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 좋은 날/ 정윤희

원망과 추억과 연민이 뒤섞였던 어느 흐린 날, 그리고 아이러니

경계없는예술센터 명작 다시 읽기 시리즈 <운수 좋은 날>

 

정윤희

 

원작: 현진건

각색: 이화원

연출: 윤기훈

출연: 전보현, 신소영, 김영훈, 김승우

공연일시: 2017.10.26. ~ 10.28.

공연장소: 경계없는예술센터 스페이스T

관극일시: 2017.10.26. 20:00

 

 

누구나 가슴 속에 저마다의 블랙홀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아무리 빠져나오려 발버둥 쳐도 빠져나올 수 없는 곳, 비꼬인 창자처럼 주름져 있고 무대 위에 흐르는 조명처럼 요란하고 음산한 빛이 감도는 그곳이 바로 블랙홀이다. 도대체 우리는 그 안에서 무엇을 좇고 있기에 그토록 무거운 발걸음을 끝도 없이 옮기며 살아가는 걸까.

 

연극 ‘운수 좋은 날’은 근대 작가 현진건의 두 작품, ‘운수 좋은 날‘과 ’술 권하는 사회‘를 각색하여 만든 작품이다. 극은 현진건이라는 인물과 배경에 대해 쉽게 이해를 도모하도록 소상하고 친절하게 이야기에 접근한다. 또한 우리의 기억 속에서 이제는 밀려 나가버린 그 시절의 서울말씨를 접할 수 있는 공연이기도 했다. 공연이 시작하자 무대에는 소설가와 아내가 등장하고, 궁핍한 살림을 견디다 보면 언젠가 남편이 소설을 써서 좋은 시절을 맞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아내가 해맑은 표정으로 남편에게, 제목도 ‘운수 좋은 날’이니 소설 속 인물들이 ‘이야기 속에서라도 행복해 지도록 하면 안될런지요’라고 지그시 묻는다. 하지만 식민지 하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는 서민들의 삶은 비극이고, 그들을 바라보며 작품을 써 내려가는 소설가의 삶 역시 그 자체로 아이러니다.

 

하지만 그토록 궁핍하고 고통스러웠던 시절에, 소설가는 어찌 그토록 기묘한 형형 색깔을 작품 속에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일까.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에서 자신에게 다가올 큰 불운을 감지하고 있었으면서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계속해서 인력거를 몰고 다녔던 김첨지는, 자신에게 곧 들이닥칠 불운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 불운을 돌파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는 그의 아내를 원망하고 있는가, 아니면 사무치도록 그리워하고 있는가. 날도 흐린데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갈팡질팡, 손님들이 내미는 삯에 자기도 모르게 이끌리어 끊임없이 발걸음을 내딛는 김첨지의 복잡한 심연을 나타내는 장소로 무대만큼 좋은 곳도 없을 것이다. 상상치도 못했던 큰돈을 만져보니 비실비실 웃음이 흘러나왔지만, 달포 째 앓고 있는 ‘오라질 년’이 오늘 아침에는 일을 나가지 말라며 난리를 쳤던 일을 자기도 모르게 수없이 읊조린다. 안개 낀 무대 위에서 여러 빛깔의 조명이 스쳐지나가듯, 손님을 태우며 보게 된 별별 꼬락서니들도 요상했거니와 김첨지의 심연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손님을 태우느라 명동과 역사와 인사동을 정신없이 쏘다니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각색자는 하루 종일 한 끼도 못 먹고 계속 인력거를 끌다가 이제는 비몽사몽을 헤매고 있는 김첨지에게 다독다독 말을 건네주는 행인을 붙여줌으로써 그를 향한 연민의 시선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식민지 치하에서 괴로워했던 이들의 삶은 오늘날에도 바로 우리 곁에 있는 이웃들의 삶이라는 진실이 현실감 있게 관객에게 전달된다. 행인은 김첨지에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어 주며 그가 길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지지 않고 가던 길을 계속 갈 수 있도록 조력해준다. 김첨지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내와의 옛 추억을 소록소록 떠올리며 아득한 웃음을 짓는다. 연극 작품에서도 이 장면이 절정을 이루도록 연출이 되었다. 극한의 고통의 순간, 우리의 삶을 통째로 사로잡았던 그 순간의 선택, 그 어떤 희생을 치르게 될지 알지도 못한 채 덤벙 사랑에 몸을 내맡겼던 아득했던 그때를, 김첨지는 떠올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첨지는 집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주막에 들러 술을 퍼부은 뒤에야 비틀비틀 집으로 향한다. 달포 째 끙끙 앓아오던 아내가 그토록 먹고 싶다던 설렁탕 한 그릇을 사들고 말이다. 취하지 않고 도저히 맨 정신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비극을 마주하러 간다. 소설가의 아내가 아내의 싸늘한 시신을 부둥켜안으며 김첨지가 울부짖는 마지막 장면 읽기를 막 끝냈을 때, 마침 소설가도 만취가 되어 돌아왔다. 그날 아침 자신의 늦잠을 깨우며 그 맑고 투명한 순수함으로 보내는 아내의 응원과 미소가 마냥 간지러웠지만, 날이 저물자 그 밝은 낯을 맨 정신으로 보기 어려웠으리라. 예술가가 처한 현실이란 그때나 지금이나 아니러니 그 자체니까. 아내의 걱정 어린 말은 소설가의 역정을 사버렸고, 그는 아내를 제치고 집을 뛰쳐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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