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놀이/ 정윤희

쌍둥이라는 존재가 그려내는 섬뜩하고 이율배반적인 균형
극단 하땅세 <위대한 놀이>

 

정윤희

 

작 : 아고타 크리스토프 Agota Kristof
연출 : 윤시중
번역 : 박철호
드라마투르그 : 김옥란
단체 : 극단 하땅세
공연일시 : 2016.12.3~29
공연장소 : 두산아트센터 space111
관극일시 : 2016.12.18(일)

 

쌍둥이 역을 맡은 두 배우들은 한 몸같이 움직였고, 또 치열하게 움직였다. 그럼으로써 원작에 등장하는 잔혹한 세상, 전쟁 통에 부모에게서 강제로 분리된 형제가 던져진, 그 폭력적인 세상을 무대 위에 그려냈다. 짐승 같은 욕망과 폭력이 득시글거리는 세상에서 온전히 살아남기 위해 형제가 벌였던 사투를 표현하기 위해서 두 배우는 공연 내내 땀으로 흠뻑 젖도록 뛰고 구르고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하나가 아닌 둘이기에, 그것도 숨소리나 눈빛 교환만으로도 서로를 너무나 잘 이해할 수 있는 쌍둥이이기에 균형이 맞추어졌다. 형제는 자신들의 몸을 자해하며 맞아도 아프지 않을 수 있도록 신체 훈련을 하고, 서로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더 이상 욕을 먹어도 슬프지 않을 수 있도록 훈련하였으며, 며칠간 단식하며 먹지 못해도 살아갈 수 있도록 훈련했다. 그들은 다락방에 처박혀 비밀노트에 한 편의 글을 적고 나서는 서로의 글을 검토해주었고,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언어와 사고를 다듬었다. 이러기를 반복하니 글이 적힌 노트는 몇 권의 분량이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언어 속에서 감정적인 것들과 불확실한 것들은 가능한 모두 제거하고자 했다. 이 과정 속에서 허구의 캐릭터들은 스스로의 존재를 견고히 형성해간다. 쌍둥이는 영민했고 또 강인했다. 처음 마녀 할머니 집에 왔을 때에는 얻어먹지도 못하고 매만 맞는 나약한 존재들이었지만 어느덧 그들은 더 이상 어른들의 폭력에 일방적으로 당하지만은 않았고, 상점 아저씨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려 자신들에게 꼭 필요했던 신발과 노트를 얻기도 하였으며, 스스로 노동을 하고 돈을 벌어서 대가를 치르는가하면, 사랑과 관심이 필요했던 이웃 언청이를 보살피기도 했다. 혼자가 아닌 둘이었기에, 모두들 타인을 모욕하며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가 급급한 지옥 같은 세상에서 강인하게 살아남으면서도, 스스로 정한 원칙과 기준을 지키며 살아가는 아이들로 성장해간다. 물론 모든 이웃들이 모두 다 짐승 같은 면모만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끊임없이 쌍둥이에게 모멸감을 주는 할머니, 이 집에 세 들어 사는 변태성욕자 외국인 장교, 쌍둥이들을 성추행하는 신부의 하녀, 동물과 수간하는 언청이는 분명 본능대로 살아가는 존재들이지만 쌍둥이는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일면 따뜻한 의미들을 건져내기도 한다.
원작 소설은 쌍둥이가 둘이 아닌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으며, 극단 하땅세의 작품 역시 이 뉘앙스를 굳이 깨뜨리지 않았다. 강인하고 영민하다는 말은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타자화 할 수 있다는 말과 다름 아니다. 무대 위에서 형제가 이상하리만치 붙어 다니며 똑같이 행동하듯이, 내면의 자아는 전쟁 같은 삶의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분열되곤 한다. 무대 위에 흰색 테이프를 붙여서 그린 정방형 틀 안에서 두 배우는 그렇게 하나가 되었다가 둘이 되었다가를 반복한다. 실제적인 시각적 장치 없이 읽어 내려가기만 하는 소설 속에서 독자는 등장인물과 밀착하며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지만, 객석과 일정의 거리를 둔 무대 위에서는 내면의 그 섬뜩하고 공허한 공간이 효과적으로 시각화되어 버린다.
결국 대개의 존재들은 이율배반적이었다. 그토록 부드러운 음성으로 쌍둥이들을 어르곤 했던 엄마는 창녀의 이미지와 중첩되고, (연극에서 엄마, 하녀, 언청이는 같은 배우가 연기하기도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엄마는 생부가 누군지도 모르는 여동생을 안고 나타난다. 쌍둥이는 그토록 그립던 엄마가 자기를 따라나서자고 했을 때 그 손을 뿌리치고 할머니 집에 남겠다며 도망 다녔고, 그러면서도 폭격을 맞아 죽은 엄마와 아기의 시체를 다락방에 매달아 고이 간직했다. 병들어 몸을 자유롭게 쓸 수 없게 된 할머니가 간절히 자기를 죽여 달라고 요구했을 때 쌍둥이는 진심으로 할머니의 죽음을 원치 않았지만 결국 그녀의 청을 들어주기로 한다. 그렇게 존재는 유년의 추억, 모성애와 함께 이율배반에도 뿌리를 두고 있었다.
연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쌍둥이는 둘로 갈라진다. 지뢰가 곳곳에 심겨진 지대를 거쳐 국경을 넘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누군가를 앞장세워 가는 길 밖에 없다. 엄마도 죽고 할머니도 죽고 몇 년이 흐른 어느 날, 전쟁 포로로 잡혀있던 아버지가 형제를 찾아왔다. 쌍둥이는 아버지를 앞세워서 국경을 넘기로 한다. 한 배우가 나머지 배우보다 이 일에 보다 적극적이었다. 사실 이 두 배우는 분위기가 매우 달랐고 쌍둥이처럼 닮지도 않았을 뿐더러 공연 내내 이 차이점은 도드라졌었다. 결국 한 명은 아버지의 시체를 밟고 국경을 넘어갔고, 한 명은 그러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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