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니슬라프스키 – 브레히트 (2)/ 이재진

스타니슬라프스키 – 브레히트 (2/5)
S T A N I S L A W S K I – B R E C H T

이재진(단국대 명예교수)

 

– 스타니슬라프스키는 극 이론가. 연출, 배우, 배우양성법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브레히트는 극 이론가, 연출가, 극장경영인이었다. 하지만 스타니슬라프스키는 배우로 브레히트는 극작가로 간단하게 구분하는 편이 훨씬 자연스럽다. 두 사람은 배우들의 연기론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만큼 그에 관한 많은 자료를 남겨주고 있다. 스타니슬라프스키는 연극배우가 지녀야할 모든 연기법과 창조력을 키우는 방법을 체계화시키고 실용화시켰다. 브레히트는 사회주의적 이념을 표출할 수 있는 변증법적 극이론으로 창조적 무대를 창출하였다. –

 

러시아 혁명과 볼셰비키의 문화정책

20세기에 들어선 러시아는 넘치는 실업인구로 몸살을 앓고 있었고 가난하고 어둡던 중세시대로 되돌아가는 듯 암울했다. 가부장적 권위적적인 분위기나 고루한 종교가 사회를 간신히 지탱해주고 있었고 교육수준은 최악이었다. 주민의 70~80%는 문맹이었다. 이런 처참한 현상은 러시아 외 유럽 어느 나라에도 없던 현실이라고 레닌은 한탄했다.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 여건이 숙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일자리가 없는 노동자들은 극단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사회주의 혁명을 이룩할만한 조건이 조성된 것도 아니었다. 위축된 사회구조나 낮은 국민의식의 수준으로는 프랑스나 독일과 같은 거국적인 사회혁명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레닌의 지도아래 조직적으로 혁명을 이끌었던 Bolschewiki(majority)도 낙후된 문화적 수준을 혁명의 걸림돌로 생각했다.

 

혁명 전에는 러시아 사회주의 세력은 문학예술정책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맥시코로 추반당한 Leo Trotsky는 1938년 사회의 운명을 지키기 위해 자립적이고 혁명적으로 예술이 앞장서는 것이 최고의 과제라고 역설하였다. 레닌도 문화정책이 대중을 사로잡는 매개체임을 강조했지만 자본주의(자본)에 예속되어 있는 한 문인들이나 예술가, 배우들의 예술적 자유란 거짓이라 생각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자유를 얻을 때, 제정 러시아의 독제로부터 자유를 되찾을 때 비로소 문인들은 진정한 예술적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역설했다.

 

1917년 10월 혁명과 함께 연극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치솟아 올랐다. 문맹자들에게 극장은 기본교육기간으로서의 기능을 했고 글을 모르는 노동자, 군인, 농민들에게는 복잡하고 복합적으로 돌아가는 정치적 현황을 알려주는 신문 대용으로서의 역할을 발휘했다. 레닌은 규모가 큰 국립극장의 형태를 유지하는 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관객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10월 혁명이 일어나고 몇 해 지나지 않아 러시아에는 3000개 이상의 극단이 생겨났고 이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2십5만 명이 넘었다. 처음에는 어떤 작품을 무대에 올릴지 분명한 지침을 마련하지 못했다. 새로운 관객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알 수 없었다. 혁명 전에는 연극계에는 위기가 찾아왔었다. 주로 일상생활의 제반문제와 동떨어진 주제에 접근했기에 관객에게 너무 지루했기 때문이다. 혁명 후에는 독제군주, 자본주의 등과 같은 주제를 담은 고전작품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오셀로], [간계와 사랑], [군도], [검찰관](Gogol), [어둠의 힘](Tolstoi) 등등. 이런 작품들을 통해 과거를 다시 한 번 떠올리며 억압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독제나 군주에 항거하고 저항하는 민중의 모습을 무대 위에 강하게 그려 넣었다. 그런 점을 강조하기 위해 때로는 작품을 많이 뜯어고치기도 하였다. 기독교적인 교리대신에 사회적 제반문제가 가시화 되었다.

