 작품은 조기 유학의 폐해를 다루며 당시 사회의 이슈를 전경화했지만, 일찍 미국물을 먹어 타락한 청소년과 당시의 풍토를 계몽하려는 의도를 선명히 한 어정쩡한 상태의 공연이었다. 20년이 지난 지금/여기의 시도들은 뮤지컬을 오랫동안 학습하고 전문적 교육을 받은 뮤지컬 키드들이 리얼하고 발랄한 감각으로 사회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다. 전수양과 장희선 콤비의 <에어포트 베이비>는 이에 대한 좋은 모델이다. 그 미래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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