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과 이론] 심청가/ 이진주

* 이 리뷰는 「공연과 이론」(2018 여름호)에 게재된 원고를 재수록한 것입니다.

 

판소리가 주인공, 그래서 더 신선한 창극

 

이진주(창극연구자)

 

 

창극은 판소리와 얼마나 가까울까, 혹은 얼마나 멀까? 창극이 판소리에서 분화한 것은 분명하나, 위 물음에 대한 답은 개개인이 창극을 관극한 경험치에 따라 모두 다를 것이다. 그만큼 창극은 전통을 품고 있으되 현재진행형인 동시대의 공연물이다. 게다가 2000년대 이후 국립창극단이 선보인 일련의 작품들은 창극의 스펙트럼을 더욱 넓혀놓았다. 그렇다면 손진책이 연출하고 안숙선이 작창을 맡은 2018년의 창극 <심청가>는 그 스펙트럼에서 어디쯤 위치하게 될까? 손진책은 한국적인 연극 기법이 무엇인지를 계속 고민해온 연출가이고, 안숙선은 판소리 명창 출신으로 다양한 작품의 작창을 해왔지만 한편으로 과거(20세기 초 원각사 시절)의 창극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다. 이런 두 사람이 창극을 만들었다면 당연히 전통 판소리에 가까운 창극을 보여줄 거라는 기대를 가지게 된다.

 

이러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연출가는 “소리의 맛과 멋을 최대한 살리고자 연극중심보다는 소리중심으로 옮기고 전통적 판놀음 위주의 우리만의 연극양식을 담백하게 보여”준다고 연출 의도를 밝혔다.(프로그램 북 중에서) 음악극에서 음악이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극보다 음악이 중심이 된다는 것을 어떤 의미일까? 참하고 야무진 심청, 그 자체인 것만 같은 민은경, 젊은 나이에도 원숙한 창과 연기를 보여준 유태평양, 존재만으로도 무대를 완전히 장악하는 도창의 안숙선과 유수정, 배우의 인간적 매력이 그대로 느껴지는 김금미 등 배우들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이번 창극의 주인공은 ‘소리’였다.

 

프레스콜 인터뷰에서 손진책 연출은 “좀 지루하게 느끼실 수도 있겠지만, 판소리에서 좋은 대목은 절대 안 빼먹고 다 넣겠다는 고집스런 마음으로 연출했다.”라고 선언했다. 심지어 심봉사 눈 뜨는 것보다 관객들이 판소리 매력에 눈 뜨길 바란다고도 했다.(“손진책 ‘소리의 맛에 푹 빠지시길 바란다’ 국립창극단 ‘심청가’ 프레스콜 현장”, <<문화뉴스>>, 2018. 4. 24) 하지만 관객이 느낄 지루함보다 소리가 더 중요하다고 한다면, 확실히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창극 관객은 판소리의 매력을 ‘배우러’ 창극 공연에 가는 것이 아니라 창극을 ‘즐기러’ 간다. 물론 창극을 보다가 판소리가 좋아질 수도 있지만, 판소리 알리려는 목적으로 창극을 이용하는 것은 창극 관객을 무시하는 엘리트 의식일 수도 있다. 물론 연출의 말은 그만큼 소리를 중요하게 취급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임을 안다. 더구나 그간 국립창극단에서 김성녀 예술감독이 재임하는 동안 만들어진 창극들은 판소리에서 벗어나려는 실험이 더욱 돋보이는 작품들이었고, 창극이 판소리에서 지나치게 멀어지는 데 대한 우려를 나타내는 목소리들이 있었다. 이번 창극 <심청가>는 그간 국립창극단이 판소리 다섯 바탕을 소홀히 한다거나 지나치게 파격만을 추구한다는 지적을 해왔던 이들을 어느 정도 안심시켰을 것이다.