 

혁명이 일어나자 모스코바나 페터스부르크 극장들은 궐기했다.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기 전까지 우리는 일체 공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혁명의 성공을 위해서라도 연극과 같은 예술을 수단으로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사회주위 혁명의 핵심은 새 시대를 여는 새로운 사람들이었다. 새 사람이란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새로 시작하는 사람들이다. 레닌에 따르면 새로운 국가란 “노동자 농민이 주도하는 민주적 독재국가”인 것이다. 이런 새로운 정부가 짧은 기간 안에 건립되었고 이런 이념과 목표와 함께 그 과정이 문학과 예술을 통해 널리 보급되고 선전하기에 이르렀다. 10월 혁명으로 러시아는 억압과 착취에 종지부를 찍는 사회주의 세계혁명이란 이름으로 역사의 한 장면으로 한걸음 내딛고 있었다. 볼셰비키가 혁명을 통해 노동자와 농민에게 약속한 것은 “땅과 빵 그리고 평화”였다. 프롤레타리아트 역시 고전작품이 전해주는 높은 수준의 문회에 심취하고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어야 한다고 믿었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도 이런 구조적 문화적 고리를 꺾어 버릴 수 없음을 강조했다.

 

소비에트 연방이 교회를 무너트리고는 그 자리에 교회를 내세웠다. 교회 대신에 연극이 소비에트 연방의 변화에 기여하는 매체로 전용되었던 것이다.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연극이 이런 기능과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볼셰비키가 자신들이 꿈꾸는 세계변화를 위해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연극을 이용했다면 브레히트 역시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자신의 서사극을 투입했다.

 

할리우드와 브레히트

1933년 베를린 국회의사당이 불타자 파시즘과 싸우던 브레히트는 “은둔자의 길을 떠나는 노자”처럼 독일을 떠난다. 브레히트의 작품이 무대에 오르지 못하고 책은 공개적으로 불탄다. 1935년 독일국적을 빼앗긴다. Feuchtwanger, Piscator등의 도움으로 1941년 그렇게 낯설기만 하던 자본주의의 나라 미국으로 가는 배를 탄다. 멀리 미국 땅이 보이자 마르크스의 책을 바다에 던져버린다. 항구에 Feuchtwanger가 기다리고 있었다. “신발보다 더 자주 나라를 바꾸어가며 돌아다닌” 브레히트는 “우리 시대의 방랑객”이었다.

그래서 그 이는 짐을 싸기 시작했다, 아주 필요한 것들로:
많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런 저런 것들을.
그러나보니 곤방대도, 저녁이면 늘 피던 놈으로,
그리고는 얄팍한 책도 하나, 항상 읽던 것이니.
빵 덩이도 하나 웬만큼 대충 썰어서.

 

브레히트

브레히트의 희곡은 두 번의 세계대전 사이에서 태어났고 대부분 그 틈바구니에서 무대에 올랐다. [한밤의 북소리]로 독일무대를, [서푼짜리 오페라]로 유럽무대에 혜성처럼 나타났던 극작가 브레히트는 미국에서는 발붙일 곳을 찾지 못했다. 할리우드나 브로드웨이에서 브레히트는 유럽에서 건너온 사상이 건전치 못한 꽤 재재한 별 볼일 없는 위험한 외국인(Enemy Alien)에 불과했다.

