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렬한 비극적 여운의 웃음을 기다리며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글_오세곤(연극평론가)

 

극단 산울림이 다시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했다. 1969년 한국일보소극장에서 초연된 이후 50년이 되는 2019년 명동예술극장에 다시 그 작품을 올린 것이다. 연출은 당연히 임영웅이고, 대본은 1985년부터 사용한 오증자 번역본이며, 무대와 조명도 거의 고정이라 할 수 있는 박동우와 김종호이다. 그리고 배우는 블라디미르에 정동환과 이호성, 에스트라공에 박용수와 안석환, 포조에 김명국과 정나진, 럭키에 박윤석, 소년에 이민준이다.

초연 배우였던 김성옥, 함현진, 김무생, 김인태를 1기, 1980년대 전무송, 주호성, 조명남, 김진동, 이문수를 2기, 1990년대 초중반의 정동환, 송영창, 박용수, 정재진, 이호성, 이재학을 3기, 1990년대 중반 이후 2000년까지의 한명구, 안석환, 김명국, 정재진, 송영창을 4기로 보고, 이후 박상종, 박윤석, 김정호, 이민준 등이 합류한 점을 고려할 때 이번 출연진은 3기 이후의 배우들 전체를 인력풀로 하여 구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산울림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이처럼 지속적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참여 인력 외에 오랜 세월 유지되는 요소가 또 있으니 바로 웃음이다. 그것은 “1969년 12월 중순에 한국일보 소극장에서 공연되었던 <고도를 기다리며>는 관객의 숱한 웃음을 유발하였다”는 초연평(여석기)과 “한국의 극단 산울림이 보여준 <고도를 기다리며>는 심지어 웃기기까지 하였다”는 1994년 폴란드 공연평(요안나 호이카)을 보아도 분명하고, 필자가 직접 관람한 1990년대 초부터 2000년까지의 공연들을 기억해 보아도 분명하다.

흔히 베케트를 이오네스코, 주네 등과 묶어 부조리극의 작가로 분류한다. 부조리극은 1960년대 초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아마도 1960년 실험극장의 창단 공연이었던 이오네스코의 <수업>이나 1963년 민중극장이 공연한 <대머리 여가수>가 우리나라 부조리극의 초창기 작품이 될 것이다. 이 부조리극은 이후 70년대 활발했던 소극장운동의 중요한 콘텐츠가 된다.

부조리극과 웃음의 관계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런데 6, 70년대 관객들이 부조리극을 보면서 과연 웃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대부분 번역의 부실로 발생한 연결고리 없는 엉뚱한 대사와 동작에 대해 한편으론 답답해하며 또 한편으론 현대극은 역시 난해하고 심오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한 마디로 당시 관객들은 부조리극을 무척 심각한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이런 관점에서 산울림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초연부터 분명 다른 차원을 보여 주었다. 즉 관객들의 웃음을 유발함으로써 부조리극의 기본 조건 중 하나를 충족시키고 있는 것이다. 물론 과연 그 웃음의 질이 베케트가 의도한 것과 일치하는지는 더 따져 보아야 한다.

웃음으로 마음과 몸을 치유하는 웃음치료라는 게 있다. 통쾌하게 웃으면 속이 후련해지는 간단한 원리를 활용한 이 방법은 때로는 이유 없이 무조건 웃으라고 시킨다. 그렇게 억지로 웃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저절로 즐거워지고 몸은 다시 웃음을 생산하는 이른바 선순환 구조가 형성된다. 이렇게 볼 때 역시 웃음은 인간에게 대단히 유용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부조리극은 이와 같은 치료 효과를 염두에 둔 웃음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부조리극의 웃음은 궁극적으로 비극성 창출을 위한 것이다. 예를 들어 거울을 한 번도 못 보았고 거울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 처음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참으로 괴상하고 못 났다고 여기고 마구 비웃었는데 나중에 그것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느끼는 비애감, 그러니까 많이 웃으면 웃을수록 더 큰 비극이 되는 역설이 부조리극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산울림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유발하는 웃음은 어떤 쪽일까? 직접 안 본 공연에 대해서는 단언할 수 없지만 적어도 필자가 관람한 1990년대 초부터 2000년까지의 공연이나 근 20년 만에 다시 관람한 이번 공연에서 관객들이 보인 웃음은 전자인 웃음치료가 추구하는 그것에 가깝다. 왜냐 하면 정확한 상황을 이해하고 그 부조리함 때문에 웃기보다는 유명한 배우들이 보여 주는 우스꽝스러운 말투나 동작에 기인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부조리극은 ‘비사실임직한 사실’을 내용으로 한다. ‘비사실임직’은 한 사회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잘 믿지 않으려 한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그러나 아무리 믿기 싫어도 엄연한 사실이다. 예를 들어 신문에 난 끔찍한 사건을 보면서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경악할 때 그것은 분명 믿기 어렵지만 실제 일어났으니 믿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연극에 그런 내용을 담으면 대부분 너무 과장됐다거나 개연성이 없다거나 하면서 사실성의 결여를 지적할 것이다.

