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평론] 홍보씨/ 김향

*** 이 글은『연극평론』 2017 여름호에 게재된 원고입니다.

오두방정, 오묘한 ‘흥보씨’의 아쉬움 – 창극 <흥보씨>

김향(연극평론가)

각색·연출: 고선웅

작창: 이자람

단체: 국립창극단

공연일시: 2017/04/05-04/16

공연장소: 국립극장 달오름

관극일시: 2017/04/14

                                                                 

고선웅의 신작 <흥보씨>(고선웅 극본·연출, 작창·작곡 이자람, 국립국장 달오름, 2017.4.5.~4.16.)가 공연되어 관객들에게 한껏 웃음을 선사했다. 그의 전작 <변강쇠 점 찍고 옹녀>(2014년 6월 초연)는 국내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은 후 2016년 프랑스에 초청 공연되어 한국 창극의 국제화에도 기여했다. 고선웅 연출은 판소리에 관심이 많았고 뮤지컬, 오페라 등도 연출한 이력이 있지만, 창극 장르에 대한 이해가 그리 깊다고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단 두 작품으로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놀라운 재주를 부렸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작품은 각각 판소리 5바탕과 실창판소리를 토대로 하는 것으로 완전한 창작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원작과 확연히 다른 극적 흐름과 연출 그리고 주제의식을 구현한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재창작은 식상하게 여겨질 수 있는 전통 서사에 새로움을 부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의 재창작과 연출은 논란의 소지를 안고 있다. 그 ‘새로움’이 창극 장르의 지평을 넓히면서 고유성을 창출했다기보다 오히려 창극 장르에 대한 혼란스러움을 가중시켰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눈대목’과 새로운 이야기의 결합

<흥보씨>의 구조는 <흥보가>의 눈대목을 중심으로 하면서 기왕의 한국 민속 음악들을 활용하고 새롭게 창작된 대목에서는 새로운 음악을 창작 삽입한 것이었다. ‘심술 많은 놀보가 착한 흥보를 쫓아내는 패악을 저지르지만 흥보는 끝내 놀보와의 우애를 지키려 한다’는 기본 틀은 유지하면서 그 과정의 서사를 대폭 재창작했다고 할 수 있다. 완전한 주크박스 형태의 구성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흥보가>의 눈대목을 중심으로 원작의 ‘소리대목’과는 매우 다른 극행동을 만들어내는 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원작 <흥보가>는 구체적인 전사(前史) 없이 어느날 놀보가 흥보를 불러 놓고 자식들을 데리고 나가라고 하면서 사건이 전개되는 것이다. 졸지에 열 명도 넘는 자식들과 더불어 쫓겨난 흥보는 당장 먹을거리가 없기에 매품을 팔려 하는 등 갖은 방법을 동원하며 아사(餓死)를 면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매품을 파는 것도 좌절되고 할 수 없이 다시 놀보를 찾아가지만 놀보뿐만 아니라 형수에게까지 얻어맞고 집으로 돌아온다. 흥보네는 서러움과 배고픔에 죽을 생각까지 하게 되는데 이때 승려가 나타나 집터 하나를 알려주고 사라진다. 흥보네는 그 집터로 초가집을 뜯어 이사하고 그 집 처마에 둥지를 튼 제비 새끼를 구해주는 선행을 베푼다. 흥보에게 은혜를 입은 제비는 겨울이 되기 전 남쪽으로 떠났다가 이듬해 봄에 흥보네로 돌아와서는 박씨 하나를 던져준다. 여전히 배고픔에 시달리던 흥보는 그 박씨를 심어 양식을 마련코자 하고 박씨를 심은 지 몇 일만에 박이 주렁주렁 열린다. 흥보는 박속을 긁어 먹을 요량으로 박을 타는데 첫 번째 박에서는 쌀과 돈이 나오고 두 번째 박에서는 비단이 나왔으며 세 번째 박에서는 여러 장성들이 나와 흥보네 집터에 궁궐 같은 집을 지어준다. 대번에 부자가 된 흥보네 이야기를 소문으로 전해들은 놀보가 흥보를 찾아온다. 제비를 구해주고 받은 박씨로 부자가 되었다는 흥보 말을 들은 놀보는 집으로 돌아와 제비를 기다린다. 그런데 집에 날아든 제비에게서 부화된 새끼제비에게 아무 위협이 없자, 놀보는 새끼제비의 생다리를 부러뜨린 뒤 그 다리를 고쳐주는 폭력을 행사하게 되고 그 제비는 이듬해 놀보에게 ‘보은’이 아닌 ‘복수’의 박씨를 던져준다. 물질적 욕망에 가득 찬 놀보는 그 박씨를 심게 되고 그 박씨에서 열매 맺은 박들을 타자 놀보의 재산을 탕진시키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네 번째 박에서는 놀보의 심술을 응징하려는 장비가 등장하면서 놀보가 죽을 위기에 처한다. 이때 흥보가 등장하여 장비를 감동시키는 형제애를 보이고 놀보 역시 흥보에게 감화감동하여 개과천선하게 되면서 이야기가 끝이 난다.

