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과 이론] 엘렉트라/ 전지니

* 이 리뷰는 「공연과 이론」(2018 여름호)에 게재된 원고를 재수록한 것입니다.

 

테러의 시대로 소환된 모호한 비극

 

전지니(연극평론가)

 

 

 

<엘렉트라>의 현대적 변주와 해석의 확장

 

아버지의 딸로서 어머니를 살해하는 신화 속 ‘엘렉트라’는 그리스 비극의 3대 작가 모두에게 영감을 주었고, 이들은 모두 그녀를 소재로 한 희곡을 썼다. 다만 작가들이 주로 활동했던 시기와 각자 처한 위치가 달랐던 만큼, 세 작가가 형상화한 엘렉트라의 이미지는 차이가 있다. 군인이자 극작가로 여생을 마쳤던 아이스킬로스가 그려낸 엘렉트라는 복수의 확신에 가득 차 있는 모습으로 등장해 동생에게 복수를 종용한다. 반면 전쟁에 대해 회의적이었고 여성의 심리를 그려내는데 탁월했던 유리피데스의 엘렉트라는 일상에 지쳐있고, 어머니의 처형을 앞에 두고 갈등하는 현실적 인물이다. <레이디 맥베스>, <배장화 배홍련>, <고양이 늪> 등 한태숙 연출이 고전을 비틀어 재해석하고 특히 여성의 심리적 복잡성을 그려내는 데 탁월한 점을 감안하면, 세 작가 중 연출가와 가장 어울려 보이는 것은 유리피데스의 비극이다. 그러나 한태숙의 선택은 소포클레스의 <엘렉트라>였다.

 

연극의 보도 자료는 한태숙이 소포클레스의 ‘3대 비극’ 중 마지막 작품인 <엘렉트라>를 무대에 올린다는 점을 강조했다. 남아있는 소포클레스의 비극 7편 중 3대 비극의 기준이 무엇인지 궁금증이 들지만, 연출가 2010년 이후 국립극단 제작으로 <오이디푸스>(2011), <안티고네>(2013)를 무대에 올렸던 것을 감안하면, 상대적으로 잘 알려진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현대화하는 마지막 작업으로서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소포클레스의 <엘렉트라>의 특징은 다른 두 작품과 달리 여동생 크리소테미스가 등장해 엘렉트라와 논쟁을 벌인다는 점이며, 이어 남편 살해를 정당화하려는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이를 반박하는 엘렉트라 사이의 말씨름이 이어진다. 곧 작가는 여성들의 논쟁을 통해 관객에게 정의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연출가가 소포클레스의 이야기에 매혹된 것은 여성 인물 간의 논쟁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아가멤논 일가의 비극을 통해 촉발시킨 정의에 대한 논쟁은, 2018년 시점에서 개인의 정의가 과연 집단을 유용하게 할 수 있는 것이냐는 질문으로 대체된다. 각색을 맡은 고연옥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고전의 질문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여성성과 모성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이를 위해 신화 속의 무대는 전쟁과 테러가 난무하는 이국의 게릴라군 집결지로 옮겨졌고, 이슬람 원리주의자를 연상시키는 엘렉트라는 반군 전사로 변모했다. LG아트센터의 거대한 무대는 반군의 벙커로 구현됐고, 비극에 응당 등장해야 할 코러스를 대신하는 것은 아가멤논의 무덤에서 엘렉트라를 만나 그녀를 따르게 된 게릴라 전사들이다. 이외에도 공연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가 현대화됐다. 음향효과는 소위 액션 영화를 연상케 하며, 신을 입에 올리지만, 인물의 대사와 복장은 지극히 현대적이다. 그렇게 비극은 테러가 난무하는 작금의 상황으로 호출된다.

