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과 리뷰]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백승무

*이 평문은 공연과 리뷰(2017, 여름호)에 게재된 글을 재수록한 것입니다.

 

연극예술의 조건

 

백승무(공이모 회장)

 

“나는 오래전부터 도스토예프스키를 되풀이 읽어왔다.

그때마다 나는 그에게 들리곤 했다.

그러는 그 자체가 나에게는 하나의 과제였고 화두였다.”

– 김춘수, <들림, 도스토예프스키> 중

 

 

 

들림의 무대, 무대의 들림

‘마돈나의 이상과 소돔의 추악함’(드미트리)이라는 공존할 수 없는 두 극단의 진폭, 그 진폭을 오가는 롤러코스터의 현기증이 김춘수의 ‘들림’이다. 탐욕이든 방탕이든 앞뒤 가리지 않고 맹목적으로 빠지는 열정적 기질, 그러면서도 아이 같은 순진함과 풋풋한 낭만성을 지닌 인물. 선과 악을 한 몸에 포용하면서도 선도, 악도 아닌, 혹은 선이면서 악인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인물. 도스토옙스키의 주인공들은 그런 현기증 나는 인물들이고, 그들의, 혹은 그들 간의 낙차와 변화가 들림 현상이다. 문제는 이 형이상학적 현기증을 어떻게 무대화할 것인가, 이 들림의 텍스트를 어떻게 무대 위에 활물화할 것인가이다.

 

 

몸말 미장센

무대예술은 텍스트의 사상을 연출의 형식으로 번역하는 장르이다. 이처럼 고전으로 평가받는 소설을 무대로 호출하는 경우, 문학텍스트를 무대 언어에 맞게 등가적으로 번역하는 것이 연출술의 핵심인바, 문자언어로 구성된 원작의 권위와 평판을 어떤 문법체계 속에 재편시킬 것인가가 관건이 된다. 나진환 연출은 전작 <악령>과 <죄와 벌>에서도 “서사를 제압하는 이미지의 구축, 말을 소리로 수축시키고 몸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종합적 언어구사력, 원근법적 스펙터클과 회화적 심미성을 강조하는 미장센”(졸저, 한국연극, 깊이)을 통해 음성언어와 경쟁하는 신체언어, 그리고 서사의 선형적 진행과 대결하는 미장센의 공간적 구성을 선보인 바 있다. 원작 텍스트의 육중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 신체의 조형성과 미장센의 발화능력을 적극 활용하는 전법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도 이러한 문법에서 멀지 않다.

 

 

소설의 연극화

공연과 관련한 논란은 엉뚱한 곳에서 튀어나왔다. 원작의 대사를 그대로 따올 거라면 굳이 원작소설을 극장에서 봐야하는 이유는 무엇이냐는 질문과 7시간이란 관극조건이 득보다 실이 우세한 오판이라는 주장이다. 전자의 경우, ‘문예연극’(고전명작을 무대화하는 연극장르)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치부할 수 있다. 문예연극은 소설과 경쟁하던 연극이 주도권 확보를 위해 소설문법을 자기화한 경우로서, 20세기 연극사의 주요 현상 중 하나이다. 하지만 소설의 연극화 역사도 짧고 성공사례도 많지 않다보니 문예연극의 매력과 장점에 대해 낯선 것이 사실이다.

두 번째 불평은 좀 더 심각한 경우인데, 국내 최장공연 기록이 탐난 게 아니라면 굳이 힘든 관극조건을 조성하여 공연에 대한 거부감을 증폭시킬 필요가 있냐는 것이다. 원작의 의미와 가치를 살리되 관습적인 상연시간을 준수하라는 것. 결국 공연이 7시간의 투자에 비해 충분한 만족감을 제공하지 않았다는 투정이다. 예술성과 관습적 시간의 대응이 자의적이고 편의적이라는 사실만 떠올려도 이러한 주장은 힘을 잃는다. 이는 우리도 이제 7시간짜리 공연을 올릴 여건이 형성되었다는 거들먹거림만큼이나 유치하고 안이한 불평이다. 7시간짜리 공연은 3시간까지 공연에 비해 두 배의 예술성과 재미를 제공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7시간짜리 공연을 3시간으로 축약하면 지루함이 사라지는가?