창극 <흥보씨>에서는 동편제 <흥보가>의 눈대목 중에서 ‘놀보심술’, ‘흥보 애원’, ‘흥보 매맞는 대목’, ‘중타령’, ‘제비 노정기’, ‘가난 타령’, ‘박타령’, ‘비단타령’ 등을 차용하고 ‘상여소리’, ‘농부가’ 등을 삽입하면서 극의 흐름에 따라 편곡을 하거나 개사 또는 새로운 ‘소리’를 창작 삽입하였다. 그 과정에서 원작에 없는 부모이야기를 만들고 ‘흥보처’, ‘자식들’, ‘제비’와 ‘승려’를 새롭게 설정하면서 곁가지 이야기들로 서사가 한층 복잡해진다. 이로 인해 판소리 <흥보가>의 ‘눈대목’을 향유하게 되기보다 이야기 흐름에 집중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놀보와 흥보의 태생’, ‘흥보처의 과거’, ‘자식들’, ‘제비’와 ‘승려’에 대한 새로운 설정은 원작의 느슨한 이야기 구성에 논리성을 부여한 듯하면서도 동시에 공감할 수 없는 비약적인 설정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막이 열리면 ‘흥보’와 ‘놀보’가 아닌 ‘연생원’(김학용 분)과 ‘황씨부인’(김차경 분)이 먼저 등장한다. 이 부부는 불임인 상황인데, ‘연생원’이 우연히 찔레나무 아래 버려진 아기를 데려오고 황씨가 외간남자와 관계하여 사생아를 낳으면서 각각 ‘흥보’(김준수 분)와 ‘놀보’(최호성 분)라는 아들들이 만들어진다. ‘연생원’은 자신의 피가 전혀 섞이지 않은 두 아기를 아들 삼았는데, ‘흥보’가 먼저 발견되었기에 ‘흥보’를 형으로, ‘놀보’를 아우로 했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착한 ‘흥보’가 ‘놀보’의 투정을 받아주기 위해 형 자리를 바꾸어주면서 시작된다. ‘놀보’는 ‘흥보’의 지장(指章)까지 받아 형 행세를 하게 된 것이다. 이때 아버지 ‘연생원’이 형제의 서열이 바뀐 것을 모르는 상황에서 모든 재산을 형에게 남긴다는 유언을 한 채 죽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흥보’가 데려온 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놀보’는 이를 빌미로 ‘흥보’를 내쫓는다. 이 대목 바로 전에 아버지의 삼년상을 치르고 산에서 내려오던 ‘흥보’는 아이를 낳지 못해 소박 맞은 ‘정씨’(이소연 분)를 위기에서 구해주고 또 굶어 죽어가는 거지 아이들(이영태, 남해웅, 김금미, 김형철, 이광원, 박성우, 강태관, 김유경, 이연주 분)을 거두게 되면서 졸지에 남편이자 아버지가 된다. 이 설정은 원작과 달리 ‘흥보’의 선한 성격이 구체적인 사건으로 구현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정씨’가 호랑이(우지용 분)에게 잡아먹힐 상황이 된다든지 아홉 명의 거지들이 한순간 ‘흥보’와 ‘정씨’를 아버지, 어머니로 여기게 되는 과정은 지나친 비약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흥보씨>에서는 ‘승려’를 ‘외계인’으로 설정하고 ‘제비’를 날짐승이 아닌 돈 많은 유부녀들을 상대하는 춤꾼의 시쳇말인 ‘제비’로 설정하면서 원작의 우화적인 설정을 가상적이면서도 세속적인 인물들로 재창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설정은 희화화된 것이라기보다 이 작품의 주제 의식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우주인 승려’(조유아 분)가 부르는 소리 대목에서 ‘(욕망을) 비워야 한다’는 주제의식을 강조하고 있으며 ‘제비’(유태평양)가 주고 간 박씨에서 열매 맺은 박은 영적인 양식을 뜻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박을 탄 흥보네가 잠시의 침묵 뒤 기독교의 복음성가인 ‘내게 강 같은 평화’를 부르며 육적인 욕망을 넘어서 영적인 양식을 얻었다는 모습을 형상화하는 장면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그 가벼운 설정에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원작과 달리 ‘물적인 욕망을 비우고 영적인 양식을 추구하라’는 주제의식을 드러내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원작의 ‘흥보’가 물질적인 부자가 되었다면 <흥보씨>의 ‘흥보’는 물질에 대한 욕망을 넘어서 영적인 충만함을 얻은 인물로 형상화되면서 원작을 비트는 면모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결말에서는 ‘놀보’를 단죄하는 장비 대신 ‘원님’(이광복 분)을 등장시키고 ‘놀보’가 ‘흥보’에 의해 구원받는 것이 아닌 물욕으로 인해 스스로 파국을 맞는 것으로 설정하였다. ‘형제우애’와 ‘권선징악’이라는 원작의 주제의식을 <흥보씨>에서는 ‘범우주적 인간애의 실현’과 ‘물질적 욕망에 대한 비판’이라는 주제의식으로 경험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마당쇠’(최용석 분)가 등장하여 흥보처럼 착하게 사는 것을 강조하며 ‘더질더질’ 막을 내리는 장면에서는 1982년 허규가 연출했던 창극 <흥보전>을 떠올리게 했다. 허규는 판소리 <흥보가>의 비현실적인 설정과 고답적인 주제의식을 새롭게 인식하게 하기 위해 이전까지의 창극과 다르게 ‘마당쇠’라는 인물을 강화하고 그에게 해설자적인 성격을 부여하였다. ‘마당쇠’를 통해, <흥보가>가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아니며 관객들이 ‘선하게 사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 깨달았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하였고 이러한 설정으로 인해 이전 창극들과 다르게 창극의 ‘연극성’이 강화된 것으로 논의되었다. 고선웅 연출은 ‘선함’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허규 연출의 주제의식과 괘를 같이 하면서도 ‘물적 욕망과 거리를 둔 흥보’를 형상화함으로써 ‘새로운 주제의식’을 창출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허규 연출의 <흥보가>와 달리 판소리 <흥보가>의 ‘소리 대목’을 음미할 수 있는 여백을 사건으로 채워 넣으면서, 관객들이 다변하는 이야기의 흐름만을 따라가야 했던 점은 고선웅 극작술의 문제라 여겨진다. 그의 재기발랄하고 다채로운 설정들로 인해 오히려 음악극으로서의 창극 장르의 특징이 구현되지 못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다채로운 곁가지를 만들면서 역동적인 극적 행위를 추구하는 고선웅의 극작술은 <조씨고아> 등 연극 장르에서는 빛을 발하지만 창극에서는 비약적인 이야기들과 음악적 정서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때론 음악이 후경화되면서 웃음은 넘치지만 ‘심금을 울리는 음악’적 체험은 약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창극계 ‘아이돌’들의 활약