이에 반해 부조리극 이전의 연극들은 대부분 ‘사실임직한 비사실’을 내용으로 담았다. 사회 구성원들이 보기에 그럴듯하기에 ‘사실임직한’ 게 되지만 실제로는 그처럼 앞뒤가 딱 맞아떨어지거나 명쾌하게 해결되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에 ‘비사실’이 되는 것이다. 아마 희극에 대한 사전적 정의에서 “웃음을 주조로 한다”고 할 때 그 웃음은 ‘사실임직한’ 범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그 효과는 앞서 웃음치료와 유사할 것이다.

 

 

부조리극을 ‘현대적 의미의 비극’이라고도 하고 ‘희비극’이라고도 하는데,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웃음을 유발하지만 그것이 결코 기존의 희극과 같은 것이 아니고 오히려 비극성을 창출해 내는 중요한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웃음을 일으키는 핵심 요인은 부조리한 상황, 달리 말해 말도 안 되는 비논리적인 상황이다. “말도 안 되는”이나 “비논리적” 등의 표현이 모두 ‘부조리’와 동일한 의미인 것은 물론이다.

첫 장면에서 에스트라공은 신발을 벗으려고 애를 쓴다. 노력하면 결과가 있어야 하는데 벗겨지지 않는다. 해봤자 소용이 없으니 비논리적이라 할 수밖에 없다. 물론 천신만고 끝에 신발을 벗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또 다른 부조리가 기다리고 있다. 애초 신발 벗기를 시도하게 만든 원인, 즉 발을 불편하게 했던 뭔가가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신발을 흔들며 털어보아도 나오는 것이 없다. 부조리하다. 블라디미르 역시 모자 속에 뭐가 있는지 영 불편하여 모자를 벗어 털어 보지만 아무 것도 없다. 또 포조는 방금 사용했던 소지품들을 찾을 수가 없다. 럭키는 꾸벅꾸벅 졸면서도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지 않는다. 그 가방 안에는 모래가 가득하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을 보며 관객들은 웃는다. 웃음은 자기보다 못 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터져 나온다. 그런데 사실 잘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 그와 비슷하게 살고 있다. 쓸데없는 짐을 못 버리고, 금방 썼던 물건을 어디 뒀는지 찾지 못 하고, 아무 결과도 없는 일들을 반복하기 일쑤이다. 다만 스스로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을 느끼지 못 할 뿐이다. 그러니 결국 자신의 얼굴을 보며 웃거나, 심지어 비웃은 셈이 되는 것이다.

인간들은 통상 논리를 신뢰한다. 그러나 부조리극은 그 논리의 허망함을 지적한다. 그 대표적인 예로 목매달기 놀이가 있다. 지루한 기다림 중 시간 보낼 일을 찾다 나무에 목이나 매자는 쪽으로 동의가 된다. 그런데 누가 먼저 맬지 논란을 벌인다. 가벼운 사람과 무거운 사람 중 누가 먼저 매야 할까? 결론은 무거운 사람이다. 가벼운 사람이 먼저 목을 매 죽었는데 나중에 목을 맨 무거운 사람은 나무가 부러져 못 죽게 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아주 논리적이다. 그러나 둘 중 에스트라공이 더 가볍다는 것은 블라디미르의 말 이외에는 근거가 없다. 즉 대단한 논리로 설득했지만 사실 그 논리의 출발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것이다.