 

Council for a Democratic Germany(CDG)

미국에 거주하는 독일망명자들은 1944년 뉴욕에 모여 전후 독일문제를 생각하는 모임을 결성했다. 브레히트는 CDG의 창립위원이다. 소련에는 1943년 이미 ‘자유독일 국민위원회’(Nationalkomitee Freies Deutschland. NKFD)가 결성되어 있었다. 이런 모임은 포로, 망명자들, 나치 전범문제 등 전후 독일문제를 의논하려는 기구였다. CDG에 참여하기로 약속했던 토마스 만은 결성단계에서 갑자기 참가를 취소한다. 2차 대전에서 독일은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나치 정권에게만 전쟁의 책임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독일 국민 전체에게 전쟁의 잔학상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인가?! 토마스 만은 독일연방공회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되기도 했으나 결국 조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브레히트는 언젠가 토마스 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글재주 없는 사람이 그렇게 두꺼운 책을 쓴 것은 참 기이한 일이다,” 뒤렌마트도 귄터 그라스에 대해 똑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하이너 뮐러는 이에 대해 그런 견해는 극작가와 소설가의 차이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극작가는 앉아서 쓰는 것이 아니라 서서(움직이면서 발로) 쓰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토마스 만(1929)이나 귄터 그라스는 노벨문학상)(1999)을 탔다.

 

House Committee on Un-American Activities(HCUA)

1942년 미국은 2차 대전에 개입한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미국은 할리우드에서도 미국에 해를 끼칠 수 있는 외국인 18인을 골라낸다. 브레히트도 이에 포함된다. FBI눈에 브레히트는 미국에 해를 줄 수 있는 요주의 외국인(Enemy Alien)으로 보였다. 국회에 설치된 반미활동조사위원회(HCUA)에서 브레히트는 통역을 마다하고 유창하지 않은 영어로 이렇게 말했다(1947.10.30.).

 

I have written a number of poems, songs, and plays, in the fight against Hitler, and, of course, they can be considered, therefore, as revolutionary, cause, I, of course, was for the overthrow, of that government.
물론 저는 히틀러에 맞서 투쟁하자는 여러 가지 노래나 시, 드라마를 썼습니다. 그야 물론 혁명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니까 사실 저는 그런 정부를 쓰러트리자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질문은 [조처](Die Maßnahme)에 집중되었다. 다행히 위원장은 브레히트의 작품세계를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 곤란한 질문이 나오면 브레히트는 번역상의 문제로 돌리며 피해갔다. 끝내 결정적인 질문이 떨어진다. “당신은 공산당 당원입니까?” 이 질문에 브레히트는 “no! no! no! no!”를 네 번이나 내뱉는다. 실제로 브레히트는 당원으로 등록한 적은 없었다. 좌우간 워싱턴의 시간은 유럽시간으로 환산하면 아직 새벽은 오지 않았다.

 

1년 후 브레히트는 Eric Bentley와의 대화에서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그 친구들은 나치에 비하면 그리 못돼 먹지는 않았지. 나치는 내게 절대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했거든. 워싱턴에서는 그래도 담배를 허락하더구먼. 그래 담배를 피우면서 질문에 대답하는 중간 중간 여유를 찾았거든.

 

1947년 청문회에서 혼쭐이 난 후 그날로 망명생활을 끝내고 도망치듯 미국을 떠난다. 미국에서 돌아오면서 브레히트는 서독과 동독이라는 갈림길에 서 있었다. 미국군정이 관할하는 서독은 브레히트의 입국을 환영하지 않았다. 법적으로는 독일시민도 아니었다. 동독에서는 좋은 조건을 제시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당국의 지시와 검열이 기다리고 있었다. 브레히트는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동독을 선택했다. 사회주의 정권은 브레히트에게 극단(Berliner Ensemble)을 주었고 1954년 [억척어멈] 등의 성공으로 유럽연극을 주도하게 된다.

 

고전주의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보편적이고 이상적인 형식과 내용이 필요하다. 브레히트는 지름길을 찾으려했다. 무섭게 치고, 밀고 들어오는 영화나 라디오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그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이상주의에 사회주의적 이념을 섞어 서사극이라는 새로운 틀 속에 집어넣었다. 브레히트가 고전주의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이제 사회주의라는 이념의 벽과 서사극이라는 틀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다.