 

판소리 본연의 멋과 맛을 가장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며 만든 이번 창극은, 말 그대로 판소리 <심청가>의 눈이라고 할 수 있는 “시비 따라 (장승상댁에) 가는 대목”에서부터 “심봉사 물에 빠지는 대목”과 “범피중류” 그리고 “심청이가 물에 빠진 다음 선인들이 돌아가는 대목”까지 주요한 눈대목이 꽉 들어차 있었다. 심청이 인당수에 뛰어든 후 1부가 끝나고 중간 휴식 이후 2부에서는, 심청이 환생한 이후의 소리들이 많이 탈락되었으나 “심봉사 눈 뜨는 대목”은 거의 그대로 살렸다. 중요한 대목을 거의 해치지 않고 이어 부를 수 있었던 것은 무대 위에 계속 현전하고 있는 도창 때문이었다. 도창은 등장인물이 극중 상황을 재현하는 동안에도 무대 위에 남아 있으면서, 인물들의 대화 사이에 있는 서술체의 소리를 마치 등장인물과 대화를 주고받듯이 전체 음악이 이어지도록 연결해 주었다. 도창과 인물이 이중창으로 소리하다가 도창이 빠지면서 서사 장면에서 극중 장면으로 넘어가는 소리 배치도 흥미로웠다. 이것은 마치 도창의 목소리와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일치시킴으로써, 지금 눈앞에 재현되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목소리의 주인이 도창 자신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처럼 느껴졌다.

 

소리에 맞추다보니, 드라마의 측면에서는 없어도 무방하거나 없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되는 장면이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가령 1부 마지막에서 심청이가 물에 빠진 것으로 끝내지 않고 뱃사람들의 소리가 더 이어지는 경우이다. ‘내고 달고 맺고 푸는’ 판소리에서는 심청이가 물에 빠진 다음 진양조로 풀어가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구조를 창극으로 그대로 가져오다보니, 심청이 물에 빠지기까지 자진모리로 고조된 감정을 그 자리에서 풀어버림으로써 한껏 고조된 긴장의 여운을 가지고 2부를 맞는 기대감을 오히려 반감시켰다. 관객들은 심청이 물에 빠지는 소리를 듣고는 극이 마무리되는 줄 알고 박수를 치다가 소리가 계속 이어지니까 머쓱해하기도 했다.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드라마 구성을 보완해준 것은, 단순하면서도 변화무쌍한 무대구성과 합창을 이용한 소리의 다이내믹이었다. 창극 <심청가>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무대장치와 소품이었다. 지극히 간단한 무대와 소품이 최대치로 활용되며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시켰다. 소리를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을 치워버린 무대 위에는, 양쪽으로 각각 3개씩 배치된 6개의 윙과 가운데 2개의 평상 그리고 소반 같기도 하고 낮은 의자 같기도 한 박스들이 놓인 것이 전부였다. 이 단순한 장치들이 다양한 조합을 이루어 수많은 장면들을 만들어내었다. 곽씨 부인이 쓰고 있던 장옷이 어느새 보에 싸인 갓난아기로 변하고, 배우들이 손에 쥔 부채는 인당수 장면에서 노였다가 이내 바다의 물결이 된다. 양쪽에 3개씩 늘어선 윙은 배우들이 대기하는 포켓의 역할을 하다가 무대장치로서 담장이 되기도 하고 여염집 대문이 되어 빼꼼히 열리기도 하였다. 소반 모양의 박스들은 의자로 쓰이다가 소반이 되기도 하고 “심봉사 물에 빠지는 대목”에서는 개울에 놓인 징검다리가 되는 등 끝도 없이 의미를 달리 하였다.