고선웅 연출은 특히 배우들의 ‘놀이 같은’ 역동성을 강조하기에 <흥보씨>의 젊은 소리꾼 배우들은 무대 위에서 시종일관 움직였다. 이 작품은 유독 ‘소리 연기’보다 움직임이 강조된 작품이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창극단 배우들이 움직이기를 싫어한다는 말은 옛말이 되었으며 고단할지라도 최선을 다해 움직여야 한다는 배우들의 의중이 무대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번 공연에서는 오랜만에 국립창극단 명예단원인 윤충일 소리꾼이 특별 출연 하여 그의 장기인 품바타령을 부르며 ‘흥보’와 ‘정씨’를 맺어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 소리꾼이 유독 눈에 띈 것은 국립창극단의 소리꾼 배우들의 연령이 대폭 어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20여년 이상 소리를 연마하였으나 어릴 적부터 소리를 했기에 그들의 연령은 30살 전후라 할 수 있다. 이전 작품인 <트로이의 여인들>에서는 여성 소리꾼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면, 이번 공연에서는 젊은 세대, 중견 세대가 골고루 참여하는 공연이 되었으며 특별히 젊은 남성 소리꾼들의 연기가 돋보인다. ‘흥보’와 ‘놀보’를 맡은 김준수와 최호성, ‘마당쇠’를 맡은 최용석, ‘제비’를 맡은 유태평양, ‘원님’을 맡은 이광복 소리꾼들이다. 이들은 이미 청소년기를 거친 지 오래지만 창극계에서는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아이돌’들이라 할 수 있다.

