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허구리/ 윤진현

산허구리, 죽음의 땅에서 삶을 생각하다

윤진현

 

작 : 함세덕
각색 : 고선웅
연출 : 고선웅
단체 : 국립극단
공연일시 : 2016/10/07~10/31
평일 19시 30분, 주말 및 공휴일 15시, 화요일 쉼
공연장소 : 백성희장민호극장
관극일시 2016/10/12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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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해야 할 적국

 

일찍이 연암 박지원은 등과한 좋은 문장을 모은 책 소단적치(騷壇赤幟)의 서문(引)에서 글쓰기를 병법에 비유하였다. 글자는 군사이고, 글의 의취는 말하자면 장수이고 제목이란 정복해야 할 적국(敵國)이라는 것이다(字譬則士也 意譬則將也 題目者敵國也). 글의 제목을 멋지게 짓고 싶어 골몰하는 상황을 생각하면 제목이 적국이라는 표현은 더할 나위 없이 절묘하다. 무엇과 대결하고 있는지 확실히 제목으로 밝히는 글이란 명백한 힘과 매력을 지닌다.

 

제목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면 함세덕의 고심은 존경할 만한 것이다. 간결하면서도 명료한 제목을 선호하고 한 번 제목을 정한 후에도 거듭 생각하며 추고하여 수정도 마다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그의 출세작 <동승>의 첫 제목은 ‘도념’이었다. 주인공의 이름이다. 주인공의 이름으로 제목을 정하는 전략은 꽤 효율적이다. 옛사람들은 ‘춘향’이나 ‘심청’이란 이름으로 누구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늘 분명하게 밝혔었다. ‘도념’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도념’보다는 ‘동승’이 확실히 좋다. ‘도념’이 ‘동승’으로 바뀌면서 의취의 보편성이 훨씬 더 강조된다. 성장하는 존재, 경계에 선 인간을 지시하는 ‘동(童)’과 구도하는 존재로서의 ‘승(僧)’이 결합하여 무언가를 기다리고 찾으며 변화하고 발전하는 존재와 그의 갈망을 연상하고 그러한 현대인을 유추하기가 한결 용이해졌다. 분란을 일으키는 존재에서 변혁을 추동하는 존재로 의미전환을 이룩한 바다제비, <해연>이나 비통한 사건과 상황에서 일정한 미적 거리를 유지하는 데 성공한 <무의도 기행> 등 함세덕의 작품제목은 대단히 함축적이다.

 

함세덕의 이러한 초기 작품의 제목을 둘러보면 1936년 조선문학에 발표된 등단작 <산허구리>의 제목은 다소 의외다. <산허구리>는 공간을 지칭하는 제목이다. 말 그대로 산의 중턱, 산의 허리께에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무대는 어촌, 바닷가이다. 바닷가에 웬 산허구리일까?

 

물론 인천, 함세덕이 성장한 화평동은 지형적으로 튀어나온 곶으로 ‘화도’라고 불리웠다. ‘곶’이 꽃의 고어 ‘곶’과 혼동되어 ‘화도(花島)’로 음역되었고 다시 꽃섬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함세덕은 1930년대 후반 인천에서 ‘꽃섬동인회’라는 단체의 일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었다. 서해바다를 경계하기 좋은 군사적 요충지여서 일찍이 진이 설치되어 화도진으로 불리웠으며 이곳에서 미국과 첫번째 조약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기도 했었다. 군영이 설치된 만큼 완만한 구릉 위에 위치하여 전망이 좋았었다. 물론 <산허구리>가 확실히 이곳을 배경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함세덕은 자신이 성장한 인천 개항장 일대를 문학적 본향으로 품고 있었지만 이것이 그대로 재현된 것이 아니라 극적 필요에 따라 유연하게 재구성되었었다.

 

그래도 ‘산의 허구리’라는 제목은 역시 모호했다. 함세덕에 대해 제법 오래 생각했지만 사실 이 모호함은 답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드러난 적이 없었다. 이번 국립극단 고선웅 연출의 <산허구리>를 만나기 전까지는.

 

무덤 같은 초가가 엎드린 공동묘지 같은 산허구리

 

근대는 ‘민족’이라는 범주가 국가와 사회의 중심을 이루는 문명이다. 개별 민족어를 바탕으로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기술하는 민족문학이 발전하였고 이에 기반하여 신화와 혈통 같은 상상의 공동체가 안착하였다. 그러나 식민지는 그 같은 기반의 정립을 제약한다. 국가의 기원, 민족사의 재구성이 승인되지 않는 환경에서 식민지 조선인들은 가문과 혈족을 대체재로 삼았다. 장려한 규모의 가문소설이 바로 그 일부이다.