 

이 무대장치와 소품을 직접 움직이는 배우들은, 극 중에서 코러스로 기능하면서 무대 위에 그냥 노출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고, 그렇지 않더라도 윙 뒤에서 절반만 몸을 숨겼다가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막이 열리자마자 한꺼번에 무대 위에 등장한 이들은, 처음에는 도창의 소리를 들으러 온 청중처럼 보였는데, 이내 도화동의 동네 사람들이 되었다가 “시비 따라 가는 대목”에서는 우아하고 품위 있는 사설과 음악에 맞추어 직접 장승상 댁의 경치가 되기도 하고 또 소리를 통해 배경을 언어로 지시하기도 하였다. 판소리에서는 불가능한 것이 바로 음량에 의한 다이내믹이다. 판소리는 1인극인데다가 창자가 일부러 음량을 조절해서 소리를 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 창극에서는 독창과 합창이 나눠지면서 자연스럽게 다이내믹이 생긴다. 창극 <심청가>의 코러스들은 화려한 기교나 화성이 아니더라도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충분히 힘 있고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판소리 창은 합창하기에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합창이 튀지 않고 자연스럽게 극에 녹아들어 있어서 작창과 음악감독의 세심한 음악성을 엿볼 수 있었다. 또한 전체적으로 품위 있고 군더더기 없이 안정된 합창 소리는 국립창극단 배우들의 소리 기량이 매우 높은 수준에 다다랐음을 보여주었다. 창극에서 합창은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지만, 특히 이 작품에서 코러스가 돋보인 이유는 소리중심의 창극 안에서 이들이 부차적 인물이 아닌 다양한 소리를 만들어내는 소리들 그 자체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 작품은 최근 창극 중에서는 반주음악도 가장 간소화되어서, 서양악기나 전자악기는 사용되지 않고 전통 삼현육각의 악기들만 위쪽 무대의 가림막 뒤에서 연주되었다. 게다가 삼현육각의 수성반주보다는 북으로만 반주하는 경우가 더 많았는데, 북 치는 고수는 무대 위에 드러나 보이도록 자리하고 앉았다. 고수는 무대 오른편 아래쪽(관객 기준으로 왼편 객석 가까이)에 앉아서 배우들과 가까이 호흡을 맞추었다. 판소리처럼 소리에 여백을 두면서 북반주 위주로 소리하는데다 고수의 추임새가 바로 관객의 눈앞에서 일어나기 때문이었는지, 다른 창극에 비해서 관객석에서 추임새가 더 빈번하게 터져 나왔으며 추임새를 하지 않는 관객들도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창극 관객층이 젊어지면서 뮤지컬 등에 익숙한 관객들이 창극에서 추임새하는 것을 불편해하거나 불필요하다고 여기는 반응을 SNS 상에서 종종 보았는데, 이번 <심청가>에서는 오히려 젊은 관객들이 추임새를 재미있어 하고 즐기는 눈치였다.

 

