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소년들의 왕국/ 최하은

모든 왕국의 시작에 관하여: 극단 걸판 <늙은 소년들의 왕국>

최하은

 

작: 오세혁

연출: 오세혁

단체: 정의로운 천하극단 걸판

공연일시: 2016년 3월 24일~4월 10일

공연장소: 대학로 게릴라극장

관극일시: 3월 25일

 

 

<늙은 소년들의 왕국(이하 ‘늙소국’)>은 작가‧연출가 오세혁과 극단 걸판의 대표 레퍼토리 중 한 작품이다. 서울은 물론이고 전국 각지에서 초청을 받아 여러 차례 공연되었으나, 올해 공연에서는 ‘걸판 총출동’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극단 걸판의 2기 단원들을 중심으로 보다 젊은 ‘늙소국’을 만날 수 있었다. 약 서른 명의 배우들이 소극장인 게릴라극장 무대를 꽉 채운 모습은 그것만으로도 약간의 감동을 전해 준다. 서른 명의 배우라는 말이 선뜻 와 닿지 않는다면 서른 개의 인생이라고 할까. 서른 명의 이제까지 전혀 모르고 앞으로도 어쩌면 잘 모를 사람들의 결집이라고 할까. 그러니까 모종의 공동체라고 할까. 즉 이 공연은 사회와 공동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작품임과 동시에, 그 존재 자체로 하나의 공동체의 가능성의 증명으로도 기능하고 있었던 것이다.

 

‘늙소국’에는 비극의 대명사인 <리어 왕>의 ‘리어’와 희극의 대명사인 <돈키호테>의 ‘돈키호테’가 중심인물로 등장한다. 두 노인은 모두 구멍이 숭숭 뚫린 내복에 담요를 두른 차림이고 지팡이를 짚고 있다. 리어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돈키호테는 자신의 모험을 자랑한다. 그러나 비극의 주인공으로만 알려졌던 리어는 돈키호테가 보기에는 딸들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내쫓긴 웃기는 왕국의 웃기는 왕이고, 반대로 리어가 보기에 돈키호테는 이룰 수 없는 꿈에 매혹되어 고통 받는 불쌍한 노인이다. 이들의 만남으로 인해 드라마의 세계에서는 결코 공존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던 희극과 비극이 명백하게 교차하며 삶의 양면성이 포착된다. 왕국을 잃은 왕 리어는 모실 사람이 없는 기사인 돈키호테를 자신의 기사로 임명하고 함께 왕국을 건설하기로 한다. 그들이 만난 곳, ‘서울역’에서.

서울역은 부랑자들의 앞마당이다. 부랑자들은 주로 누워 있으며, 초코파이를 나눠주는 봉사자들이 올 때에만 생기를 띤다. 또한 서울역은 선동가들의 정글이다. 정치가, 시위자, 종교집단의 사람들이 바삐 오가면서 자신들의 믿음을 설파하려 애쓴다. 이곳에서 리어와 돈키호테는 부랑자들의 텃세로 고난을 겪는다. 이때 교복 차림의 한 소년이 등장한다. 말을 하지 않는 이 소년을 부랑자들은 마찬가지로 텃세를 부려 괴롭히고, 리어와 돈키호테는 이 소년을 자신들의 왕국의 ‘백성이’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이로서 왕, 기사, 그리고 백성이 있으니 중세국가의 인구 분포는 갖춘 셈이다. 이들은 박스 한 장 위에 모여 이들의 왕국을 선포한다. 백성이를 먹여 살리기 위해 왕인 리어가 기타를 들고 버스킹을 해 돈을 모으거나, ‘이웃 국가’인 부랑자들을 상대로 백성이를 구출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기도 한다. 이러한 역경 끝에 마침내 부랑자들마저 평정해 왕국의 백성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때 별안간 들이닥친 ‘자식들’에 의해 리어와 돈키호테는 끌려간다. 하룻밤 꿈이었던 것처럼 이들이 지은 왕국은 무너지고, 부랑자들은 절망한다. 그러나 백성이의 무언의 호소에 감화된 부랑자들은 백성이를 필두로 리어와 돈키호테를 찾으러 떠난다. 이들은 자식들의 집에서 리어를 구출하고 정신병원에서 돈키호테를 구출해내지만 거대한 싸움의 불길에 휘말린다. 이들은 저마다의 간절한 소망을 외치며 싸운다. 이윽고 싸우던 사람들은 모두 쓰러지고 그 위에 흙이 덮이고 꽃이 심어진다. 리어와 돈키호테, 백성이는 아름다운 꽃이 만발한, 그러나 그 밑에 묻힌 이들을 이제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꽃밭을 내려다본다. 백성이는 꽃밭의 꽃을 뜯기 시작한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리고, 리어와 돈키호테는 새로운 모험을 결의한다. 땅 밑에 묻혀 있던 것들이 들썩이기 시작한다.

