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풍찬 유랑극장/ 오유경

로풍찬 유랑극장

잘 빚어낸 번안/다시 시작된 역사인식

 

오유경(극단 그룹動·시대 연출)

 

원작: 류보미르 시모비치(쇼팔로비치 유랑극단)

대본: 김은성

연출: 부새롬

단체: 달나라동백꽃

공연일시: 2018/02/08-02/25

공연장소: CKL스테이지

관극일시: 2018/02/20

 

 

극단이름이 참 새롭다. 그 이름마냥 정겨운 작품이다.  작품 <로풍찬 유랑극장>은 원작<쇼팔로비치 유랑극단>을 1950년 6·25 전쟁 전 여순반란사건 이후 혼란스러웠던 전라남도 새재마을을 배경으로 전환시킨다. 단장 이름이 로풍찬이다. 그는 여성국극출신의 배우 고봉자와 여주인공 전문배우 옥단비와 현실과 극을 혼동하는 남자단원 하가림, 이 3명과 함께 유랑극단생활을 한다. 같은 동족끼리 이데올로기의 갈등으로 서로 죽고 죽였던 비극의 시절. 그들이 도착한 전라남도 새재마을은 좌익세력들은 모두 빨치산이 되어 지리산으로 숨어들고, 청년단들은 좌익에 동조한 마을 주민들을 애국의 이름으로 무참히 학살하고 있었다. 로풍찬 유랑극단은 그 비극의 목격자인 셈이다. 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자랄 것 없이 모두가 서로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되어 증오와 복수로 얼룩진 곳. 어린 소녀는 미쳐버렸고 좌익에게 부모를 잃은 청년은 피칠갑을 하고 좌익세력을 찾아 죽이고 다니며 복수에 혈안이 되어있다. 어쩌다 빨치산의 가족이 된 사람들은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몰라 두려움에 떨고, 빨치산 토벌로 아들을 잃을까 전전긍긍한 어머니는 청년단에 살해된 사람들의 시체를 찾아다니며 아들의 생사를 확인한다. 이런 그들에게 생애 처음 보는 로풍찬 유랑극단의 공연,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서로의 증오를 잠시 잊고 극에 빠져들어 하나가 되게 한다. 피칠갑 청년까지. 이로 인해 마을은 잠시 훈풍이 불고 짧은 평화와 휴식이 오지만, 이내 이것은 오래가지 않고 그 피해는 로풍찬 극단에게도 옮아 옥단비의 머리카락이 빡빡 잘리고 현실을 극과 착각한 하가람은 죽임을 당한다. 피칠갑은 살인악귀가 되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빨치산의 어머니는 아들의 시체를 발견하고 미쳐버린다. 로풍찬은 남은 두 단원을 데리고 마을을 떠난다. 그리고 작품은 이 잔혹한 비극이 더 처참한 전쟁의 서막에 불과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끝난다.

 

정말 잘 빚어낸 번안 작품이다. 작가 김은성의 대본 속 전라도사투리의 대사는 톡톡 튀면서도 맛깔스럽고, 젊은 배우들(아마도 평균연령이 30대 혹은 20대 후반)의 연기는 담백하게 깔끔하면서도 정스러웠다. 더구나 악기연주와 노래도 출중한 로풍찬 유랑극단 배우들. 전쟁의 폐해를 그리는 메마른 무대에 색감이 살아있는 의상은 생기를 불어 넣는다. 장면이 바뀔 때마다 암전 속에 들려오는 음악도 극 진행을 매우 적절하게 돕는다. 극의 정서는 쓸데없이 지질대지 않고, 군더더기 없이 말끔한 장면구성은 속도감 있고 리드미컬한 연출력을 돋보이게 한다.

 

그럼에도 느껴지는 이 허기짐은 무얼까. 이것은 아무래도 순전히 본인 탓이다. 일본에게 강점당하고 해방되자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동족간의 치열한 비극을 겪은 우리의 역사를 본인의 세대는 자라면서, 조부모와 부모에게서, 학교수업, 연극, TV드라마, 영화, 다큐멘터리, 수많은 소설과 시와 수필과 역사서에서, 때마다 기념일마다 수없이 정말 수도 없이 닳고 닳게 듣고 보고 다루고 익혀왔기에, 매우 익숙하다. 익숙하다 못해 어지간한 전개는 예상가능하고 어느 포인트에서 슬픔이 눈물이 가슴이 아파오는지 미리 읽어진다. 그래서 같은 역사를 바라보는 젊은 세대, 그들만의 새로운 시선, 관점, 해석을 더욱 알고 싶고, 이에 필요이상의 열정과 기대를 갖는 탓이다. 생각해보면 지난시간 동안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우리의 비극적 역사가 식상하고 지긋지긋해졌다. 과거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것만 같고 옛 것이 낡고 촌스럽고 더 이상 소중해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잠시, 지겨워도 지속적으로 역사를 배우고 익혀야함을 또는 가르쳐야함을 잊은 듯하다. 지겨워도, 뻔히 반복되는 스토리라도 되풀이 익히고 기억하고 새기고 다음세대에 가르치고 전해야, 역사란 새로운 세대에 맞게 새로운 시선과 해석을 입고 새로운 지혜가 되어 후대에게 전해지고, 그들의 새로운 역사에 쓸모 있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었다. 그래서 역사를 배우고 익히고 전하는데 소홀했다. 그 흔했던 역사인식이 잠시, 절단되었던 것 같다. 본인의 세대에 비해 강의실에서 만나는 젊은 세대들의 역사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을 보면 말이다. 본인에겐 가깝고 밀접한 생생한 상식이었던 역사가 그들에겐 점점 멀고 어렵고 부담스럽고 의미 없는 그저 죽은, 사라진, 혹은 희미한 지난 흔적에 불과해 보였으니 말이다.

 

아! 그래서 작품 <로풍찬 유랑극장>을 보니 그 역사인식이 단절되었다가 처음, 제로에서 다시 시작되는 걸 느꼈다. 비록 본인에게는 이미 마르고 닳도록 새겨진 이야기와 정서와 역사인식이지만. 새롭게 다시 의미를 찾아가는 출발에 서있는 것 같아 반갑고 기뻤다. 다음엔 본인이 허기져하는 필요이상의 쓸데없는 기대를 충족할 수 있지 않을까. 눈을 반짝이게 된다. 같은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세대, 그들만의 역사인식을 만나고 배우고 공유하는 시간을! 기대한다. 하지만 이는, 군소리를 달자면, 본인취향이 의미홀릭에 걸려 새로운 시각, 관점, 해석을 만나려고 너무 집착하는 경향이어서 일지도 모른다.

 

증오와 복수로 일그러진 심리를 잔뜩 긴장한 구부러진 신체로 배역의 이미지를 구축한 피칠갑역의 배우, 그의 탁월한 신체연기. 의도치 않게, 보러 간 작품마다 전혀 다른 스타일과 인물을 구축해 선보이는 이진경배우의 다채롭고 폭 넓은 인물표현이 특히 흥미롭고 인상적이었다. 기대는 이런 것인가 보다. 그들의 다음무대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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