 

 

논리가 허망함에 관객들은 웃는다. 그러나 이 또한 우리의 모습이다. 예를 들어 재래시장에 가면 고추 한 무더기에 1,000원 하고 값을 매기는 데 반해 대형마트에서는 정확한 무게에 따라 1원 단위까지 값을 매겨 놓았다, 전자는 비논리적이고 후자는 논리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후자도 실은 최초 몇 그람에 얼마라고 정하는 건 누가 어떤 논리로 했는지 알 수가 없다. 비논리적 출발을 근거로 한 논리인 셈이다.

관객의 웃음은 엄격한 논리를 세웠는데 마지막에 그 근거가 비논리적이라는 데서 터져야 한다. 그런데 너무도 명쾌해야 할 논리 부분이 잘 전달되지 않는다. 특히 에스트라공의 “대는 소를 겸한다.”는 말은 귀에 쏙 들어오기에는 너무 어렵다. 연극에서 웃음이란 초정밀의 계산으로 촉발되어야 한다. 표현이 부정확하거나 어려워서 무슨 뜻인지 한참 생각해 이해할 수 있는 정도로는 절대 부조리극이 원하는 웃음을 만들어낼 수 없다.

 

 

과거 필자가 본 산울림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다른 부조리극 공연에 비해 분명 한 단계 높은 수준의 웃음을 보여 주었다. 그 힘으로 2000년에는 소극장이 아닌 문예회관 대극장(현 아르코 대극장) 공연까지 성공시켰고, 두 번째 백상예술대상을 수상할 수 있었다. 필자 역시 당시 심사위원으로서 그 점을 인정하고 선정에 동의했다. 그러나 당시의 웃음은 상대적으로 높은 것일 뿐 작품이 필요로 하는 수준에는 아직 못 미친 것이라는 점을 지적했고 2003년에는 그런 내용이 담긴 논문을 쓰기도 했다. 그리고 19년이 흐른 뒤 다시 공연된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았다. 아쉽게도 웃음은 그 때 그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오증자 번역본은 이전에 비해 훨씬 높은 수준의 공연을 가능하게 했다. 오랜 세월 반복되는 공연을 통해 임영웅 연출은 나름의 무대 미학을 구축하였다. 내로라하는 배우들로 이루어진 인력풀은 항상 일정 수준 이상의 무대 장악력을 보장해 준다. 그러나 예술은 끝없이 발전해야 한다. 처음에는 발전으로 인한 차이가 크지만 갈수록 그 차이는 미세해진다. 그러나 미세에서 초미세로, 다시 초초미세로 가더라도 계속 변화해야 한다. 그런데 산울림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2000년 수준에서 멈추고 말았다.

 

 

1985년 오증자 번역본은 그 이전 대본보다 상대적으로 좋아진 것일 뿐, 즉석에서 단번에 명확하게 전달되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 한 상태이다. 길이도 원문보다 길어서 원작에 비해 휴지가 짧고 대사는 빠른데도 시간은 거의 3시간에 이른다. 2003년 논문을 쓸 때 초반부 대사 40번까지 걸리는 시간을 측정해 보았는데 EBS에서 소개한 미국 단체의 공연보다 10% 정도 더 길었다. 그러나 더 간결하면서도 전달이 잘 되도록 고치고 다듬는 지속적인 노력은 없었다. 또 배우들은 단번에 명쾌하게 전달되지 않는 부분이 있음을 깨닫고 계속 그 불편함을 호소했어야 옳지만 그런 각성과 노력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번 공연을 본 관객들은 대부분 좋은 평가를 한다. 그러나 역시 상대적 판단의 결과일 뿐이다. 여전히 어렵다는 편견이 존재하는 작품인데 의외로 재미있다고 느꼈을 것이고, 유명한 배우들이 시쳇말로 망가진 모습으로 열연하는 모습에 감동했을 것이다. 이에 더해 50년이나 같은 작품을 공연했다는 데 대한 존경심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연극은 일생 잊지 못할 기억을 남겨야 한다. 그래서 다시 안 보고는 견딜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치 고도를 기다리듯 무한정 끝없이 단 한 치라도 더 낫게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래 다시 또 기다리기로 한다. 강렬한 비극적 여운의 베케트다운 웃음을!

 

*본 내용은 월간 <한국연극>(2019.06)의 기사를 재수록한 것입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