 

극 내적으로 보면 이 작품은 간결하고 알기 쉬운 사회 비판적 성격을 띤다. 박스 한 장 크기의 땅덩어리에 왕국을 선포한 왕은 기사와 함께 백성을 지킨다. 굶주림과 추위로부터, 또한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이는 로크(J. Locke)가 주창한 바와 같이 국민으로부터 생명과 자본과 자유(life, estate, liberty)라는 자연권을 위임받아 이를 수호할 의무를 띠는 근대국가를 압축적으로 설명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극중 버스킹을 하는 리어의 입을 빌려 ‘정치가가 예술하고 예술가가 정치하는’ 앞뒤가 바뀐 세상을 직설적으로 비판하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대 한구석에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시를 낭송하는 유령들을 등장시키면서 이러한 혼란의 시대에 예술이 어떠한 방식으로 참여할 수 있는지 또는 참여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볼 만한 문제를 던지고 있다.

‘늙소국’을 관람한 혹자는 필시 불안한 기색으로 물을 것이다. 보다 품위 있는 방식으로 세련되게 돌려 말함으로써 현실과는 유리된 예술의 격을 지키며 사회에 참여할 수는 없었겠느냐고. 나는 이미 어떤 관객으로부터 ‘극이 너무 단정적인 정답을 제시해주는 느낌이었다’라는 식의 아쉬운 평을 들은 바 있다. 그러나 질문을 돌려주자면, 대관절 이렇게 ‘당연한 얘기’를 하는 연극에 어떤 완곡어법이 또 왜 필요한지 의문스럽다. ‘백성이 위험에 빠져 있다면 마땅히 그 백성을 구해야 한다’든가 ‘백성이 굶고 있다면 음식을 구해 먹여야 한다’ ‘기사는 백성을 구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와 같은 말들이 당연한 의무가 아니라 일종의 선동과 유도의 목적을 띤 정치적 구호로 받아들여진다는 그 사실 자체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위험에 빠져도 구출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사회, 이렇게나 발전한 나라에서 아사를 두려워해야 하는 사회, 공권력이 우리의 편이 아닌 사회 말이다.

사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늙소국’은 직설적이다. 그것은 완곡어법이 불필요한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늙소국’은 뻔하다. 그것은 당연지사를 설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늙소국’은 사회비판적이다. 그것은 당연지사가 지켜지지 않는 토대에서 이 작품이 공연되고 있기 때문이다. ‘늙소국’은 사회참여적이다. 그것은 정치인이 정치하고 예술가가 예술할 수 있는 세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늙소국’은 시끄럽다. 그것은 여럿이 떼로 뭉쳐 소리라도 지르지 않으면 아무도 들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여럿이 떼로 뭉쳐 큰 소리를 내며 자신들의 주의주장을 펼치는, 시끄럽고 귀찮은 일을 우리는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늙소국’은 한국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볼 수 있는 서울역이라는 공간에서 가장 마땅한, 그러나 그렇기에 더욱 원대하고 막막한 왕국 건설의 꿈을 품은 늙은 소년들의 모험담이다.

 