 

안톤 체호프와 스타니슬라프스키

1901년 스타니슬라프스키는 체호프의 [세 자매]를 연출했다. 이 작품에서 체호프는 그 당시로서는 아주 새롭고 색다른 극형식을 도입했다. 도입부분(Peripetie)도 없고 기승전결의 반전과 클라이맥스로 구성되어 있지 않고 여러 줄거리가 서로 교차하면서 밋밋하게 진행된다. 특별한 주인공도 없고 거의 비중이 엇비슷한 조연들이 여럿 함께 움직인다. 현존하는 사람들과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그리고 있다. 일 년 전에 죽은 아버지가 세 자매에게는 커다란 의미를 주고 있다. 무엇보다 체호프는 20세기 초 거의 혁명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대화기법(Dialog-technique)을 도입했다. 사건의 흐름을 이끌며 주도하는 대화법 대신에 극중인물들은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대회를 하며 길을 잃고 헤맨다. 그래서 많은 독백들이 난무하며 서로 겹치고 서로 어긋난다. 각자 다른 관심을 가지고 다른 곳을 보고 있다. 공간활용도 특이하다. 시선이 한곳에 집중되지 않고 넓게 퍼지며 분산되도록 구성되어 있다.

 

사건의 시간적 흐름도 길게 늘어져있다. 무대는 3년이나 이어진다. 시간의 흐름이 긴장을 고조시키는 역할이 아니라 작품의 중요한 주제 자체가 되고 있다. 시간은 인간이 살아가는 활동공간을 측정하는 도구가 아니라 사건자체, 갈등을 위한 공간이 되고 있다. 모든 변화는 외부에서 인물들 속으로 끼어들어온다. 예를 들어 3막에서 화재가 발생하고 마지막 4막에서는 군부대가 이동함으로서 변화가 크게 일어난다. 체호프의 작품에서는 인물들이 이 세상을 바꾸어나가지 않는다. 이 세상은 이들과는 무관하게 스스로 움직여 나갈 뿐이다,

 

체호프의 드라마에는 극적인 사건변화나 갈등이 보이지 않는다. 대화에는 언어적 힘이 없다, 다시 말해 행위를 이끌어내는 언어로서의 기능을 크게 하지 않는다. 인물들은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를 할 뿐이다. 체호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적인 연극론에서 벗어난다. 등장인물은 이 세상에 영향을 주는 한 인격체로서 등장하지 않는다. 현세를 적극적으로 살아가려는 욕구도 보이지 않는다. 옛날 모스코바에 있었던 과거를 추억하거나 알 수없는 미래에 대한 꿈으로 온통 머리가 가득 차 있다. 체호프는 작품주제에 관해 물어보거나 어느 특별한 장면에 대해 물어보면 작품 속에 다 들어 있다며 답변을 피하곤 했다.

 

자매들은 더 나은 삶을 꿈꾸지만 나태하고 무기력한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교육도 많이 받고 재주도 뛰어난 이들 자매들은 마냥 기다림 속에서 오직 자신들의 신세타령만 늘어놓는다. 이들은 수동적인 방관자에 불과한 것이다. 이는 새로운 세기를 맞이한 러시아 지식인들이 어떤 상태에 처해있었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3막에 일어나는 화재는 도시를 거의 다 태운다. 이는 혁명을 상징하며 이들 신분의 몰락을 의미한다.

 

안톤 체호프는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연출덕분에 세계적인 극작가로 부상했다. 체호프의 작품은 스타니슬라프스키가 이끄는 모스코바 예술극장의 순회공연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체호프의 수용에는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역할이 컸지만 동시에 많은 오해를 불러오기도 했다. 스타니슬라프스키는 체호프의 작품을 감성에 빠진 센티멘털한 드라마로 만들었다. 작중인물들은 과거를 되돌아보며 감상에 젖는다.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세 자매] 공연을 보며 관객들은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한다. 이를 본 체호프는 너무나 속이 상했다.

