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과 이론] 트로이의 여인들/ 김향

***이 글은 <<공연과 이론>>  2016년 겨울호에 실렸습니다.

소리하는 배우들의 부각과 교감의 성공 –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

 

김향

 

원작: 에우리피데스(Euripides)·사르트르(Jean Paul Sartre)
연출·컨셉: 옹켕센(Ong Keng Sen)
극본: 배삼식
작창: 안숙선
작곡·음악감독: 정재일
단체: 국립창극단
공연장소: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관극일시: 2016/11/13 3pm., 2016/11/20 3pm.
1. 연출가 옹켕센(Ong Keng Sen)의 창작의식

 

현재 한국사회에 중요한 역사적 흐름이 형성되고 있는 가운데 관객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이 공연되었다. 이 작품을 공연한 국립창극단은 2016년 초반에는 인기 레퍼토리인 <변강쇠 점찍고 옹녀>(고선웅 작·연출, 한승석 작창)와 <배비장전>(이병훈 연출, 안숙선 창작)을 재공연하면서 안정적인 흐름을 보였으나 9월에는 신작 <오르페오전>(이소영 작·연출, 황호준 작곡·음악감독)을 통해 새로운 시도를 했었다. 비록 이 작품은 무대의 화려함에 비해 헛헛한 극적 구조와 음악으로 아쉬움을 남겼지만, <트로이의 여인들>에서는 판소리적 표현의 강화를 통해 관객들에게 새로운 감수성을 경험하게 했다.

 

희곡 <트로이의 여인들>은 그리스 비극작가 중 ‘가장 비극적인 시인’이라 칭해지는 유리피데스(Euripides) 작품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을 비극의 전형으로 이야기하는 가운데, 유리피데스 작품에 대해서는 비극적 정감이 켜켜이 쌓이는 ‘비극들 중에서도 비극적인 작품’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 작품을 창극의 사설로 재창작한 배삼식 작가는 유리피데스 원작과 사르트르(Jean Paul Sartre)의 동명의 희곡을 참고하면서 트로이 여인들의 희망적 태도를 강조하는 면모를 보였다.

 

이 작품을 연출한 싱가폴 연출가 옹켕센은 싱가폴 최대의 영어극단 시어터웍스(Theatre Works)의 연출가로 활동하며 싱가폴 연극의 역사를 만든 인물로, ‘연극을 통한 상호문화주의(interculturalism)’를 추구하는 연출가이다. 1997년 일본에서 <리어>를 공연하고 2000년에는 <데스데모나>를 공연하면서 아시아 전통 공연과 셰익스피어와의 만남을 시도했다. <리어>에서 일본의 노와 중국의 경극을 무대화하면서 문화적 충돌 속에서 정체성을 탐구했는데, 딸들을 남성 배우들이 연기하게 하는 가운데 리어를 남성적 권력의 질서로 보는 등 고정된 이해를 넘어서서 ‘경계영역’의 것들을 창조해내려 했다. 옹켕센의 이러한 창작 의식은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의 컨셉을 구성하는 데도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무속문화와 판소리를 중심으로 미니멀리즘을 추구하고 헬레네를 남성 소리꾼에게 연기하게 하는 것 등에서 엿볼 수 있다.

 

그리고 <트로이의 여인들>은 옹켕센 연출 외에 안숙선 명창이 작창을, 정재일 뮤지션이 음악감독으로 참여하면서 공연 전부터 이목을 끌었고, 실제 공연이 올라갔을 때 음악만큼이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삼십 여 명의 국립창극단 단원들 중 여성단원 열한 명과 남성단원 네 명 만이 출연한다는 사실이었다. 이들이 여성 소리꾼이기에 주목받았던 것이 아니라 극작, 연출, 음악적인 측면에서 무대 배우들의 소리연기를 중시하는 면모를 보임으로써 옹켕센의 이전 작품들과 국립창극단의 전작들에 비해서도 소리꾼 배우들에 집중하게 되는 공연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2. 동시대 문제의식에 호응하는 재창작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은 관객들이 객석에 착석하기 시작할 때부터 무대 중앙에 헤큐바가 엎드려 누워 있고 여덟 명의 코러스들(정미정, 나윤영, 김미진, 허애선, 서정금, 이연주, 민은경, 조유아 분)이 ‘인간의 운명’으로 상징되는 빨간 실뭉치를 들고 여러 가지 동작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관객들이 ‘이미 공연을 시작한 것일까’ 의문을 갖게 만드는, 공연 시작 전과 후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설정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원작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 포세이돈과 아테나를 삭제하고 ‘고혼’(안숙선, 유태평양 분)을 등장시켜 한국 문화에서의 무속신앙의 형태를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 그리스의 노예가 된 트로이의 여인들을 부각시킨다. 코러스들의 느리면서도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움직임을 통해 <트로이의 여인들>에 대한 해석을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이동했음을 드러낸다.