 

 

공허한 무대와 각인되지 않는 논쟁

 

LG아트센터로 옮겨진 무대는 한태숙의 <오이디푸스>, <안티고네>와 비교할 때 더욱 확장됐고, 극장의 깊고 넓은 무대를 어떻게 채워나갈 것인지에 대해 연출과 무대미술의 고민이 상당했으리라 보인다. 무대에 등장하는 배우는 아가멤논 일가와 게릴라군을 포함해 열 명 남짓이다. 무대는 게릴라들이 진입하고 퇴장하는 2층과 클리타임네스트라가 갇혀있는 지하 공간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일전의 <안티고네>와 마찬가지로 경사진 무대가 인물들이 처한 상황의 위태로움을 강조한다. 그런데 깊은 벙커를 형상화한 경사진 무대는 인물들의 동선과 관련해 충분히 활용되지 못한 느낌이다. 신전 아래 지어진 지하 벙커의 황량함과 엘렉트라의 고독함을 보여주기 위함이라지만, 철근구조물과 돌로 꾸며진 무대는 인물들이 장악하기에 너무 크게 느껴진다. <엘렉트라>의 경우 이전의 두 작품과 달리 국립극단이 제작을 담당하지 않은 만큼, 국립극단 소속 배우들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찾아보기 어렵다. 무대가 공허하게 느껴진 것은 상대적으로 배우들의 몸부림이 미약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알려진 것처럼 엘렉트라와 클리타임네스트라는 각각 무대와 브라운관을 오가며 활약해 온 스타 장영남과 서이숙이 맡았다. 이에 더해서 예수정이 게릴라의 일원 중 한 명을, 박완규가 그리 비중이 크지 않은 아이기스토스를 담당하는 등 연극계를 대표하는 배우들이 다수 출연했다. 그런데 짧은 머리를 하고 남성성을 강조하는 엘렉트라는 일전에 김호정이 연기했던 안티고네와 겹쳐 보인다. 과거 한태숙이 연출했던 <안티고네>에서 안티고네는 지극히 남성적인 외형으로 등장해 크레온과 가족법과 국법의 대립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였다. 그리고 전사의 형상으로 등장해 어머니와 정의에 대해 논쟁하는 장영남의 모습은 과거의 김호정을 연상시킨다. 인물 간의 유사성은 역시 경사진 무대를 활용해 아슬아슬함을 강조했던 <안티고네>의 연출 방식과 겹쳐진다는 점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곧 <엘렉트라>의 기시감은 <안티고네>의 흔적에서 비롯된다. 물론 소포클레스의 <엘렉트라>에서 벌어지는 자매간의 논쟁은 작가의 다른 희곡 <안티고네>를 연상케 하는 부분이 있다. 다만 주디스 버틀러가 저서 안티고네의 주장을 통해 친족의 일그러짐을 대변하고 모든 젠더체계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안티고네의 불순함과 모호한 위치를 읽어냈다면, 남성성만을 드러내는 한태숙의 안티고네는 인물의 다양한 해석 여지를 축소시킨 감이 있었다. 그리고 이번 공연에서 재창조된 엘렉트라 역시 일전의 안티고네의 남성화된 이미지를 반복한다.

 