 

이를 자극한 요소 중 하나가 근대적 위생 관념을 내세워 1912년 조선 총독부가 발포한 ‘묘지규칙’이었다. 사설묘지를 금지하고 공동묘지에만 시신을 매장할 수 있으며 당시까지 한국사회에서는 금지되어 있던 화장을 합법화하였다. 선영을 잘 돌보는 것이 효의 연장이었고 조상, 그러니까 묘의 위치에 따라 가문과 후손의 명운이 결정된다고 믿었던 풍수지리 신앙이 일반적이었던 당대 상식에서는 도저히 수용될 수 없는 법규였다. 나라를 잃은 당대 조선인들에게 조상의 묘지마저 잃는 것은 더욱이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현실을 직시하면 산 사람 삶을 압도하는 죽음의 문제는 끔찍한 것이었다. 하여 염상섭은 <<만세전>>(원제 <<묘지>>)에서 부르짖었다.

 

‘공동묘지다! 공동묘지 속에서 살면서 죽어서 공동묘지에 갈까 봐 애가 말라하는 갸륵한 백성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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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져가는 초가와 파탄에 이른 인물들(사진제공: 국립극단)

 

식민지 조선이 곧 ‘묘지’라는 이 엄중한 현실인식은 깊은 공감을 얻었다. 유치진의 <<토막>>은 그 자체로 산 자가 사는 무덤이라는 인식에서 호출된 공간적 배경이었다. 함세덕은 유치진의 <<토막>>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은 것 같다. 함세덕이 독학으로 연극을 공부하던 무렵, 인천에는 1920년대부터 활동해온 중요한 연극 그룹 ‘칠면구락부’가 있었다. 이 단체는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으나 그 구성원이던 극작가 진우촌, 배우 정암 등은 평생 연극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1939년 함세덕이 극연좌의 일원으로 제1회 동아일보 연극경연대회에 <동승>으로 참가할 때 경쟁 극단이던 ‘낭만좌’에 결합하였다. 함세덕의 현실인식이나 이후의 사상적 행보, 당시 인천의 문화적 지형을 감안할 때, 함세덕은 이들과 비슷한 계통이었다. 그럼에도 지역 선배이며 사상적으로 유사했던 진우촌 등과 함께하기보다 극연좌의 유치진을 선택한 것은 그 만큼 유치진의 영향이 강력했다는 증거이다.

 

무엇보다도 함세덕의 등단작 <산허구리>는 <토막>과 대단히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다. 명서일가와 경선일가의 고통과 몰락을 병렬적으로 안배한 <토막>처럼 <산허구리>는 ‘복조’를 기다리는 노어부 부부와 남편을 잃고 구걸하던 경선의 아내처럼 남편도 집도 잃고 자식을 위해 도둑질을 하는 ‘분어미’의 현실을 병치한다. 장단점도 물론 있다. 아들 명수를 기다리면서 점진적으로 성격이 발전하여 결국 망상으로 성격적 정점을 이루는 명서 처에 비해 노어부의 처는 이미 아들을 연이어 잃고 반쯤 실성한 상태이다. 그럼에도 무너져가는 초가를 단속하라 멀쩡하게 딸을 닦달하다가 갑자기 부엌에서 튀어나와 눈을 흡뜨고 “그날이 오늘이야. 그날이 오늘이야.”라고 부르짖는 것은 그 전사를 충분히 이해하고 본다손쳐도 역시 돌연하다.

 

대신 분어미의 성격은 바로 구걸로 나선 경선 처의 성격보다 훨씬 개연성 있게 발전해간다. 남편 없는 혼잣살림이 버거워 도둑질을 하다가 주인에게 잡혔는데 끌려갔다가 돌아온 경위도 수상쩍거니와 결국은 항구로 가서 ‘사내놈들 틈에 껴서 맷돌에 녹두같이 살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은 젊은 홀머니가 내릴 법한 결단이다.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4)에서 카페 문 앞에 붙은 ‘여급대모집’이란 광고를 보고 일을 찾아 들어온 소복한 아낙네와 겹쳐봄직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래 앓아누워 살아 있어도 조상 같은 명서와는 달리 이미 한 다리를 잃고 하혈로 피가 빙하니 밴 동바지를 입고도 ‘노어부’는 죽음보다 고단한 삶을 견디며 목구멍을 부양하고 있지 않은가. 이들이 거주하는 마을, 산 전체가 통으로 공동묘지이고 무덤이 아닌가. 산소를 닮은 토막처럼 허물어져가는 초가집은 산허리께에 다닥다닥 박혀 있어 마치 산을 뒤덮는 공동묘지, 그것도 제대로 돌보지 않아 허물어져가는 무덤들이 펼쳐진 공동묘지와 그야말로 싱크로율 100% 아닌가.