 

작가 배삼식은 희곡 원작에 충실한 듯하면서도 번역희곡의 불완전한 문장들을 한국 관객들이 알아듣기 쉽게 새로 썼다. 창극대본은 소리를 얹어야 하기에 판소리 사설에서와 같은 운율과 리듬을 가져야 하는데, 배삼식 작가는 이 과정에서 희곡을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로 재창작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재창작 과정에서 각 등장인물들의 특징이 선명히 드러났고 그 특징들이 시·청각적으로 심화되었으며 갈등 관계에서도 변화가 있다. 그리고 결말부분에서 헤큐바의 태도에 큰 변화가 있으며 원작에서의 헤큐바의 허무주의적 태도는 작품을 열고 닫는 역할을 하는 ‘고혼’에 의해 강조되는 듯하다. ‘고혼’은 새롭게 창작 삽입된 인물로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영적인 것으로 형상화된다고 볼 수 있다.

 

원작에서의 헤큐바는 깊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지닌 면모를 보이고 있지만 극이 흐르는 가운데 자식들을 모두 잃고 허무주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에 비해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에서는 헤큐바(김금미 분)가 결말 부분에서 “버티어 서라!”고 외치듯 노래하면서 삶에의 강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헤큐바는 절망 속에서 자신의 몸을 일으키려 애쓰는 모습으로 관객을 대한다. 헤큐바가 노래는 진양조의 계면조로 반주악기는 거문고였다. 무거우면서도 강한 울림으로 헤카베의 ‘삶에의 의지’를 뒷받침한다. 그리고 헤큐바가 노래로 드러내는 고통이 무대 전면에 투영되는 ‘흐르는 물’의 이미지로도 구현된다.

 

