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 – 이연심

<공포>

 

이연심(경기여자고등학교 교사)

 

작 : 고재귀

    출: 박상현

    체: 그린피스

공연일시: 2018.05.04. ~ 2018.05.13.

공연장소: 대학로 예술극장 대극장

관극일시: 2018.05.13.

 

 

 

인간이 느끼는 불안, 두려움은 생존에 필요한 ‘위험감지체계’라고 볼 수 있다. 두렵고 불안한 그 상황을 피하려는 시도들은 인간을 안전하게 생존하도록 만들기도 하지만 불안과 두려움을 만들어내는 상황이나 대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회피해 버리거나 일상생활이나 사회적 기능에 지장을 초래하기도 하고, 때로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기도 한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인간이 느끼는 불안, 두려움은 인간을 살게도 하고 죽게도 한다. 누군들 단 하루도 두렵지 않은 날이 있겠는가. 매일 운전을 하면서도 교통사고가 두렵고 고층 빌딩에 근무하면서 높은 곳이 두렵다. 죽음, 넓은 장소, 통증, 같은 공간, 천둥과 번개, 배설물, 피, 물, 오염, 동물, 사체, 밤, 어둠, 병, 죄, 소란, 강한 빛, 식사, 매장, 독, 낯선 이, 성병, 주사, 병원, 시험, 발표, 사람, 무대…그리고 도덕적 불결함. 참으로 “유령도 무섭지만 현실도 무섭다”는 ‘실린’의 말이 실감이 난다. 

 

제39회 서울연극제 공식 참가작으로 선정된 연극 <공포>(고재귀 작, 박상현 연출)는 밑도 끝도 없는 두려움을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견디고 있는 인간유형을 소개한다. ‘실린’은 산다는 것 자체가 두렵고 인간의 허위와 가식에 환청과 죽음의 악취를 괴로워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하인 ‘가브릴라’와 ‘까쨔’의 운명을 놓고 주사위를 던지듯 내기를 한다. 동정과 자비를 가장한 인간의 잔인함이다. ‘마리’는 도덕적 불결함이 두렵고 알코올중독자인 ‘가브릴라’와 그를 동정한 ‘까쨔’의 통정을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그녀 또한 남편의 친구인 ‘체호프’를 향한 불륜의 감정에 괴로워하다 끝내는 ‘까쨔’처럼 통정을 한다. 가난한 자를 향한 ‘까쨔’의 동정은 신이 아닌 ‘실린’의 거짓 자비와 동정에 짓밟히고 스스로 삶을 끝내는 선택을 한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술을 참아야하는 하는 알코올중독자 ‘가브릴라’는 비로소 산다는 것은 의지임을 깨달을 때 즈음 ‘까쨔’의 자살을 목도하게 된다. 어떤 판단도 하지 않는 채 사실의 객관적인 증인이라도 된 듯, ‘체호프’는 ‘마리’에 대한 연정을 숨긴 채 ‘실린’의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방관한다. 선과 도덕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요제프’ 신부는 말한다. “선과 도덕을 따라 진실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의 의무이며, 죄에 대한 벌은 신이 내리는 것이고 신은 그것을 만끽한다.” 악의(惡意)와 부도덕(不道德)에 젖어 있는 인간이 허위와 가식으로 선과 도덕을 준수한다면 신은 진실한 인간이라 면류관을 내리실까? 40인의 순교자의 이야기처럼…

 

불가해한 인간의 내면이 만들어내는 불완전한 내일은 언제나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으며 그 두려움은 자신이 짊어지고 갈 자기 몫의 십자가이다. 아이들은 언제나 시험이 두렵고, 필자는 언제나 시댁이 두렵다. 누구는 밤이 두려워 불을 켜놓고 자야하고 누구는 매일 죽음이 두렵다. 박약한 나의 의지를 탓하거나 비관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누구나 그러한 두려움을 안고 하루하루를 산다고 위로할 일이다. 

 

대학로 예술극장이라는 멋진 극장에 <공포>의 무대(무대디자인 박상봉)는 아름답게 들어앉았다. 러시아의 겨울바람을 전하듯 희끗한 자작나무는 비스듬히 줄지어 서 있고 불이 붙은 벽난로가 있어도 스산함이 묻어나는 차가운 색감의 실내도 역시 비스듬히 누워있다. 방향감이 역력하다. 19세기 제정 러시아의 그들의 모습이나 현재 21세기를 사는 우리의 모습이 다르지 않음을, 여전히 아픔과 두려움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음을 의도적으로 표현한 듯하다. 작품이 시작되기 전에 만난 무대는 관객으로 하여금 작품에 대해 한껏 기대하게 한다. 그러나 연출이나 배우들의 연기는 기대만큼 관객을 집중시키지 못한다. 각 배우가 표현하는 인물은 각자의 공포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으니 인물들의 관계가 보여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전달되기에 역부족이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등장인물들의 긴 이름들과 부적절하고 불편한 번역 투의 대사는 배우들조차 감당하기 힘들어 하는 것처럼 보였고, 각 배우들의 제각각인 대사 톤은 앙상블을 방해한다. ‘마리’(김수안 역)의 대사는 외화의 더빙을 듣고 있는 듯했고, 끊임없이 제스츄어를 사용하는 ‘실린'(이동영 역)은 구연동화를 하는 듯했으며, 반복적으로 동일 억양을 사용하는 ‘조시마’ 신부(김은석 역)는 시종 어느 교회에서 설교를 듣는 듯 했다. 그러니 현대의 일상적 어투를 사용하는 ‘체호프’(이상홍 역)의 대사는 다른 배우들과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작가와 연출가는 왜 관객들로 하여금 이 불편한 번역 투의 대사들을 공연 내내 견뎌내라고 하는지 그 의도가 궁금하다. 배우들의 대사는 반복적으로 철학적 메시지를 담고 전달되는데 즉각적으로 이해되지 않으니 집중이 깨지고 지루해지며 때론 장면을 놓치기도 한다. 호흡이 긴 번역 투의 대사는 140분의 공연시간과 무관하지 않다. 또 연출가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는 장면이나 설정이 작품 곳곳에서 튀어나오니 궁금하기 짝이 없다. 멋진 그릇에 미완의 요리가 담겨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들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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