이렇듯 첫 극작으로부터 몇 년의 시간이 흘러도, 아니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작품이 갖는 사회와의 연대적 가치가 퇴색되기는커녕 점점 더 강화되고 재발견되고 있는 ‘늙소국’이지만, 그 중에서도 이번 공연은 더욱 특별한 점이 있었다. 이제까지는 극의 내적인 부분을 주로 살펴보았으나 지금부터 다룰 이야기는 극 외적인 부분이다. 숨길 이유가 없다. 나는 극단 걸판의 2기 단원으로 ‘늙소국’의 제작과정의 아주 일부분을 볼 기회가 있었다. 그 취지와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2016년 버전 ‘늙소국’은 작년에 처음으로 2기 단원을 선발한 극단 걸판의 인원 중 스스로 참여 의사를 밝힌 배우들이 총출동한 공연이다. 보통은 1인 다역으로 열 명 가량의 배우들이 소화해내는 작품이나, 이번 공연에서는 앞서 말했다시피 서른 명 남짓의 배우들이 무대에 섰다. 1인 다역으로 소화되던 배역이 쪼개어지며 한 사람에게 돌아가는 대사와 출연 분량은 크게 줄어들었다. 두 시간짜리 고전 공연의 주연을 당당히 소화해내는 걸판의 간판 베테랑 배우도 이제 막 연극을 시작한 이십대의 배우 초년생에게 자신의 역할의 일부를 양보해야 했다. 와중 나름의 주연이라고 할 법한 ‘리어’ 역의 권겸민 배우는 극단 걸판 소속이 아닌 객원배우며, ‘돈키호테’ 역의 유원경 배우는 2기 단원으로 작년에 막 걸판 활동을 시작한 신인 배우다. 어떤 배우는 대사라곤 시위대의 구호밖에 없기도 했고, 내심은 본인에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역할의 옷을 입어야만 했던 배우도 필시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극단 걸판은 이 모든 배우들을 무대에 올렸다. 갈팡질팡 우왕좌왕 좌충우돌하는 젊은이들을 고스란히 관객들 앞에 세워놓은 것이다.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서른 명을 멋드러지게 수용할 만한 대극장을 대관하는 것도 아니었고, 누구에게나 스포트라이트가 한 번쯤은 가도록 기존의 대본을 세 시간짜리로 대폭 확장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늙소국’이라는 이름의 파이를 분배했다. 누군가는 조금 더 먹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덜 먹었을 것이나, 모두에게 그래도 비슷비슷하게 약간씩의 조각이 돌아가도록 나누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사실 더 먹을 수 있는, 더 먹고 싶었을 사람은 양보했다. 아직 조금밖에 먹을 수 없는 사람들이 파이를 먹음으로써 성장할 수 있도록. 먹고 자라서 뿌리를 깊게 내리고 팔을 높이 뻗을 수 있도록. 그래서 또 다른 새싹이 자라나기 위한 하늘을 받칠 수 있도록. 이것을 우리는 공동체라고 한다.

정치경제적 관점에서 지속 가능한 성장이란 없다. 숫자로 환산되는 모든 것에는 반드시 천장이 있다. 천장을 치고 나면 다음은 곤두박질친 후 바닥에서 저성장을 반복할 뿐이다. 그렇기에 지속 가능한 성장, 지속 가능한 발전이란 것은 숫자의 세계에서는 그저 선거용 허울 좋은 거짓말에 불과하다. 그런 것이 있을 수 있는 곳은 숫자의 영역이 아니라 사람의 영역이다. 유한한 자원을 지닌 지구에 인간은 끊임없이 태어나 온다. 대표적으로는 화석연료가, 그러나 장차 식량도, 땅이나 물이나 공기 같은 것도 결코 무한정 제공되지만은 않을 것이다. 부와 명예는 더욱 그렇다. 성장제일주의자들은 성장으로 인한 낙수효과가 결국 가난한, 빛이 닿지 않는 곳의 사람들까지 살릴 거라고 노래한다. 그러나 그 논리는 물이 높은 데에서 넘쳐 떨어지는 것을 입 벌리고 기다리는 사람들의 하루하루의 굶주림을 고려하지 않는다.

반면 걸판은 이러한 낙수효과가 극단 내에서 나타나는 것을 기다리는 대신, 높은 데에 있는 물을 바가지로 퍼서 뿌렸다. 아니, 아예 용수로를 대서 누구든 조금씩은 나눠 마실 수 있게 했다. 걸판의 대표인 오세혁 작가‧연출은 말한 바 있다. 연극을 하면서 살아야 제일 행복한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연극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고. 이번 ‘늙소국’은 말하자면 그의 철학이 낸 하나의 결론이었을 것이다.

 

모든 배우들에게는 모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간 걸어온 길이 있다. 삶이 있다. 그 삶 하나하나를 소중히 여기기에 그들 모두를 무리해서라도 무대에 세웠다. 누군가는 쉽게 말할 것이다. ‘쟤는 연기를 못 해’ ‘쟤는 아직 준비가 덜 됐어’ ‘쟤는 없는 편이 낫겠어’ ‘쟤는 캐스팅 미스야’. 그리고 이러한 비판들은 프로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배우들에게는 반드시 받아들여야만 하는, 또한 이겨내야만 하는 응당의 평가일 것이다. 그러나 그 평가를 받기 위해서라도 배우는 무대에 서야만 한다. 무대에 설 기회조차 없는 배우는 혹평마저 들어볼 수 없기 때문이다. 배우를 무대에 세우는 일. 부족한 형편에도 조금씩 나누고 양보하는 연극 공동체. 조금 거창하게 말해 버리자면, 극단 걸판은 이번 ‘늙소국’으로 마치 리어와 돈키호테, 백성이가 세웠던 것 같은 자그마한 왕국을 세운 셈이다. 왕이 백성을 먹이고 지키듯 극단이 배우를 무대에 세울 수 있는 공동체로서의 왕국을. 2기 단원들과 더욱 탄탄한 유대를 쌓은 극단 걸판의 앞으로의 행보를 기대해 본다. 극중에서 말하듯, ‘모든 왕국의 시작은 이런 식이었을’ 지도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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