헤큐바의 딸이자 예지 능력이 있는 카산드라(이소연 분)는 창극에서 무녀로 등장한다. 그녀는 아폴론에게 버려지고 그녀의 예언을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저주를 받아 ‘제정신이 아닌 인물’로 취급받는 깊은 슬픔을 간직하고 있다. 예지 능력으로 인해 자신이 아가멤논과 함께 그리스에 입성하여 도끼로 살해당한다는 미래를 알고 있지만 동시에 인간들이 자신의 예언을 알아듣지 못하고 미친 사람 취급당한다는 것까지도 알고 있기에 그 슬픔이 깊다. 그녀는 대금 반주로 노래하는데 기본적으로 계면조이지만 너무 느리지 않은 중모리에 우조로 노래를 시작하는 듯하다. 그러나 깊은 슬픔을 표출하는 대목에서 진양조로 느려지다가 “가자~”라는 대목에서 장단이 점점 빨라지면서 계면조에서 우조로 변모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송순섭 명창에게서 들을 수 있는 굵고 우렁찬 발성을 물려받은 듯 이소연 소리꾼은 카산드라 연기에서 불행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며 의연히 맞서는 태도를 보인다. 시각적으로도 불을 내뿜는 이미지로 형상화되면서 강렬한 무녀 이미지가 구현된다.
안드로마케(김지숙 분)는 헤큐바나 카산드라에 비해 ‘원한’의 감정이 강화되어 있다. 트로이가 망하는데 헤큐바의 잘못이 크다고 여기며 그녀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드러낸다. 특히 트로이의 용사 헥토르의 아내였던 자신이 아킬레우스의 아들과 결혼해야 한다는 것에 고통스러워하는데, 헤큐바가 그래도 살아남아야 한다고하자 분통을 터뜨린다. 그러나 진계면조에 분노의 감정을 표출하던 안드로마케에게 더 깊은 절망이 다가온다. 그녀의 아들 아스티아낙스를 빼앗기고 그 아기가 죽임을 당하는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기와 이별하는 장면에서의 안드로마케는 ‘원한’의 감정을 넘어서 분노마저 잃은 듯한 깊은 슬픔과 절망을 내보인다. 그녀가 시어머니 헤큐바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드러내고 원한을 내보일 때에 시각적인 이미지가 푸른 구름이라는 것이 이색적이었다. 그리고 푸른 구름이 점차 먹구름으로 변화되며 그녀 내면의 변화를 드러낸다.
이처럼 트로이 여인들의 한스러움이 표출되는 상황에서 메넬라우스와 헬레네의 등장으로 흥미로운 갈등이 전개된다. 메넬라우스(최호성 분)는 대취타와 함께 등장하는데 빨간 장갑을 낀 듯 양손을 피로 물들이고 등장한다. 트로이의 파리스 왕자와 함께 도망간 아내 헬레네 때문에 전쟁을 일으킨 메넬라우스는, 원작에서는 명분을 내세우며 미련을 드러내고 있지만 창극에서는 직접적으로 헬레네에 대한 애증을 드러내는 것으로 변형되어 있다. 양손에 피를 묻힌 채 거칠게 등장하는 메넬라우스는 헬레네를 응징하겠다는 의지를 강력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창극에서의 메넬라우스는 헬레네에 대한 미련을 과잉된 애증의 감정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메넬라오스는 피 묻은 손으로 격앙되어 등장하여 전라남도 방언으로 노래하기 시작하는데, 이러한 설정을 통해 이완적인 효과를 노렸을 수도 있으나 실제 공연에서는 여전히 엄숙한 분위기가 가시지는 않았으며 다만 이질적인 감수성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헬레네는 그랜드피아노를 치는 (죽은) 파리스(정재일 분)를 뒤에서 안은 채 등장한다.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에서는 원작에 등장하지 않는 파리스가 피아노를 치는 정재일의 연기로 형상화 되며 헬레네는 여성 소리꾼이 아닌 김준수 소리꾼이 연기했다. 배역의 성(性)을 바꾸어 연출하는 것은 옹캥센의 이전 작품들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인데, 이 작품에서는 남녀 경계 영역을 해체하기 위해서였다기보다는 ‘인류 최대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제우스의 딸 헬레네의 아름다움에 대해 기호적인 상상력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여성의 미(美)에 대해서는 문화권에 따라 시·공간에 따라 각기 다른 관점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기에, 특정한 여성을 설정할 경우 헬레네의 아름다움이 특정한 것으로 규정지어질 수 있을 것이다. 옹켕센은 이처럼 규정지어지는 아름다움을 넘어서서 헬레네의 아름다움을 상상의 영역으로 설정했다고 할 수 있겠다. 헬레네를 맡은 김준수는 특별히 여성처럼 노래하려 하기보다 자신을 죽이려는 메넬라우스의 마음을 움직여 사랑을 회복하고 살아남고자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여성처럼 매혹적이려 했다기보다 인간적으로 다시 사랑을 얻기 위해 정성을 다해 노래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부드럽게 그러나 점차 억울한 정서와 애원의 감정을 동원해 메넬라우스의 품에 안기고 살아남는 모습을 보인다. 헤큐바와 코러스들과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끝내 메넬라우스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또다시 욕망에 불을 지펴 살아남게 되는 것이다. 메넬라우스가 점차 헬레네의 노래 흐름 속에서 변화되는 모습은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에서 흥미로운 장면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3. 몇 가지 문제의식 그러나 관객과의 교감에 성공한 이유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에서는 이전 작품들과 달리 각 인물들이 자신들의 내적 정서를 충분히 소리로 표현하면서 관객과의 정서 교감을 시도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는 작품이었다. 이야기나 시각적인 표현 또는 반주음악이 배우들의 소리 연기를 침해하지 않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한 작품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단한 관극평들을 보면 각 인물들에 따라 달라지는 영상 이미지와 무대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파빌리온 그리고 배우들의 의상에 대해 분분한 의견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영상이 흰색 의상을 입은 배우들 전체에 투영되면서 배우들을 가려버린 것으로 인식되기도 했고 달오름극장에서는 부피가 크게 여겨지는 파빌리온이 시종일관 같은 위치에 놓여 활용도가 떨어진다고 여겨지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의상이 트로이의 여인들은 흰색, 그리스인들은 회색으로 처리되어 이분법적으로 설정한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었다. 옹켕센 연출이 오히려 이분법적인 ‘구별’과 거리를 두고 경계 영역의 감수성을 중시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면 시각적인 형상화가 다소 도식적인 것으로 오해될 소지도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여러 시각적인 ‘불편함’이 옹켕센이 의도한 것이었다면 성공한 것이라 할 수도 있겠다.