그러나 북반주의 단점도 있었다. 혼자서 소리할 때는 본인에게 맞는 청으로 소리하면 되지만 독창에서 합창으로 바뀔 때에는 하나의 청에 맞춰야 하기 때문에 선율악기가 첫 음을 짚어주어야 했는데, 이 소리는 음악이 아니라 단순히 기능적인 소리라서 어색했다. 또한 등장인물이 혼자가 소리할 때 청이 너무 자주 바뀌는 것도 귀에 거슬렸다. 선율악기로 이루어진 반주음악이 계속 따라붙는 창극의 경우에는 그런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고, 판소리에서는 소리 자체가 길고 혼자가 부르기 때문에 중간에 청이 바뀌어도 그러려니 생각하고 넘어가다보면 익숙해진다. 그런데 창극 <심청가>에서는 북반주만으로 소리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럴 때 소릿길이 묘하게 바뀌는 수가 있었다. 처음에는 애초에 선율변화가 많은 긴 노래를 짧게 다시 짜면서 길바꿈이 어색하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도창 유수정은 많은 분량의 소리를 할 때도 본청이 변하는 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일부 배우들의 음감이 좋지 못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심봉사 역의 유태평양이 소리할 때 그런 현상이 많았던 것을 생각해보면, 남성이 여성의 청으로 노래하기 힘들어서 청이 자꾸 흔들린 것일 수도 있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소리에 치중한 작품치고는 고질적인 ‘청의 문제’가 극복되지 못한 것은 매우 아쉬운 부분이다. 우리 전통음악에서 청(淸)은 서양음악의 조(key)와 비슷하게 쓰이는 음악용어다. 음악을 연주할 때는 각 악기와 가수의 음역대를 고려하여 본청(서양 음악의 으뜸음에 해당)을 선택해야 한다. 사람이 소리낼 수 있는 음역대는 저마다 다른데, 특히 남성과 여성은 음역대의 차이가 크다. 창극에서 청의 문제는, 한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노래하던 판소리의 음악을 창극으로 바꾸어 여러 사람이, 특히 남창과 여창이 함께 노래할 때 발생한다. 본청을 남성이 부르던 대로 맞출 경우 여성은 너무 낮아서 소리하기 힘들고 여성에게 맞추면 남성은 너무 높아서 소리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소리중심의 창극이라고는 하나 소리가 사설을 포함하고 있는 한, 극의 내용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샛별 같은 눈을 감고… 뱃전으로 우루루루루… 떴다 물에 풍.” 창극 <심청가> 프로그램 북의 표지는 앞에 인용한 사설과 함께 물속에 수직으로 포말이 이는 이미지로 채워져 있다.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는 찰나를 문자와 그림으로 디자인한 것이다. 이 대목은 심청의 이야기에서 가장 감정이 고조되는 부분이며 음악적으로도 매우 잘 짜인 눈대목으로 꼽힌다. 그러나 아버지의 눈을 띄우기 위해서 자식이 목숨을 버리는 이야기는, (마지막 장면에서 모든 맹인이 눈을 뜨는 기적 이상으로) 현재 동시대를 살아가는 관객들에게 공감을 주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심청과 심봉사는 밥을 빌러 다녀야 할 정도로 지독히 가난하지만, 그래도 이웃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기 때문에 굶어죽을 정도는 아니다. 앞날이 창창한 15세 청년이 몸을 팔아야 할 정도로 비참한 지경은 아닌 것이다. 더구나 심청은 공양미 300석을 대신 내주겠다는 장승상댁의 호의마저도 물리치고 부득불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는다.

 

심청이 아버지와 이별하는 장면이나 심청이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장면에서 애통해하면서 훌쩍이는 관객들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이별이나 죽음에 대한 감상적인 반응일 뿐, 심청에 대한 공감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관객들이 심청의 행동에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옛날에 저런 이야기가 있었지”라는 반응을 보이는 데 그친다면, 따라서 드라마로서 심청이 지금・여기의 연극성은 박탈된 조선 시대 이야기 속 인물일 뿐이라면, 2018년에 창극 <심청가>가 공연되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단순히 판소리 전승 5가를 창극으로 만듦으로써 창극의 정통성을 재확인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 창극 <심청가>를 통해서 창극이 판소리에서 나왔다는 것, 그 이상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판소리 <심청가>나 고소설 <심청전>이 대중적 인기를 구가했던 18-9세기 조선에서, 부모를 위해 목숨을 바치며 ‘효’를 과시하던 자식들은 심청이 말고도 많았다. 더구나 양민들이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남의 노비로 들어가거나 아내나 자식을 파는 일이 종종 있었다는 기록은 <<고려사>>를 비롯한 역사서에서도 발견된다. 또한 일제에 의해 땅을 빼앗긴 조선의 농민들이 가난을 면하기 위해서 자식을 팔거나 그 딸들이 스스로 기생이 되는 길을 택하는 일이 많았던 일제 강점기에도 심청 이야기는 대중에게 큰 공감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심지어 산업화가 한창 진행 중이던 1970년대, 아직 어린 자식을 남의 집 식모로 보내거나 공장 노동자로 내몰던 시대에도 심청의 이야기는 그럭저럭 받아들여질 만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과거에 매신(賣身)은 선정성과 함께 어느 정도의 현실성을 가지고 있던 셈이다. 그러나 자식을 내다 팔정도로 혹은 자신의 몸을 팔아야 할 정도의 가난이 흔하지 않게 된 2000년대에 매신은 관객들에게 선정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그저 옛날이야기일 뿐이다.

