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union 이야기의 배반/ 김태희

새로운 시점(始點)을 준비하며

<reunion 이야기의 배반>

 

김태희

 

돌이켜보면 최근 몇 년간 우리의 모든 화두는 국가에서 출발했던 것 같다. 국정 농단 사태를 지나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는 동안, 적폐를 청산하고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가자는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동안 우리는 늘 끊임없이 국가에 대해 고민을 해왔다. 하지만 국가란 무엇인가 만큼 어려운 질문이 또 있을까. 국가의 탄생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그것은 철저히 사람들의 필요에 기반 한 것이었다. 왕정 시대를 거쳐 근대로 진입하면서 단일 민족으로 구성된 국민국가가 탄생했고 국가는 정치적 필요에 의해서 정의 내려지는 개념일 뿐이었다. 그런데 희한하게 필요에 의해 등장한 이 개념과 시스템이 우리의 삶을 왜곡시킬 수 있을 만큼 거대해지고 말았다. 그래서 국가에 대해 논하는 것은, 그 시스템의 문제에 대해 지적하는 것은 실로 어려웠다.

 

하나만 프로젝트의 <reunion 이야기의 배반>(이하 <reunion>)은 우리에게 국가라는 개념이 생기는 시점으로 돌아가길 요청한다. 이야기가 탄생하는 시점에 우리 국가의 시작이 있고,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가 있다.

 

 

이야기와 현실의 접점 만들기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은 극중극이라는 장치에서 비롯된다. 성웅과 성빈은 권리장전에 참여하기로 한 배우들인데 정치극에 대한 부담 때문에 나머지 배우들이 다 도망을 간 상황이다. 블랙리스트의 주역들이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는 상황에서 정치극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성빈의 대사는 극장 밖의 현실을 강하게 상기시킨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이 극인지 현실인지 모호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이들이 현실과 연극의 접점을 만드는 전략이 된다.

블랙리스트에 스스로 이름을 새기는 행위를 피하기 위해 도망간 배우들을 뒤로 하고 성웅과 성빈은 둘이서도 가능한 2인극을 만들기로 한다. 대상 작품은 프레드 울만의 동급생. 하지만 나치의 지배를 받는 1930년대 독일의 상황이 두 배우에게는 어딘지 낯설고 결국 이들은 1930년대 조선으로 배경을 옮기기로 결정한다. 이들은 자유롭게 이야기의 배경을 바꾸는 것도 모자라 장면 만들기의 순서도 뒤죽박죽으로 진행시켜 버린다. 발단에서 전개, 위기로 이어지는 서사의 흐름은 사라지고 발단 이후 불쑥 절정이 찾아오고 그 사이에 있었던 일들로 되돌아가는 식의 낯선 전개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야기의 흐름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이 작품이 갖는 중요한 전략중의 하나다. 이야기의 순서가 기존의 인식과는 다르게 진행됨으로써 배우들은 끊임없이 극 전개에 끼어들고 극적 환상은 몰입을 야기하기보다는 극을 풀어가는 두 명의 배우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뒤죽박죽으로 나열된 이야기의 순서를 다시 조립하면 다음과 같다. 프레드 울만의 <<동급생>>이 조선으로 배경을 옮겨가면서, 성웅은 민족의 독립을 꿈꾸는 문학청년으로 성빈은 친일파 아버지를 둔 조선의 엘리트 청년으로 그려진다. 둘도 없는 우정을 나누었지만 성빈이 아버지의 논리를 그대로 체화해 일본인 군관으로 부임하게 되면서 둘 사이에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제 성빈은 함께 꿈을 노래했던 목소리로 가미가재를 예찬하는 노래를 부르고 둘은 결국 서로에게 총을 겨누는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해방 뒤 민족반역자를 처단하는 일에 헌신하고 있는 성웅에게 성빈의 마지막 행적을 담은 글이 하나 도착한다. 그들이 마주쳤던 최후의 밤 이후, 성빈은 전투기에 몸을 싣고 천황이 있는 천황궁을 향해 돌진하다가 공중에서 폭파되며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누구보다 열렬히 일본의 지배에 찬성하고 충성했던 성빈의 모습이 결국은 마지막 반전을 위한 치밀한 계산에 의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성빈을 열렬히 사랑했고 열렬히 증오했던 성웅만을 남겨 놓은 채, 이야기는 관객의 기대를 보기 좋게 배반한다.

 

 

시스템에 길들여지지 않으려면

 

장렬한 결론으로 마무리된 작품에 대해 만족하는 성웅과 달리 성빈은 시종일관 어두운 표정이다. 극 초반 성빈은 늘 우산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 성웅을 위해 우산을 사가지고 온다. 장난 반 진담 반 우산을 건네는 그의 태도를 상기해보면, 이 장면은 성웅에 대한 성빈의 애정과 두 사람 사이의 우정을 증언하는 역할을 위해 마련되었음이 분명하다. 다른 배우와 작가, 연출가가 도망가고 혼자 남아있을 성웅을 위해 연습실에 찾아왔다는 성빈은 분명 성웅의 진실한 친구 중의 한 명이다.

 

그런데 극이 끝나자마자 표정이 변한 성빈은 갑작스레 작품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하다. 그는 사실은 자신이 이 작품을 그만두자고 팀원들을 선동했으며 원래의 작품이 타깃으로 설정한 재벌가의 회장이 자신의 할아버지라는 사실을 밝힌다. 이 장면에서 시스템에 대한 성빈의 지적은 뼈아프다. 그의 말처럼 우리는 해방이 되고 친일파를 제대로 처벌하지 못했고 당시에 바로잡지 못했던 과오들이 지금도 넘쳐나고 있다. 그 과오들은 아무리 희망을 가지고 노력해도 시스템에 의해 제거되고 말 뿐이라고, 그러니 이 시스템에 적응해서 더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우리를 길들이고 있을 따름이다. 시스템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 끝에 성웅은 성빈을 남겨둔 채 연습실 밖으로 나가버린다. 이제 성빈의 결정만이 남았다.

 

역설적으로 무대에는 성빈이 있지만 그것은 비단 성빈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연극을 하는 이들의 문제이고 더 나아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시스템을 바꿀 수 있는가. 뻔히 결말이 정해져있는 이야기를 배반하고 희망을 꿈 꿀 수 있는가. 성빈은 결국 연습실을 나가지 못한다. 그만큼 시스템을 배반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야기의 배반을 목격한 우리는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믿기지 않은 사건의 파고를 넘어온 우리라면, 그리하여 지금 이 시점에 망설이던 우리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직시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다시 한 번 더 도약할 수 있는 힘의 근원이 될 것이며 똑같은 일이 닥치더라도 물러서지 않을 수 있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만 프로젝트의 전작 <내일을 사는 법>은 시스템의 배반을 마음먹고 난 뒤의 이야기들이다. 공시생 이야기에서부터 스텔라데이지호, 여군의 성폭력 사건, 마에스터 고등학교 등 현 시스템이 가진 문제들을 적나라하게 고백했던 그 작품을 되돌아보면 이 작품이 가진 의미는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우리 모두가 한 번 쯤 거대한 시스템 앞에서 느꼈을 공포, 국가라는 거대한 이야기 앞에서 느꼈을 두려움이 사실은 진정한 국가에 다가가는 길을 막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우리가 용기를 내서 아닌 것을 아닌 것이라 분명히 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국가는 진정한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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