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변홍례/ 이연심

<그때, 변홍례>

 

이연심(경기여자고등학교 교사)

 

작 : 어단비

    출: 윤시중

    체: 하땅세

공연일시: 2018.05.18. ~ 2018.05.27.

공연장소: 아트원시어터 3관

관극일시: 2018.5.27.(일) 15:00

 

 

“자고로 월급이란 참아서 버는 돈…

월급 값이 욕 값이라 여기며 자조하는 노동자의 숭고한 밥벌이, 

누가 그들을 비겁하다 할 수 있을까…”

 

4월 어느 날, 대한항공 ‘갑질’ 사태에  대한 종편의 뉴스 앵커 브리핑이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치밀어 오른다. 

 

어디 ‘물벼락’ 갑질 뿐이랴, ‘땅콩회항’, ‘매값구타’, ‘라면상무’ 등 욕설과 구타, 모욕적인 행동 등의 갑질 횡포는 무수히 많다. 뉴욕 타임즈는 ‘갑질(Gapjil)’을 ‘마치 봉건시대 영주처럼 경영진들이 직원들이나 하청업체에 대해 학대나 욕설을 하는 행동’으로 친절히 설명하며 홍보해 주었으니 전 세계가 아는 한국 문화의 치부가 된 셈이다. 갑질은 돈이면 무엇이든 안되는 것이 없다는 천박한 논리가 통용되는 이른바 ‘천민자본주의’가 현대 우리사회 재벌가의 머릿속에서 썩어 문드러지고 있다는 증거다. 

 

