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터의 소풍/ 이연심

뫼비우스의 길: <전쟁터의 소풍>

 

이연심(경기여자고등학교 교사)

 

    작 : 페르난도 아라발

재구성/연출: 김승철

    체: 창작공동체 아르케

공연일시: 2018.03.15- 2018.04.01

공연장소: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

관극일시: 2018.03.18.

 

 

TV를 틀면 하루가 멀다 하고 전쟁 소식이 뉴스를 장식한다. 밖에선 시리아 내전이 끝이 날 줄 모르고 어른들은 DAS와 Pence Rule로 복장이 터져 나가고 학생과 청년들은 입시와 취업의 줄 세우기에 지쳐간다. 세상은 전쟁터다.

 

피크닉 가방에 연어 샐러드에 와인을 담고, 고풍스러운 축음기까지 등에 메고 아들이 보초를 서고 있는 참호로 소풍을 간다. 전쟁과 소풍, 총소리와 아코디언 소리. 이 이질적인 것들을 결합시켜 우리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호기롭게 꼬집는 연극이 창작공동체 ‘아르케’ 10주년 기념 공연인 <전쟁터의 소풍>이다.

 

무대는 언뜻 보면 고물상 같다. 역할을 다 하고 버려진 집기들은 치열한 삶의 전쟁 이야기를 담고 있고 귀를 찢어놓는 총소리에 일상의 전쟁은 진짜 총알이 날아드는 전쟁터가 된다.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곳은 기마부대에 육탄전을 불사하는 과거 어느 날, 그 어떤 곳이 되기도 하고 촛불 혁명이 있던 서울 광화문 광장이 되기도 한다. 참호를 지키고 있는 ‘자뽀’에게 느닷없이 ‘자뽀’의 부모인 ‘떼빵’과 ‘떼빵 부인’이 음식을 잔뜩 싸들고 면회를 온다. 부모의 얼굴만 봐도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자뽀’는 자신이 왜 전쟁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공포의 시간을 견디고 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전쟁 속에서 외로움과 생존의 불안을 견디기 위해 뜨개질을 하고 ‘칼’과 시답지 않는 놀이를 하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이 작품의 드라마투르그에 의하면 ‘칼’은 페르난도 아라발의 원작 <싸움터의 산책>에는 등장하지 않는 인물로 연출가의 재구성 과정에서 삽입되었다. ‘칼’은 ‘자뽀’의 눈에만 보이는 비현실적 인물로, 전쟁으로 고통 받고 있는 이들을 위해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시를 읽어주는 친구이며 연민의 상징이자 위로이다. 또 홀로 있는 사람을 위해 ‘함께 있어 주는 이’이며 ‘지켜 봐 주는 이’이다. 실제로 ‘칼’은 극이 진행되는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자뽀’와 함께 있으며 무대를 지킨다. 전쟁터의 만찬이 시작되고 ‘자뽀’와 똑같은 처지인 ‘제뽀’가 포로로 잡히고 그들은 서로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며 즐거운 한 때를 보낸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 속에서 ‘자뽀’는 뜨개질을 하고 ‘제뽀’는 꽃을 만들었다. 단절된 참호 속에서 길고 긴 외로움을 견딘 그들은 죽여야 하는 대상을 만난 것이 아니라 반가운 손님을 만난 듯 서로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갖춘다. 폭격 속에서도 댄스를 즐기는 ‘떼빵’ 부부는 과거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의 여유를 뽐내고, 생명의 존엄을 실천해야 하는 위생병들은 고물을 수집하듯 전사자 찾기에 열을 올린다. 세상이 변하고 더 이상 전쟁이 필요 없음을 깨달은 ‘자’뽀와 ‘제뽀’, ‘떼빵’ 부부는 전쟁을 끝낼 방법을 찾아내지만 곧이어 시작된 폭력에 모두 몰살된다. 무대에 홀로 남은 ‘칼’의 모습은 아직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부조리하다. 잔인한 전쟁은 반복된다. 연극은 지독한 입시 스트레스에 반복적으로 실신하던 어느 여학생의 모습이 ‘자뽀’에게 투영되어 더욱 잔인했다. 그 여학생은 마주 앉아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얼마나 도망치고 싶었으면 쓰러질까? 잃어버린 시간은 그 어떤 것도 기억할 수 없지만 그저 온전히 살아있는 생명체로만 존재할 수 있으니 오히려 휴식이었을까? ‘칼’이 ‘자뽀’의 고독과 공포가 만들어낸 도피처이듯 ‘실신’은 학생의 외로움과 힘겨움이 만들어낸 도피처, 적응기제, 혼자만 체험할 수 있는 경험의 실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칼’과 같은 도피처를 만들어내고 있을까? 서열화 없는 핀란드 교육을 실현해 보겠다고 우리나라 교육정책은 신자유주의 교육 정책에 대비되는 배움과 성장 중심의 교육을 천명하고 있지만, 교실의 참 모습은 아직은 전쟁터다. 우리나라는 세계 1위의 교육비를 지출하여 7시간 50분의 OECD 국가 중 가장 길게 청소년들을 공부 시키면서 세계 3위의 학업성취능력을 이뤘으나 청소년 행복지수는 OECD 국가 중 꼴찌를 달리고 있다. 또한, 세계 1위의 학업스트레스, 인구 10만 명당 자살 사망률 28.5명(OECD 국가 평균 11.2명), 청소년 사망원인 1위 자살 등의 극심한 경쟁사회에서 학생들은 지쳐가고 있다. 행복교육은 아직 요원한 일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작품이 전쟁의 폭력성과 모순을 통해 현재 진행형인 세상의 부조리함을 고발하고자 하였다면 연출가의 의도는 적중한 것 같다. 그러나 모든 배우들의 과장된 연기와 끊임없이 내지르는 화술은 공간감을 흐리게 할 뿐 아니라 관객에게 청각적 스트레스로 작용했고, 극의 템포는 지루할 만큼 리듬감을 놓치고 있었다. 마리오네트가 연상되는 ‘칼’의 양식적 연기는 일상의 말과 동작과는 구분되고 배터리가 다 된 듯한 매끄럽지 않은 반복된 대사는 아주 오랜 시간 전쟁터를 떠돌았다는 느낌이 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순간순간 보이는 일상적인 움직임은 캐릭터의 일관성을 손상시킨다. 연출가와 배우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주먹을 불끈 쥐고 장면 장면을 끌고 가다보니 관객 역시 공연시간 내내 온몸에 힘이 들어가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극의 흐름면에서 긴장과 이완, 선택과 집중의 묘미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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