 

당신이 내 작품을 보고 울었다지요. 당신 혼자도 아닐 테고. 그러라고 내가 그 작품을 쓴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신파조로 만든 것은 스타니슬라프스키입니다. 나의 의도는 아주 다릅니다. 솔직하고 담담하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둘러봐라, 당신들이 얼마나 비참하고 지루하게 살아가는지!

 

스타니슬라프스키는 체호프의 드라마에 들어있는 현대적 감각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희극성과 비극성 사이의, 초현실성과 그로테스크 사이의 틈바구니를 연출자 스타니슬라프스키는 이해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벚꽃동산]을 연출하면서 스타니슬라프스키는 철저하게 그로테스크한 장면을 잘라냈다. 체호프의 드라마는 그러므로 작가의 의도나 현대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연출자의 손에 의해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 체호프는 감상적 연극을 몰아내기 위해 일생동안 무단히도 투쟁했다. 자신의 드라마는 희극내지 아니면 희비극이라고 늘 강조했다. [세 자매]의 낭독모임에 자리를 같이한 체호프는 여러 번 항의했다. 감상적이고 비극적인 작품이 아니라 “나는 밝은 작품을 썼습니다.”

 

연극무대를 성스런 제단으로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이 일어난 당시를 스타니슬라프스키는 가슴 아프게 회상하고 있다. 혁명이 일어나자 극장은 3주 동안 문을 닫았다. 총질이 있었다. 노동자 적위대가 극장 안으로 들어와 승리의 세레머니를 요란하게 벌렸다. 짐승이 자기냄새로 구역을 표시하듯 이들은 극장을 온통 더러운 분비물로 덧칠을 했다. 배우를 성직자로, 극장을 성전으로 신성시하는 스타니슬라프스키에게 이보다 더 큰 치욕은 없었다. 스타니슬라프스키는 친 어머니가 능욕을 당한 듯 한 아픔을 일기장에 적고 있다. 이들이 정령 자신이 기다리던 새로운 관객이란 말인가! 이들을 위해 새로운 연극을 만들어야 한단 말인가! 스타니슬라프스키는 더러움을 자기 손으로 직접 씻어내기 위해 극장 안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모스코바 예술극장장을 지내고 스타니슬라프스키 전집을 출간하는데 총책을 맡았던 Smeliansky에 따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스타니슬라프스키-시스템은 대부분 스탈린 시대에 집필한 것이지만 혁명 이전에 이미 구상된 것들이다. 그 당시의 끔직한 회상들이 글 속에 그대로 남아있다. 스타니슬라프스키는 때로는 양보하고 물러섰지만 극장에 관한 생각만큼은 절대 굴하지 않았다. 배우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브레히트가 동독에서 갖은 고초를 겪으며 양보하고 살아남은 지혜와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만년에 스타니슬라프스키는 러시아 정부와 마찰을 피해 주로 해외순회공연에 몰두했다.

 

스타니슬라프스키는 연극을 신성시하며 그런 성스러움 속에서 연기론을 구성했다면 브레히트는 그 반대로 연극의 세속화속에 자신의 서사극을 심었다. 브레히트에게 무대는 신성한 곳이 아니었다.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보는 실험대였다. 무대는 투쟁하는 싸움터였다. 배우란 브레히트에게 이런 자신의 제안을 관객에게 전달해 주는 매개체역할을 하는 투사였다.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연극에서는 기독교적인 겸손과 온유를 찾아볼 수 있다. 심지어 배우를 성직자로 취급한다.

 

스타니슬라프스키에게 무대는 그리스연극에서처럼 일종의 제단이었다. 한 때 모스코바 예술극장을 이끌었던 스타니슬라프스키의 가장 뛰어난 제자 미하엘 체호프는 스승이 지도하던 스튜디오는 일종의 사교단이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연습실을 “스타니슬라프스키라는 종교를 설파하는 교단”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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