 

뱃소리인가 상여소리인가

 

하여 죽은 복조가 등장함으로써 역설적이게도 ‘산허구리’가 죽음의 공간임이 명백해진다. 더욱이 복조는 아름다웠다. 자신의 저고리를 메고 혼령이 된 복조는 죽어서도 든든한 상일꾼 모습 그대로였다. 그래서 복조는 암울한 죽음의 현실, 노동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보다 빛나는 저 세상에 더 어울리는 듯하였다. 말하자면 죽음을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기보다 차라리 물 너머 저편의 세계를 자신의 집으로 삼고 당당하게 노래하며 돌아가는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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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조의 당당함은 이 세상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사진제공: 국립극단)

 

본래 뱃노래는 장음계여도 단조 같고 단조여도 장조의 느낌이 난다. 뱃사람들은 유동적인 물 위에서 일하고 널판 너머가 죽음의 공간임을 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복조는 저승으로 가는 배를 띄우며 힘차게 노래를 부르니 일하며 부르는 삶의 노래는 그의 저승길을 인도하는 상두소리이기도 하였다.

 

국립극단 고선웅의 <산허구리>는 놀라운 상상력으로 복조의 떠남을 부연하여 <산허구리>의 내적 의미를 효율적으로 확장하였다. 무엇보다 뱃노래의 선율을 도입하면서 한편으로 그 리얼리티를 더욱 탄탄하게 다지는 효과까지 창출하였다. 예를 들면 ‘노어부의 처’는 인물의 기본적 성격과 어울리지 않는 장황하고 낭만적인 대사를 구사하여 그 성격적 일관성을 훼손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내가 맑은 물 떠놓고 수신께 빌었거던. 이것은 우리 복조 아니야. 내 정성을 봐서라도 이렇게 전신을 파먹히게 안했을 거야. 지금쯤은 너구리섬 동녘에 있는 시퍼런 깊은 물속에. 참 거기는 미역 냄새가 향기롭제. 그리고 백옥같은 모래가 깔렸지. 거기서 팔다리 쭉 뻗고 눈 감었을 거여. 나는 지금 눈에 완연히 보이는 걸. 복조 배 위로 무지개빛 같은 고기가 숙 지나 갔어.

 

미역냄새 향기로운 시퍼런 물속에 백옥같은 모래가 깔려 있고 평화롭게 팔다리 쭉 뻗고 누운 복조와 무지개빛 같은 고기가 헤엄친다는 이 낭만적 이미지는 거칠고 무식한 노어부 처에게 자연스러운 대사는 아닌 듯하다. 그러나 대사에도 보이듯이 이는 노어부의 처가 맑은 물 떠놓고 수신께 빌어올린 내용이다. 기도의 순간,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장면인 것이다. 이 아름다운 대사를 마치 무가를 부르듯 기도하듯 읊조림으로 연기한 것은 득의의 표현이었다. 작품 전편에 뱃노래의 선율을 깔아두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된다.

 

윤첨지 등 몇몇 주변인물의 성격을 밝고 명랑한 톤으로 구성하여 암울한 무대와 주요인물의 상황과 균형을 이루는 전략도 효과적이었다. 사실 연로한 일꾼이라도 젊은 사람 못지않은 뚝심과 속도를 보여주는 일은 흔하다. 노동이 언제나 고통스럽고 암울한 것만은 아니라는 당연한 진실을 잊지 않도록 돕는 효과도 있었다.

 

물론 그럼에도 아쉬움은 있다. 무엇보다 초반의 대사전달이 미흡하였다. 이 때문에 초반의 분위기와 극적 상황의 이해에 제약이 있었다. 아울러 음악과 음향 효과가 상대적으로 취약하다는 인상이었다. 원작에도 분명하지만 이곳은 어촌마을이다. 파도소리와 물소리는 이들의 생활이다. 전반적으로 물소리가 좀더 강조될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막과 함께 들리는 발동기 소리는 사전 정보가 없는 상황의 관객에게는 구분되지 않았을 듯하다. 기적소리 등과 함께 사용하여 확실한 이해포인트가 안배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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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복조의 옷을 물려입은 석이,
석이의 생각은 석이의 삶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인가? (사진제공: 국립극단)

 

때로 말 못하게 절망스러울 때가 있다. 이런 세상을 바란 적은 결코 없었는데 어쩌다 이런 곳을 만들게 된 것인지, 무엇을 잘못한 것인지 반성의 두서조차 차릴 수 없다. 물론 무엇을 바꾸기에 나약하고 허술한 나 자신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여기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지식인으로서 이 땅에 제대로 발 딛고 살아오지 못했다는 증거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확실히 잘못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현실이 저 1930년대 함세덕이 포착했던 것처럼 거대한 산소의 허구리라고 해도 삶을 중단할 수는 없다. 긴긴 밤, 쌀쌀한 날씨 때문에 갯벌 속에서 정강이가 그대로 빳빳하게 얼어 굳어도 조개를 캐고 굴깍지에 베인 상처가 신작로 자갈돌부리에 채어 피가 줄줄 흘러도 걸어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왜 그런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석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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