 

이외에 음악적인 측면에서 비극이라는 원작의 특성으로 인해 작품 전체에 시종일관 계면조가 흘렀다고 여기는 관객들도 있고 서구음악처럼 화음 없이 단일음으로 합창하는 것을 멋없게 느끼는 관객들도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들어 보면 각 배우들의 장단과 악조(성조)는 대목에 따라 변화하고 있으며 코러스들의 노래 중에 이어부르기를 합창과 연결한 부분이 있고 또 특정 관객은 합창에서 오히려 웅장한 판소리적 감수성을 경험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그리고 시종일관 계면조가 흐른 것이라기보다는 두드러지게 해학적이고 재담적인 면모가 구현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배우들의 등·퇴장이 지나치게 객석 쪽에 국한된 것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게 된다. 탈튀뷔오스는 관객석에서 등장해 관객석으로 퇴장하며 카산드라, 안드로마케 그리고 헬레네는 무대에서 등장해 모두 객석 쪽으로 퇴장하는 설정이 의아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충분히 이러한 설정이 가능하지만, 이를 판소리적인 ‘개방성’으로 여기고 설정한 것이라면 그 개념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이해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이 문제는 옹켕센의 이 한 작품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기에 이후 그가 또 다시 창극을 연출한다면 또 다시 논의하고 싶은 문제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문제의식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은 2016시즌 국립창극단 작품들 중 각 분과의 아티스트들이 자신들의 장끼를 자제하고 소리하는 배우들을 전면에 부각시키면서 오롯이 ‘소리 연기’를 돋보이게 하는데 성공한 작품이었다고 여겨진다. 판소리적 미니멀리즘 때문이었다기보다는 옹켕센을 비롯한 제작진이 판소리를 존중하는 태도로 서구희곡 <트로이의 여인들>이 동시대 한국 관객들과 만날 수 있는 지점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 트로이는 / 그리스 전체에 맞서 버티었다! / 십 년 동안이나 명예롭게 싸웠다. / 우릴 무너뜨린 건 교활한 음모와 잔꾀. / 우린 죽지만 죽지 않는다. / 다가올 수천 년 동안 / 사람들은 오래도록 이야기하리라. / 우리의 용기를! / 이제 내가 너희를 심판하리라. / 머지않아, 너희 불멸의 신들은 / 죽게 되리라. 우리처럼!”

 

헤큐바를 연기하는 김금미는 거의 시종일관 무대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기에 결말 부분에서 지칠법하지만 죽은 손자의 시체를 건네받고는 파빌리온에 올라 온 힘을 다해 인용문의 노래를 한다. 헤큐바는 자신들을 이러한 비극으로 이끈 신들을 향해 맞서 싸우자고 노래하지만 그 순간 ‘신들’은 그리스신이 아니라 그동안 관객들 안에 또는 사회 속에 자리 잡고 있던 ‘권력을 향한 고정 관념, 차별, 비민주적인 신화’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는 울림으로 경험된다. 이 순간 경험되는 숭고함은 동시대 우리 삶에서 필요한 용기 그리고 승리의 감수성으로 경험되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국립창극단은 2016시즌 마지막 작품 <트로이의 여인들>에서는 관객과의 교감에 성공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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