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들/ 이예은

“작품이 관객에게 쥐어 준 폭력이 갈 곳은 어디인가?”

– 연극 <손님들> 

 

이예은 (드라마투르그)

 

작 : 고연옥 

연출 : 김정 

관극 일시 : 2018/06/28(목)

공연 장소 : 국립극단 소극장판 

 

 

  연극은 한 아이의 시점으로 가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의 삶, 그 삶의 고통, 그리고 그 삶의 고독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아이의 시점에서 부모의 시점으로 옮아가기 시작하고 있는 나에게는 아이의 시점으로 제시된 세상 전체가 일인칭적인 동화의 대상이 아니라 저 아이를 바라보는 시점에서, 저 아이의 곁에 선 시점에서, 조금 크고 헐거운 바깥의 시점에서, 무언가로 어떻게든 덧입혀진 시점에서 보아진다. 부모의 입장이 된 후 달라진 점은 아이의 시점으로만 보아지던 존재와 세상이 단지 아이의 대척점에 있는 어른이나 부모의 시점으로 보아지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구원하는 추상적인 능력을 가진 또 다른 아이의 시점으로 보아진다는 사실이다. 저 아이가 기댈 수 있는 어떤 초자아적인 어른의 힘을 추상적으로 입은 내가, 어떻게 하면 실제로 저 아이를 구원할 수 있을까를 여전히 아이의 시점에서 고민하는 것이다. 

 

  어미에게서 버려지고 동네 아이들에게서 소외받는 고양이 ‘삼단지’, 학교 아이들에게서 놀림감이 되어 만신창이가 된 조각물 ‘오뎅’, 그 아이들 모두가 공포에 떠는 귀신 ‘동수’가 차례로 손님들로 등장하는데, 아이의 상상 속에서 친구가 된 이 인물들은 아이가 현실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지극히 소외된 존재들이다. 지극히 소외된 것들에게 지극한 친밀감을 느끼는 이 아이의 존재 모티프는 끔찍한 고독이다. 손님들은 아이의 상상 속에서 괴상하게 캐릭터라이징된 인물들인 만큼 비현실적이리만치 다성적으로 연극화된 캐릭터들로 등장한다. (특히 이수미 배우가 열연한 삼단지의 다성적 연극성이 압권이다.) 이 세 차례의 연극성에서 다시 한 번 김 정 연출의 기지를 느낀다. 손님들의 등장을 예고하는 프롤로그로 관객의 중간 입장을 시키는 연출에서부터 폭소를 끌어낸다. 이러한 종류의 코믹함이 이 연출이 앞으로도 어떠한 이야기를 풀어내든 발휘해낼 수 있는 그만의 유연한 강인함이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현실 속에서는 그토록 버림받은 손님들이 아이의 상상 속에서는 이토록 활기 넘치는 인물들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아이의 고독은 너무도 행복해지고 싶어하는 마음과 동일시된 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이리라. 상상 속의 손님들과 이미 죽은, 혹은 상상이나 기억 속에 있는 아이의 부모, 그리고 아이가 함께 손을 잡고 원무를 추는 장면은 그래서 몹시 두터운 연민을 촉발시킨다. 이 장면은 고독은 고독을 끌어안는다는 사실을 발견케 함과 동시에 우리 모두는 폭발적인 행복감과 폭발적인 불행감이 한 순간의 마음 안에 공존하던 시절을 산 적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게 한다. 우리가 아이였던 시절에는 극단의 불행감과 극단의 행복감이 같은 시점 안에 도사리고 있기도 했다. 그래서 고통스러움도 명랑의 가능성을 띠고 있었고 소스라치는 기쁨도 영원히 사라질 수 있는 슬픔으로 상상되기도 했다. 그래서 첫사랑을 나누던 그 시절 사랑은 유독 죽음과 함께 생각되었는지 모른다. 아이는 첫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한 여자 아이에게 ‘죽을 때 이름을 부르고 싶은 사람’이라고 고백을 하는데 이 대목에서도 그 첫 시절의 비장함을 떠올리게 된다. 고통이든 사랑이든, 강렬하게 느끼던 모든 감정과 생각들에는 죽음을 매달아 놓던 그 시절의 비장함에 대해서. 

 

이를테면 연극을 보면서 내내 이러한 식의 아이의 시점, 고통 속에서도 약간 당연하다는 듯 구원을 기다리며, 사랑 속에서도 슬픈 죽음을 상상하며 영원성을 기대하는 ‘이러한’ 식의 아이의 시점을 에둘러 껴안아 주고 싶었다. 우리 모두가 경험했고 또 여전히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이러한 아이의 시점을, 아이를 벗어나고 비켜간 시차를 빌미로 두텁게 껴안아 주고 싶었다. 그것은 아이에게 동화된 시점에서 어른을 반성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와 대척점에 선 부모의 시점에서 아이를 안타깝게 보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아이나 어른으로 구별되는 선상의 시점이 아니라 관찰의 시점, 발견의 시점, 사색의 시점, 철학의 시점, 예술의 시점, 연극의 시점, 구원의 시점, 기도의 시점 같은 것이다. 