연극은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과 함께 신과 인간의 대립, 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질문 등 다양한 화두를 제시한다. 그런데 80분 남짓한 공연 시간 안에 이 모든 문제를 다루기에는 벅차 보인다. 각각 신과 인간의 질서를 대변하는 어머니와 딸이 정의의 문제를 둘러싸고 서로를 저주하며 날을 세우고, 이에 더해 바느질하는 여동생과 총을 든 언니가 대비된다. 그리고 클리타임네스트라와 크리소테미스는 엘렉트라에게 너의 성적 정체성은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한다. 원작에서 엘렉트라가 결혼하지 않은 것으로 설정되는 반면, 이 작품 속에서 어머니는 딸이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것이라며 빈정거린다. 또한 원작과는 달리, 복수의 숙명을 거부하며 도망 다녔던 오레스테스의 한탄을 통해 자유를 억누르는 운명의 문제가 드러나고, 극 말미에 이르면 아가멤논 일가가 모두 사망한 자리에 방독면을 쓴 이들이 나타나 무대를 점령한다. 비극의 설정을 수용하면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고자 했던 연극은, 이 지점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불분명해진다. 홍보자료에서 강조한 ‘정의의 상대성’이라는 화두를 가지고, 엘렉트라 자매가 아이기스토스가 자행한 성폭력의 피해자였다는 설정까지 포괄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물론 한태숙의 전작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강렬한 이미지는 여전히 존재한다. 무대 후면에서 붉은 조명 아래 등장하는 아가멤논의 망령은 거대한 염소 가면을 쓰고 있다. 이를 통해 딸을 제물로 바칠 정도로 포악한 왕이었던 그 역시 폭력과 투쟁이 난무하는 유혈 사태, 곧 오염된 세계 속에서 희생양이 되었음을 암시된다. 결과적으로 그의 자식들 모두 권력 투쟁 과정에서 희생양이 되고, 무대에 난입한 방독면을 쓴 무리는 비극적 역사가 반복될 것임을 보여준다. 이외에 무대의 철근 구조물을 쳐서 총소리를 내거나, 결말부에서 벙커가 무너지는 장면을 무대 위에서 흩뿌려지는 모래로 표현하는 것 등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모호한 욕망과 불분명한 주제의식

 

실상 이 공연에서 가장 모호한 인물은 엘렉트라다. 어머니를 증오하지만 살해할 명분을 얻지 못한 채 오레스테스를 기다리는 엘렉트라는, 끝까지 본인이 추구하는 정의의 확신을 얻지 못한다. 게다가 그녀는 민간인까지 볼모로 잡았다는 점에서 동료들의 신의까지 잃어버린다. 각색을 맡은 고연옥은 선과 악의 경계에 있으면서 개인의 복수를 위해 타인을 파국으로 몰아넣는 인물의 혼란스러움과 다각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고전을 현대화하면서 정의에 대한 재고와 여성성에 대한 질문으로 주제가 이분화된 상황에서, 행동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소리만 내지르는 엘렉트라의 행동은 정의에 대한 논쟁을 촉발하기에 미약하다. 어머니는 신에 기대어 있고 딸은 신을 부정하지만, 딸이 어머니와 대립하는 과정 역시 본격적인 ‘신에 대한 저항’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인물 간의 팽팽한 대립각이 서지 않는 상황 속에서 ‘논쟁극’으로서 가진 묘미는 사라진다.

 

모호하기는 엘렉트라의 동생 크리소테미스 역시 마찬가지다. 초반부 크리소테미스는 원작에서처럼 복수에 눈이 먼 엘렉트라에게 현실적인 조언을 일삼으며 대립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런데 재해석이 가미된, 생생하게 재현된 성폭력 장면 이후 크리소테미스는 아이기스토스를 벙커로 유인해 남매들과 함께 조롱하고 고문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크리소테미스의 욕망 역시 모호해진다. 애초 현실적인 조언을 일삼고 언니로부터 거리를 두었던 크리소테미스의 입장이 중반 이후 급변하면서, 정작 그녀가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도 불분명해진다.

 

엘렉트라 남매와 달리 상대적으로 성격이 선명하게 구축된 것은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이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일관되게 신의 의지를 빌려 남편 살해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여자가 아닌’ 딸을 조롱하기도 한다. 아이기스토스 역시 아가멤논이라는 괴물과 싸우기 위해 더 극악한 괴물이 되었으며, 자매를 성적으로 학대한 폭군이라는 점에서 권력의 추악한 면모를 체현한다. 이 과정에서 안타고니스트를 연기한 배우들의 캐릭터가 선명해지고, 연기 면에서도 클리타임네스트라를 맡은 서이숙이 엘렉트라를 연기한 장영남을 압도한다는 인상을 준다.