극단 <하땅세>의 <그때, 변홍례>는 제39회 서울연극제 공식 선정작으로 욕망을 가진 생명체가 만들어낸 지옥의 세계를 연극과 영화적 기법을 혼합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한 수작이다. 1931년 일제 강점기의 조선인 하녀 변홍례(일본어로 부르기 쉽게 ‘마리아’로 불리는 여자) 가 무참히 살해되고 확증이 있음에도 처벌받지 않은 ‘치정소설’같은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극단의 단원들이 연습을 시작하고 살인사건의 범인을 찾아가는 과정을 영화적으로 표현한다. 연극의 프레임 안에 영화적 기법이 극중극의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극과 영화가 절묘하게 만난다. 귀족층으로 구분되는 대교 사장과 그의 부인, 대교부인의 내연남 정상, 조선인 하층민으로 발버둥 치며 홍례를 사랑하는 청년 구일, 그리고 그 인물관계의 한가운데 서 있는 조선인 하녀 변홍례. 이들은 각기 각자의 탐욕과 욕망을 드러내며 점차 살인 사건의 정점을 향해 움직인다. 수사가 시작되고 어느 누구도 변홍례의 죽음에 대해 죄스러워하지 않는다. 변홍례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도덕적이지 않다. 모두 뻔뻔하다. 각자가 갖고 있는 뚜렷한 탐욕과 욕망은 변홍례의 욕망과 충돌하며 살인사건으로 결론지어진 것이니 모두 할 말이 있다는 것인가? 범인에 대한 괴투서가 날라들지만 끝내 진범을 찾지 못한 채 연극연습은 끝난다. 연출(윤시중)은 ‘사과’와 ‘그림속의 사과’ 사이에 존재하는 창작자의 욕망이 실재 사건을 얼마나 숨기고 변형시키는지, 사실을 자신이 원하는 이야기로 끌어들이는 태도에 대하여 질문을 한다. 창작자의 욕망이 사물의 진실을 꿰뚫고 예술이 되어 재탄생하듯 관객의 감상은 예술작품의 메시지를 내면화하며 재탄생한다. ‘부산 마리아 참살’ 사건과 ‘그때 변홍례’사이에 존재하는 연출자 윤시중의 욕망은 무엇이었을까? 일제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을 뿐 현재 드러나는 낯 뜨거운 수많은 갑질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면 성공이다. 작품은 ‘욕망이 만들어낸 지옥도’라기 보다는 ‘불평등이 만들어낸 최악의 갑질 비극’이다. 권력과 만난 천민자본주의가 인권(人權)위에 군림하면서 인간과 인간의 노동을 재(財)화하고 급기야 돈으로 보상하면 무엇을 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만든다. 갑질은 돈과 권력이 있는 곳에만 적용되는 행태가 아니다. 자신있게 욕망을 드러내고 욕망을 채운 사람을 부러워하는 태도는 채운 자에게 권력을 부여하고 이러한 불평등은 또 다른 형태의 갑질을 초래한다. 권력이 있는 곳에 갑질이 있기 마련이니 돈이 권력인 것처럼, 자리가 권력이고 미모가 권력이며 성적이 권력이 된다. 권력관계가 형성된 모든 곳에 갑질이 도사리고 있다. 평등을 열망하는 변홍례의 울부짖음은 미생(未生)시대를 사는 수많은 2030들의 하소연과 같다. 근대 자본주의와 산업화의 과정에서 인간소외현상을 다룬 <모던 타임즈>의 챨리 채플린이 연상되는 영화적 기법은 어쩌면 연출의 당연한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작품은 극중극의 형식으로 극적 상상력을 동원하기에 충분한 장치들을 곳곳에 배치하고 있으며 겹겹이 쌓여가는 메타기법은 연출의 기발한 아이디어에 감탄을 자아낸다. 연극은 변사를 등장시켜 이야기의 골격을 설명하고 무성영화시절의 후시 녹음 방법을 이용하여 대사와 동작을 각기 다른 배우가 나눠서 표현하고 있으며 채플린을 연상시키는 분장과 움직임은 보는 즐거움을 극대화한다. 빈곤과 억압, 착취 등 현실의 비극을 희극으로 승화시키며 웃음 이상의 감동을 전달하고 있는 채플린 코드는 조선인 살인사건의 비극을 희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이 작품과 잘 맞아 떨어진다. 평범한 가정집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스탠드 조명은 마치 영화감독의 시선을 따라가듯 화면의 확대효과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등장인물의 욕망을 표현하는 오브제가 되기도 한다. 퇴장하지 않는 배우가 직접 만들어내는 아날로그적 음향은 듣는 즐거움 뿐 아니라 보는 즐거움을 선사하며 신기하기까지 하다. 무대 배경으로 사용되는 프로젝트는 무한한 공간의 확장가능성을 여실히 보여주며 때론 긴장감마저 만들어 낸다. 배우들은 연기를 할뿐만 아니라 음향도 만들고 프로젝터도 조정한다. 오랜 연습이 담보되지 않으면 정확한 타이밍을 맞추기 힘들만한 장면들이 속속 등장하니 관객은 시종 즐거울 수밖에 없다. 고른 연기력을 갖춘 배우들이 치밀하고 충분한 연습과정을 거쳐 만들어 낸 작품은 역시 <하땅세>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연극이 진행되는 어느 순간 지루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장면 장면을 분리하여 보면 나무랄 데 없는 연기와 표현들이 가득하나 작품 전체의 완성도를 생각한다면 만족스럽지 못하다. 끊임없이 빵빵 터지는 기발한 아이디어는 처음부터 작품이 끝날 때까지 동일한 긴장감과 무게감을 만들어내고 급기야 작품의 리듬감을 상실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관객에게는 연극의 장면이 전달하는 메시지와 감정을 소화하고 느낄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다. 배우들이 쉼 없이 바쁘다고 해서 관객의 감성도 쉼이 없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강화할 장면과 약화할 장면을 선별하고 집중하면 작품 전체의 리듬감과 함께 창작자의 욕망, 또는 연출의 의도가 더욱 선명해지지 않을까 싶다. 

 

 학교에서 아이들과 시도해 볼만한 ‘놀이’ 같은 연극 양식을 생각하고 있다면 <하땅세>의 연극을 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참신한 아이디어만 있다면 제작비를 걱정하지 않고 즐겁게 연극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변홍례>가 이제 공연 과정을 거쳤으니 소소한 부분들이 보완되고 더욱 탄탄해져서 <세상에서 제일 작은 개구리 왕자>나 <붓바람>과 같이 <하땅세>의 대표 레퍼토리가 되기를 기대한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