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맥/ 오유경

혈맥
현대적 감각을 입은 생동감 있는 무대표현
사라진 정서의 복원과 재활

 

극단 그룹動·시대 연출 오유경

 

작: 김영수

연출: 윤광진

단체: 국립극단

공연일시: 2016/04/20-05/15

공연장소: 명동예술극장

관극일시: 2016/05/14

 

hyulmac

 

국립극단의 근현대극 재발견 시리즈 중 두 번째 작품 <혈맥>은 해방직후, 청계천 지하 방공호를 배경으로 당시 척박했던 우리네 삶을 극사실주의로 그려낸 작품이다. 본인의 윗세대 혹은 비슷한 세대의 관객들은 직접 경험하거나 어르신들의 많은 경험담과 자료들을 통해 듣고 자라면서 충분히 공감하고 가까이 느끼던 근접 역사이다. 이 세대들은 설사 이 작품을 처음 접한다 할지라도 어쩌면 극의 전개가 어찌 나올지 대강은 예상 할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하게 마음에 새긴 이야기인 것이다. 비슷비슷한 이야기를 너무 차고 넘치게 알아서 어쩌면 이미 식상해졌다 치부해버릴 수도 있는 이런 이야기가 다시 새롭게 느껴지는 것은 그 안에 우리가 사느라 놓쳐버린 결핍된 정서가 가득 담겨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서의 복고! 작품 <혈맥>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복원이 절실한 사라진 정서의 재활을 시도하며 의미 있는 무대를 만들었다.

 

작품 <혈맥>은 현대적 감각을 입은 생동감 있는 무대 표현으로 너무 시간이 많이 지나버린 촌스런 스타일의 옛날이야기라는 우려를 말끔히 씻었다. 이것은 탁월한 감각적인 리듬에서 나오는데 4가지의 무대표현 요소가 훌륭히 맞물렸기 때문이다. 첫째는 끊임없이 변하는 인물의 시각선과 동선을 계획한 연출이며 둘째는 이를 가능하게 하는 무대디자인이다. 셋째는 훌륭한 배우들의 섬세한 인물구현이며 넷째는 절제된 현대적 감각의 음악과 그 사용이다.

 

다양한 인물들의 일상이 그려지는 장면에서 인물들은 각자 바라보는 방향과 시선이 머무르는 위치가 다르며 이 또한 계속 바꿔 행한다. 대표적인 예로 1막 첫 장면에서 어머니는 평상에 앉아 찬송가를 부르고 있다. 깡통영감과 털보영감, 옥매와 원팔, 거북이와 복순이가 들고 나면서 움직일 때마다 어머니는 평상의 4면을 모두 이용하며 자연스럽게 몸이 향하는 방향과 위치를 이동한다. 무겁고 큰 형태의 평상은 주 무대의 가운데 놓였는데, 이것은 자칫하면 연기공간을 대부분 차지하여 인물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가로막고 장면의 리듬이 흐르는 걸 방해하며 정지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인물들은 매우 다양한 목적과 방식으로 평상을 이용하며 관객에게 시시각각 움직이는 생동감 있는 시각적 재미를 선사한다. 또한 많은 다양한 인물들의 동선도 결코 한 자리에 오래 고정적으로 머무르지 않고 수시로 등장하고 퇴장하고, 앉고 서고, 올라가고 내려가며 끊임없이 이동한다. 의도적으로 계획한 이러한 무대 연출은 정서에 몰입하느라 자칫 극 진행을 멈추게 하는 이야기 중심의 극사실주의의 단점을 보완한다. 또한 무대전환 없이 고정된 하나의 무대가 2시간 넘게 지속되며 줄 수 있는 단조로움을 탈피하고, 더불어 움직이던 동선을 멈추고 인물이 정지했을 때 시적인 아름다움과 정서의 깊이를 더해주는 분위기를 창출한다. 센스가 돋보였던 가장 탁월한 연출적 재미는 원작과 달리 설정된 해설자 역할의 배우가 능청스럽게 청진계집으로 순식간에 이야기 속 인물로 변화하여 극 속으로 들어갈 때이다. 드라마가 계속 드라마로 이어질 때 세월의 차이가 느껴지며 과거에 머무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연출의 의도는 극사실주의의 극적 환상을 유지해야한다는 의무조항을 신나게 깨고 이야기 진행에 익숙해져 지루함을 느끼기 시작하는 관객의 예상을 뒤엎어 극적 장치를 노골적으로 드러냄으로써, 현재의 관객과 과거의 이야기가 시간의 거리를 뛰어넘어 서로 조우하며 정서를 나누는 유쾌한 만남의 순간을 마련한다.