 

손진책은 물론 이 점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이제까지 많이 연출해 온 마당놀이에서는 고전을 현대적 감각으로 패러디하는 것이 주요 재미이기 때문에, 마당놀이의 심청에게는 자신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항변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 바로 얼마 전에도 공연한 마당놀이 <심청이 온다>에서 심청은 철없는 아버지를 부양하기 위해 밤낮으로 아르바이트에 매진하는 모습으로 등장하며 자신이 인당수에 뛰어든 것은 효심이 아니라 ‘현실도피적 자살행위’였다고 하거나 “온몸을 던져 비정한 사회를 고발하기 위해 인당수에 뛰어 들었다“며 자신의 죽음이 사회적 타살이라 외친다. 효녀 심청을 이렇게 비틀기 하는 것은 관객에게 심청의 죽음을 납득시키고, 그 죽음이 지금 현대 사회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음을 더 잘 드러나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공감을 얻기 어려운 서사를 보완할 대책이 창극 <심청가>에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창극 <심청가>는 음악극이고, 음악극에서는 흔히 허술한 드라마를 크게 문제 삼지 않고 음악으로 보완한다. 음악극은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서사를 음악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하며, 관객들도 음악극의 이러한 관습을 용인한다. 이 작품은 판소리 음악을 통해서 이계(異界)의 개입을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강조한다. 해설자인 도창을 제외한 등장인물 중에서 무대가 열리고 제일 처음 입을 여는 것은 심봉사나 곽씨 부인이 아니라 선녀다. 선녀는 심학규와 곽씨 부인 내외의 꿈(태몽)에 등장하여 자신이 서왕모의 딸인데 죄를 지어 인간세계로 내쳐져 심학규 내외를 찾아왔다고 노래한다. 이 선녀가 바로 심청의 전생이다. “범피중류”의 ‘혼령대목’ 역시 생전에 유교적 도덕관에 충실했던 인물이 자신들의 한을 토로하며 심청의 효를 칭찬하는 대목으로서, 이계의 개입을 보여준다. 심청은 평범한 양민의 딸이 아니라 선녀의 화신이며, 심청의 죽음은 단순히 가난하고 앞 못 보는 아버지에게 효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고난에 처한 모든 이들의 눈을 띄우기 위한 영웅의 준비 과정인 것이다. 이렇듯 구원자로서 심청은 인당수에 빠졌다가 부활한 이후 몸도 마음도 다른 사람이기에, 창극 <심청가>에서 어린 심청은 민은경이, 황후심청은 이소연이 분리해서 맡았다. 그러나 이번 공연에서, 영웅으로서 심청을 말해주는 이런 지점들은 사설이 한자어로 되어 있어 현대 관객에게 사설이 지닌 환상적인 분위기를 전달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창극 <심청가>는 음악뿐 아니라 사설도 전통 판소리를 그대로 살리려고 했기 때문이다.

 

아쉬운 점을 몇 가지 늘어놓기는 했지만, 사실 창극과 판소리에 애정을 가진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이런 멋진 작품을 볼 수 있어서 감사했다. 또한 무엇보다 창극이 다양해져서 매우 기쁘다. 소리에 집중한 창극은 과거에 주로 해왔던 창극에 가까운 것이지만, 그간 실험적인 창극이 있었기에 판소리를 강조한 이런 담박한 창극도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질 수 있었다. 판소리에도 동편제・서편제・중고제 같은 갈래가 있고, 뮤지컬에도 엑스트라버간자부터 북 뮤지컬, 콘셉트 뮤지컬 등의 다양한 양식이 있으며, 오페라에도 오페라 부파, 오페라 세리아, 그랜드 오페라 등의 하위 장르가 있듯이, 창극도 양식을 특정할 것이 아니라 창극에 다양한 하위 장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편이 창극이라는 장르를 풍부하게 만들고 오래 지속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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