 

 

신체와 공간의 조형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관련된 이러한 설왕설래는 본질적으로 공연에 대한 불만족에서 기인하겠지만, 결국 문예연극의 미학에 대한 부적응과 작품이 의지하고 있는 ‘말하는 미장센’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진환 연출은 신체와 공간의 조형성, 그리고 미장센의 발화력을 다를 줄 아는 소수 연출가 중 하나이다. 그의 작품에는 항상 구도가 있고, 빛과 색이 있고, 회화 같은 조형성이 있다. 조형성(造形性, plasticity)이란 형태를 가진 시각적 오브제를 통해 무대적 의미를 산출하는 형식이나 기법을 말하는데, 사실성의 격률을 깨고 구도와 배치, 움직임을 미학적 의도와 예술적 설정으로 조직화하는 원리이다. 나진환의 무대는 배우들 간의 설전이나 동작의 연속체에 머물지 않고 무대 제요소들 간의 협력과 대립을 통한 종합적 이미지 구축을 지향한다. 비일상적 동작과 행위는 인물의 신체를 그로테스크하게 확대하거나 왜곡하는 한편, 전체 그림 속의 조그만 소품으로 수축시키기도 한다. 배우의 바스트샷(가슴 위 촬영) 사진을 찍으면 항상 기괴한 동시에 역동적인 이미지가 나오는 이유는 전자 때문이며, 아버지 표도르의 죽음 장면이 <마라의 죽음>(자크-루이 다비드)을 연상시키거나, 여타 많은 장면이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처럼 배경이 제거된 공간 속에서 낯선 오브제와 기싸움을 벌이는 고독한 인간 형상들을 닮은 것은 후자 때문이다. 세계 속에 ‘피투’된 존재의 그로테스크와 고독을 표현하기 위한 설정이다.

 

 

7시간의 정당성

보통 유럽에서 연극은 10년 구상하고 5년 준비하고 2년 기획하고 1년 연습한다. 그리고 최소한 2~3년, 길게는 10년간 레퍼토리 공연을 펼친다. 대부분의 공연이 호불호 논쟁과 관객들의 반복된 관람, 대중의 입소문, 언론의 조명, 배우의 교체, 순회공연 등을 거친다. 이렇게 몇 년에 걸쳐 작품이 숙성된 후에야 제대로 된 평론이 완성된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구상과 기획 기간만 따지면 유럽적 표준에 도달했다. 나진환 연출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 소설의 무대화를 고민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나진환 연출 정도가 되니 7시간을 채울 수가 있었다고 믿는다. 앞서 언급했던 불만, 즉 7시간짜리 공연이 자긍심보다는 낭패감을 줬다는 평가는 무대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객석에서 발생한 문제가 아닌가 싶다. 우리에게 과연 7시간짜리 공연을 감상할 능력과 소양이 갖춰져 있는가 하는 질문 말이다. 이 질문은 그러면 나진환 연출은 7시간짜리 공연을 올릴 자격이 있는가 하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오히려 이런 질문이 더 유익하다. 나진환 연출은 과연 그에 걸맞은 ‘테아트로그래피’(theatrography)를 보유하고 있는가? 그가 7시간동안 영혼을 불어넣어줄 배우와 극단을 가지고 있는가? 그가 7시간짜리 공연을 호위하고 정당화할 레퍼토리를 상시 공연하고 있는가? 배우들에게 7시간 분량의 대본을 암기시키고 그에 상응하는 체력과 에너지를 요구해놓고선 2주 만에 공연을 끝낸다면 기록적 공연이라는 사건성 외에 남는 게 뭔가. 대한민국 인구 중 0.01%에 해당하는 4천명만 관람한 공연이라면, 그 미학적 수준을 논하기에 앞서 과연 이런 깜짝쇼 같은 공연을 예술이라 부를 수 있는지 의문이고, 이런 희귀한 체험은 예술적 사건이나 예술적 해프닝이라 부르는 게 합당하지 않을까 싶다. 섭섭한 말씀이라고? 장시간공연의 대가인 레프 도진을 보라. 한국에 왔던 <형제자매들>은 6시간짜리이고, <악령>은 10시간짜리이다. 그게 가능한 것은 30년 넘게 함께 일하는 배우들이 즐비하고 수십 편의 레퍼토리가 매일 같이 상연 중이기 때문이다. <형제자매들>만해도 30년이 넘었고, <악령>은 벌써 26년째다. 이것이 명작 탄생의 조건이고, 이런 조건 하에서 예술이 예술로서 승인받을 수 있다.

 

예술로서 연극은 1년에 한 번씩 하는 체력장도 아니고, 벼락치기 기말고사도 아니다. 7시간의 정당성은 테아트로그래피의 진정성과 레퍼토리의 역사성에서 나온다. 2015년 레프 도진은 30년 된 <형제자매들>을 젊은 관객층을 위해 새로운 버전으로 업그레이드했다. 이런 것이 진정성이고 역사성이다. 관객이 배우와 함께 늙어가고, 그 감동과 가치를 다음 세대에게 전해주는 것. 우리 상황에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같은 공연은 창작도 수용도 역부족이다. 단판 승부는 결코 예술이 될 수 없다. 들림 또한 결코 올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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