 

이러한 다양한 장면의 그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다양한 등·퇴장로와 다층적인 높이의 다양한 연기 공간을 디자인 속에 마련한 탁월한 무대디자인 때문이다. 무대는 주 무대보다 한층 아래인 반공호집, 평상이 놓인 주 무대, 계단으로 올라서는 중간 경사로, 그 경사로에서 한 단계 더 올라서는 가파른 언덕길. 그리고 그 언덕길에는 이 무대의 전체 중심을 잡아주는 비스듬히 스러져가듯 세워진 커다란 상징적인 전봇대가 버티고 있고, 그 너머에는 석양과 새벽의 여명이 물드는 광활한 빈 하늘이 여백을 만들어주고 있다. 이것은 반공호집과 인물들의 생활공간이 극사실적으로 세세히 디테일한 것과 상반되어 효과가 더욱 배가 된다. 수시로 다양한 출구에서 등장하며 서로 겹치지 않는 방향과 위치의 공간에서 인물들이 움직일 수 있도록 유도된 무대는 인물들의 위치와 방향에 따라 미장센이 바뀌면서 마치 관객이 수십 장의 다양한 생활사진을 보는 듯한 시각적 즐거움을 만든다.
무엇보다 탁월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특징과 나이와 직업과 출신고향이 다른 다양한 인물들을 입체적으로 창조하고 표현해낸 배우들의 농익은 연기다. 인물들의 사실적인 사투리연기는 물론 몸의 동작과 인물의 대표되는 몸의 형태(신체적 조각)를 만들어 그들이 서고 앉고 걸어가고 멈춰있을 때 무대디자인의 선과 함께 서로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움을 만든다. 또한 인물의 독특한 성격과 적절한 위트 그리고 중요 장면에서 깊이 있게 표현해내는 감정연기는 극사실주의 작품에서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덕목임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어쩌면 이 모든 것도 작품의 배경에 익숙한 연배가 있는 관객들에게는 향수를 불러오지만 30대와 20대 혹은 10대의 관객들에겐 감각적으로 뒤쳐진 스타일로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를 현명하게 현대의 감각으로 끌어올리게 되는 신의 한 수는, 당시의 시대상을 연상시키는 환경적인 소리는 사용하되 정서가 드러나는 깊이 있는 감정 장면에는 오히려 현대적인 감각의 음악을 사용함으로써 이 작품이 과거를 향한 단순한 복고의 향수를 즐기려는 것이 아닌 현대의 관점에서 과거를 재발견하려 한다는 의도를 분명히 하는데 있다.

 

앞서 서두에서 언급했듯 이 작품은 나이든 세대에게는 매우 낯익은 익숙한 이야기와 정서의 나열이다. 어쩌면 과거의 향수를 돌이켜보는 그리움을 만족 시키는데 그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를 기획한 국립극장의 목적은 이 작품을 처음 접할 새로운 젊은 세대를 겨냥한 듯하다. 그들이 경험하지 못한 절박하고 척박한 생존의 삶과 생존이 끊임없이 불안하고 위태롭던 그 삶 속에서도 가족과 이웃에게 향했던 연민과 측은지심, 갈등 속에서도 서로를 격려하며 희망을 잃지 않았던 당시의 정서의 미덕을 드러내 보여주려 하였던 것은 아닌가. 세월이 아무리 흘러가도 인간이라면 그 삶 속에서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정서를, 과거를 통해 다시 재현하고 복원하고 현대의 삶 속에서 다시 재활시키고자하는 의도는 매우 가치 있는 시도이다. 그리고 그 시도는 매우 적중했던 것 같다. 아..본인은 너무 닳고 닳았던, 정서가 메마른 관객이었다. 작품의 현대적 감각에는 매우 흥분하고 신나게 즐겼지만 인물들의 정서가 주는 감동은 본인에겐 이미 예상된 일이었기에 그다지 가슴이 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 작품을 즐기지 못할 것 같던 젊은 관객들 사이에서 울음과 한숨과 미소가 조용히 터져 나왔다. 이것은 그들의 가슴과 마음이 살아 움직여 인물들과 시간을 넘어 뜻 깊은 만남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진정 이것이 이 작품이 기획된 진정한 목적이라면 그것은 매우 성공적이다. 정서의 복고! 요즘 유명 tv 드라마와 예능의 성공을 통해 유행처럼 번지는 과거의 복고 열풍! 그건 단지 과거의 향수를 즐기는데 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를 넘어 사라진 정서를 복원하는 것, 그 정서를 재활하여 현대가 지닌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복고열풍의 목적이 되어야함을 작품 <혈맥>은 당당히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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