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 객석을 보며 / 오세곤

(제70호 편집인의 글)

비운 객석을 보며

 

손진책 연출의 <햄릿>을 보았다. 출연자 평균 연령이 육십 몇 세라서 화제가 된 그 연극이다. 하지만 원래 그런 건 문제되지 않는 게 연극이다. 관리만 잘 하면 80세까지도 너끈히 무대에 설 수 있다. 물론 때로 에너지가 딸리는 수도 있겠지만 여러 선택 가능한 표현법 중에서 문제가 안 되는 쪽으로 고르면 된다. 마치 타고난 신체 조건을 감안해서 표현 방식을 결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연륜에서 오는 장점은 노쇠로 인한 단점을 능히 보상할 수 있다.

손진책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의 객석을 비워 놓은 채 무대 위에 객석을 세웠다. 무대 형태나 공연 공간 크기로만 보면 구태여 국립에서 할 필요가 없이 남산 드라마센터 정도면 충분하였다. 물론 정확한 극장 선택 과정은 알 수 없다. 그러나 국립극장의 거대한 객석을 비운 이 시도는 분명 여러 각도에서 따져볼 필요가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막이 열리면 거대한 객석이 나타나고 관객들은 놀라거나 감동한다. 우선 그때까지 객석으로 알고 있던 장소가 무대 위였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고, “인생은 연극”이라는 대사의 <햄릿>이 휑하니 텅 빈 객석과 함께 만들어내는 묘한 울림에 감동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과거의 몇몇 예를 들며 상투적이라고도 하고, 경제 원칙에 의거 낭비적이라고도 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실제 연극적으로 별로 성공적이지 못 하였다고 폄하도 할 것이다. 그러나 남들이 했다고 해서 못 할 이유는 없다. 그리고 단 몇 초의 감동을 위해 거대한 산이라도 옮겨 놓는 것이 예술이다. 물론 그런 엄청난 시도조차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더욱이 안타깝게도 성공보다는 실패가 더 많은 것이 예술의 속성이다.

하지만 성공과 실패는 이 글의 논점이 아니다. 중요한 건 그런 시도를 허용했다는 것이다. 1500석을 비워 놓고 무대 위에 옹색한 객석을 만드는 계획을 수용했다. 이건 분명히 의미가 있다. 일반적인 기준으로 그건 분명 낭비고 사치다. 그러나 예술에서는 그런 비효율이 오히려 효율이 될 수 있다. 그 동안 예술에 대한 국가 사회의 태도는 사뭇 일반 경제 원칙의 그것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대단히 획기적인 일이다.

다만 혹시 이런 비효율의 허용이 극히 일부 성공한 예술가에게만 해당되지 않나 하는 의심은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일을 보면서 마치 빈 객석을 위해 예산을 투입하였듯이 실패하는 예술가들을 위해서도 과감하게 지원할 줄 아는 성숙한 국가와 사회가 되기를 희망해 본다.

2016년 8월 1일

‘오늘의 서울연극’ 편집인 오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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