 

의도한 것일지언정, 무대로 돌아온 장영남의 엘렉트라는 생경하다. 관람 전 장영남이 아버지의 유령과 함께 사는 엘렉트라를 연기한다는 것은 충분히 기대감을 갖게 만들었다. 그런데 극 중 엘렉트라는 저항군의 느낌을 주기에는 너무 연약해 보이고, 그녀가 구현하는 정의의 실체가 불분명한 상황 속에서 이어지는 논쟁은 힘을 얻지 못한다. 게다가 장영남은 다른 공연에서와 달리 시종일관 경직되어 보인다. 지하에 갇힌 것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서이숙이 연기한 클리타임네스트라가 무대 전체를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면, 장영남은 넓은 무대 안에서 휘청거리며 격앙된 목소리로 복수의 필연성만을 역설한다. 이 같은 결과가 배우 개인의 캐릭터 파악의 문제로는 보이지 않는다. 연출과 각색자, 그리고 배우 사이에서 인물의 전사(前史)와 성격, 지향점 등에 대한 논의가 더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태숙은 인터뷰에서 비극이 우리의 현실을 반추하게 만드는 서사가 될 수 있다며 연출 의도를 밝혔다. 그런데 반군의 벙커로 무대를 옮긴 것이 현실에 대한 관객의 문제의식을 환기하는 설정이 될 수 있을까. 게다가 연극이 80분 안에 모녀, 자매, 오누이, 계부와 딸, 게릴라 집단 사이에서 벌어지는 너무 많은 대립을 다루면서, 정작 다루고자 했던 정의의 상대성에 대한 문제의식은 희석된다. 시종일관 진지하게 진행되는 연극의 긴장감을 이완시키는 과정에서, 폭탄을 잔뜩 몸에 묶은 게릴라 전사가 등장한다. 행동의 정당성에 대한 확신이 없는 원리주의자들의 부조리한 상황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해도, 단발적인 웃음으로 휘발시키기에는 테러와 관련한 현실의 상황이 너무 무겁게 다가왔다. 또한 예수정을 비롯해 좋은 배우들이 게릴라 전사로 출연했음에도 불구하고, 게릴라들이 개성을 가지고 움직이기보다는 극 중 상황과 사건 전개를 위해 소비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각색과 연출의 목표는 결국 동시대성의 확보일 것이다. 그런데 자살 테러를 벌이는 게릴라군의 이야기는 기사로 여러 차례 접한 것일지언정, 테러와는 다른 방식으로 재난의 시대를 통과하고 있는 한국 관객에게는 생소한 설정이다. 더해서 엘렉트라 자매가 성폭력의 피해자라는 설정은 최근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었던 성차에 입각한 폭력의 고발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이들 자매는 종국에 가해자인 아이기스토스에게 다시 농락당하고, 각각 게릴라군 내부의 변절자와 새로운 침입 세력에 의해 사살당한다. 여기서 각자가 추구하는 정의의 상대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면, 피해자가 다시금 농락당하는 설정이 왜 필요했던 것일까. 또한 클리타임네스트라와 크리소테미스가 엘렉트라를 여자가 아니라고 규정하며, 그녀의 젠더적 위치를 반복해서 묻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성성과 모성의 문제에 대해 재고하기 위해 이 같은 대사를 삽입했다고 해도, 여성 배우들의 분장과 의상은 지나치게 이분법적이며 이상의 대사들은 작품 속에서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하고 스쳐 지나간다. 결과적으로 연극이 다루고자 하는 두 가지 큰 화두가 유기적으로 맞물리지 못한 채, 또 다른 권력과 정의의 등장이라는 익숙한 결말로 서둘러 봉합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정의에 대한 화두를 던지기 위함이었다면 고전 비극에 더욱 충실해야 했고, 현대적 재해석을 강조하려면 어머니와 딸들의 이야기를 오늘날 한국의 화두와 더 적극적으로 연결시켜야 했다. <엘렉트라>는 이 두 가지 방향성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 인상을 준다. 고전의 확장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또 극장 안을 가득 메운 관객들이 강렬한 이미지와 배우들의 연기에 감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아쉬웠던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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