김준수와 최호성의 여유 있는 연기와 더불어 특히 돋보이는 소리꾼은 ‘제비’를 연기한 유태평양이다. ‘오르페우스’에서는 다소 경직된 모습을 보였다면, <흥보씨>에서는 ‘제비’ 역할을 능숙하게 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움직임에서부터 소리까지 무대에서 자유자재로 노는 연기력을 펼쳤다고 할 수 있다. <미녀와 야수>에서 ‘동경이’ 역할을 하면서 관객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최용석은 영리한 ‘마당쇠’를 맡아 ‘흥보’를 도와주고 ‘놀보’의 비행을 드러내는 감초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남성 소리꾼 외에 ‘외계인’ 조유아의 연기 역시 눈에 띈다. 중성적인 매력을 풍기며 스텝을 강조한 춤을 추고 ‘흥보’와의 소통을 추구하며 “비워야 하리~”라는 주제의식을 전하는 연기는 <흥보씨>를 두 차례 관람하는 중에 그 등장이 기다려지는 인물이기도 했다. 창극 <흥보씨>에서는 중견 배우들이 젊은 ‘흥보’의 자식들로 등장하면서 역표본 캐스팅의 재미를 선사하기도 했다. 이영태, 남해웅, 김금미, 김형철, 이광원 등의 소리꾼들이 ‘흥보’의 아들 딸이 되는 과정이 억지스럽게 여겨지고 조연들의 출중한 소리 실력이 발휘되지 못하는 것이 아쉽기는 했으나, 이들이 곧 사회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이라는 기호로 읽히는 의의가 있었다.

진지한 오두방정의 한계

창극 <흥보씨>의 “비우자”는 메시지는 원작의 흥보가 그 선함으로 인해 물질적 보상을 받았다는 이야기에 전면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흥보가 받는 보상은 물질이 아닌 ‘욕망으로부터의 해탈’이라고 설정했던 것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이 이러한 주제의식만을 놓고 본다면 창극 <흥보씨>는 꽤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문제는 이러한 주제의식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과도한 이야기의 과잉으로 역시나 과도했던 음악의 정서와 충돌하고 때론 음악이 후경화 되는 면모를 드러냈다는 점에 있다.

고선웅의 창극적 상상력은 분명 창극 장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불러일으켰지만 창극 장르의 고유성을 만들어내는 데에 기여했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다변하는 이야기 전개는 창극 장르로 구현되기에는 한계가 있는 상상력이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관객들은 끊임없이 웃을 수 있지만 음악극적 감응을 통한 것이었다고 볼 수는 없겠다. 음악 때문에 웃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극적 설정과 배우들의 익살스런 움직임으로 인해 웃게 되기 때문이다. 자유자재로 비약적으로 연결되는 이야기 흐름 이면의 심오함을 경험하기 이전에 그 비약의 ‘발상’에 의문을 갖게 되기도 한다. 풍자인 듯하면서도 풍자 아닌 진지함에 잠시 판단을 유보하고 배우들의 열연에 웃음 짓는 것일 수도 있겠다.

고선웅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경험되는 ‘깊은 인간애’가 연극 <조씨고아> 같은 작품에서는 울고 웃는 가운데 감동적으로 경험된다면 창극 <흥보씨>에서는 ‘진지한 오두방정’에 그치는 것이 아쉽다.

김향 (연극평론가)

성결대 파이데이아학부 조교수, 연세대 공연예술연구소 전문연구원. 희곡/공연의 실제와 창극의 이론적 체계화 그리고 문화콘텐츠를 인문학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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