 

  그런데 작품의 전반부에 고여 있던 이 두터운,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약하게나마 근원의 자유로운 선량함을 소망하던 이 상상력은 후반부로 가면서 오로지 포악함만 남은 현실로 눈을 돌린다. 손님들이 퇴장한 후 상상력이 거두어지고 오로지 아이의 시점 안에 가두어진 현실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상상 속에서 부유하던 모든 가능성들은 명백한 상처로, 오갈 곳 없는 고통으로, 그래서 필연적인 응징으로 폭로되고 설명되고 환원된다. 가해자의 폭력을 인내하게 하고 다시 폭력을 고발하는 피해자의 상처를 인내하게 하면서 가해자와 피해자, 폭력과 그에 대한 응징의 폭력을 이중으로 감내하게 하는 연극은 사회란 코너의 톱을 장식하는 참혹한 뉴스로 변모한다. 이제까지 작품이 관객에게 준 가능성, 우리 모두가 연결될 수 있었던 가능성, 고독의 가능성과 행복의 가능성, 그리고 그 둘 사이에서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며 방황하는 우리 모두의 보편적 가능성은 ‘사람이 저럴 수도 있구나’라는 평면화된 가능성으로 치환되기 위한 재료들이었던 것인가? 그 순간 성기고 자유로운 상상력과 공감대로 아이와 어른이 채 구분되지 않은 어떤 존재의 파장 안에 매료되어 있던 관객인 나는 참혹한 사건의 관찰자로, 혹은 평가자로, 혹은 연민이나 당혹스러운 공감을 하는 주체로서 재설정될 것을 강요당한다. 심지어 그 폭로와 설명은 부모 살해라는 너무도 끔찍한 현실 사건으로 착지해 버려서 이러한 담론을 무대 위에 올린 이상 작가와 연출자, 그리고 이 연극에 가담한 모든 주체들은 어떻게 이 담론을 감당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질문하며 급기야 나는 연극의 주도권을 창작자들에게로 돌려주었다. 그러나 정작 주도권을 부여잡은 작품은 어떠한 감당도 없이 어딘지 모를 곳으로 도피한다. 그 감당의 몫을 과연 관객에게 넘기고 도피한 것인지, 아니면 그 어디에도 맡기지 않고 그저 도피하고 만 것인지조차 알 수 없다. 

 

  이 작품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라는 배경 사실은 부모살해라는 사건이 무대 위에 오른 것을 정당화시켜 줄 수 없다. 사건이 무대 위에 올려진 순간 그것은 전적으로 무대 위 사건이며 작품 내에서 감당되어야 할 몫인 것이다. 이 작품을 보기 전 작품에 대한 개요를 읽었을 때 부모 살해라는 사건 모티프는 단지 작품의 추상적 맥락이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부모 살해와 이를 가능케 한 가정 폭력이라는 사건을 (프로그램북 책자의 김소연 평론가 표현대로) ‘참혹성이 아닌’ 것으로 놓고 이 작품을 언급하는 것은, 창작자의 입장에서나 수용자의 입장에서나 작품 자체에 대한 회피일 것이다. 이 작품에서 참혹성을 걷어내고 ‘인간의 안간힘’에만 주목하기 어려운 이유는 작품이 촉발시킨 위태로운 담론에 비해 그 담론을 꺼내 든 작품의 시선이 그것을 감당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올해 상반기에 유독 많이 상연된 <리처드 3세>에서 작품이 꺼내든 담론과 그 담론을 바라보는 작품의 시선을 떠올려 본다. 작품의 소재는 살해 행위였음에도 작품이 주목하는 것은 그 행위를 넘어선 것이었음을 말이다. 숱한 살해 행위와 살인을 감행하는 인간의 깊은 악을 보여주면서도 작품은 그 전체를 넘어선다. 작품이 다다른 곳은 살해 행위나 그 행위 이면의 살의를 넘어선 보편의 인간이다. 점층적으로 극악해지는 인간의 내면을 묘사하며 살해 행위가 극 안에 켜켜이 축적되지만, 그럴수록 작품은 오히려 살해 행위를 저지른 인간이 지닌 인간성, 그 내면으로 시선을 끊임없이 회귀시킨다. 이 작품은 그 반대이다. 먼저 아이의 상상력에 주목하며 인간 보편의 내면을 감각케 하다가 이 공감대를 평면적인 폭력을 보는 시선으로 환원 유도하면서 ‘인간이 인간을 죽이기까지 할 수도 있는 거구나’라는 발견을 하는 수순으로 관극을 이끈다. 이 수순으로 관극에 다다른 관객은 ‘그럼 결국 이 작품이 다다른 곳은 살인의 정당화인가?’ 라는 당황스러운 질문을 하기에 이르거나, ‘저런 폭력을 당했다면 부모를 살인할 수도 있겠구나’ 라는 당혹스러운 공감을 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질문이나 공감대가 도출된 순간 관객은 당황스러움이나 당혹스러움에 작품의 입장 표명을 기다리는데 그 순간 작품은 행방을 감춘다. 감추어진 작품의 행방을 찾기 위해 수미상관 식의 결말 장면에 주목해 볼 수 있는데 이 장면은 표면적인 순환구도로 열린 해석을 방기하는 듯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앞서 말한 당황스러움이나 당혹스러움이 이 작품의 취지임을 예상케 하기도 한다. 공감이 가능한 내면에서부터 진동하여 살해 행위라는 사건으로 동요되는 극의 진행이 끊임없이 다시금 반복될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참혹성’과 ‘인간의 안간힘’이라는 화두는 작품 안에서 분리하기 힘든 상태로 결합되어 있기에, 작품이 품고 있는 참혹한 사건 자체를 외면하면서 아이 내면의 인간성에 공감하고, 서사의 진실을 공감해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작품을 곱씹고 곱씹는 시간 역시 작품에 대한 공감과 작품이 야기한 참혹함 사이를 연결되지 않는 수미상관의 구도로 오가는 시간으로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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