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향/ 이연심

<춘향>

 

이연심(경기여자고등학교 교사)

 

작/연출 : 이수인

    체: 떼아뜨르 봄날

공연일시: 2018.03.21- 2018.04.01

공연장소: 예술공간 서울

관극일시: 2018.4.1.

 

 

 

연극을 보는 즐거움은 특별하다. 인간의 모방 본능에서 시작된 ‘행위’ 하는 자의 즐거움을 차치하더라도 살아있는 배우의 그럴듯한 연기를 눈앞에서 보는 “Live”의 위력은 연극만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이라 하겠다. 거기에 멋진 의상을 입고 서커스를 방불케 하는 움직임과 가수 뺨치는 노래 실력까지 갖추고 있다면 금상첨화라 하겠다. 2006년 창단 이래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가장 현대적인 무대를 구현하기 위해 끊임없는 실험을 반복해 오던 ‘떼아뜨르 봄날’이 2013 <왕과 나>와 2016년 <심청>이후 세 번째 고전문학을 모티브로 하여 <춘향>을 내 놓았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춘향의 이야기와 인물들의 특정 부분을 빌어 완전히 새롭게 재구성하여 새로움 작품으로 탈바꿈하였다. 고전 춘향의 스토리를 짚어가는 방식으로 진행되지만 서사보다는 말과 움직임이 극을 이어가고, 드럼과 심벌즈, 기타 등의 연주는 배우의 섬세한 움직임과 노래를 때로는 꿈처럼 자유롭고 감각적으로 전달한다. ‘떼아뜨르 봄날’ 특유의 현란하고 코믹한 대사는 극본과 연출을 맡은 이수인의 필력에 감탄하게 하고 쉼 없이 쏟아지는 빠른 대사는 탄탄한 배우들의 화술에 힘입어 귀에 쏙쏙 들어온다. 일상에서 흔히 일어나는 순간의 감정을 태초의 운명을 운운하며 길고 긴 호흡의 현란한 대사로 속사포처럼 읊어대는가 하면, 정작 결정적으로 내뱉기 어려운 말은 참 짧게도 느닷없이 공격하듯 내던진다.

 

‘자자!’, ‘벗어!’ ‘여기서?’, ‘응’, ‘나빠!’

 

블랙 유머를 갖춘 극본의 힘이 느껴지는 대사들이다. 또 배우들의 음색을 고려한 대사와 노래는 오묘한 화음을 만들어 불안과 슬픔을 표현하기에 적절하다. 연출의 친절하고 섬세한 설정 덕이리라. 균형 감각을 잃어 흔들리는 모습이 아주 짧은 순간에 보이긴 했어도 배우들의 절제된 움직임은 감정과 사건의 흐름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뿐이다. 귀한 대사들은 쉼 없이 쏟아지고 대사의 의미를 생각하고 웃음의 코드를 찾기도 전에 다음 대사에 묻혀 버리고 민요, 동요, 대중가요, 운동가요를 섞어 놓은 선곡은 감정의 흐름을 방해한다. 시종일관 무대를 지키고 있는 춘향과 그녀들은(월매, 향단과 향매, 오죽은 코러스의 역할을 하며 시종일관 무대를 지킨다) 극의 흐름에 따라 등장하는 몽룡, 방자, 몽룡부, 몽룡모, 변학도 등의 인물들과 뒤섞여 움직임을 만들어 내면서 오히려 장면의 목표를 흐리게 하는 부작용을 낳는다. 집중과 선택이 필요한 무대 그리기를 다시 한 번 생각했어야 한다는 느낌이 든다.

 

연극 감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은 카타르시스이다. 작품의 의도에서는 등장인물들의 욕망과 불안, 혼란과 슬픔을 연극적 상상력으로 무대 위에 펼쳐 놓았다고 하나 관객이 이러한 감정을 느끼기엔 시간이 없다. 여백이 없이 몰아치는 연극은 언제 끝났나 싶게 쉬이 시간이 흐르지만 정작 작품이 의도한 욕망과 불안, 혼란과 슬픔이 관객에게까지는 전해지지는 않는다. 관객은 배우들이 끌고 가는 감정과 사건에 끌려가기 바쁘다. 공연자가 관객에게 작품을 통해 전달하는 행위가 ‘공연’이라면 공연자는 관객이 느끼고 호흡하는데 필요한 절대적 시간을 고려해야 한다. 그냥 쏟아 내고 말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작품 전체의 리듬과 템포를 다시 한 번 생각했어야 한다는 느낌이 든다.

 

연극 감상은 공연자와 관객과의 소통의 행위이며 따라서 관객은 자동적으로 연극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생각한다. 특히 현대 이 시점에 다시 소환된 고전문학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왜 하필 춘향일까? 당연한 의문이다. 연출가는 춘향이라는 인물을 새로운 관점으로 해석하되 사회적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강박에서 벗어나 연극적 상상력만으로 무대를 펼쳐 냈다고 하였으나 하필 <춘향전>을 선택한 이유는 작품으로 전달되어야 한다. 연애와 욕망의 성취와 좌절은 보인다. <춘향전>을 비틀어서 몽룡을 부모의 끝없는 욕망에 원하지 않는 이별과 공부에 자아를 잃어버린 인물로 그리거나 변학도를 어마 무시한 권력을 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춘향의 진정한 사랑을 얻지 못하지만 그래도 사랑하노라 말하는 포악성을 뺀 인간으로 그리거나, 춘향을 몽룡에서 변학도로 다시 숙종으로 연상되는 불명확한 남자에게로 상대를 갈아치우는 권력지향형 인간으로 그리는 것은 다양한 욕망의 실체와 좌절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런 비틀기로 이 작품은 2018년 이 시점에 무엇을 말하고 싶다는 것일까? 현대의 고등학생들도 춘향이라는 인물을 더 이상 ‘신분의 벽을 뛰어 넘는 지고지순한 사랑을 보여준 여인’으로만 해석하지 않는다. 신분의 벽이 뚜렷한 가부장 사회에서 여성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귀한 신분과 권력을 가진 남성이 필요했으며 그들을 통해 신분상승을 꾀하였고 <춘향전> 곳곳에는 그러한 춘향의 의도가 드러나지 않게 숨어 있다는 것쯤은 분석해 낼 수 있다. 물론 능동적 인간으로 사회의 불합리를 타개해 나가려는 것보다 남성의 힘을 빌러 신분 상승을 꾀하려던 춘향의 한계도 꼬집어 낸다. 춘향전을 비틀거나 재구성하지 않아도 찾아 낼 수 있는 춘향의 욕망을 연출가는 새로운 작품 <춘향>으로 다시 하고 싶은 것이었을까? 그러기엔 작품 속에서는 무책임한 감정들만 난무한다. 스톡홀름 증후군(Stockholm syndrome)이나 마조히즘(masochism)을 연상시키는 춘향의 모습은 ‘춘향의 욕망‘이라는 연장선에서 생각하기 힘든 모습이기도 하다. 고전소설 <춘향전>을 현대에 다시 소환할 때에는 그럴만한 명확한 관점과 메시지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것이 관객에게 연극이라는 허구를 통해 일상을 새롭게 발견하고 삶의 진실을 만날 수 있는 즐거움을 선사하는 미덕이며, 우리가 <춘향전>이라는 고전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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