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율

-연극 <앙리 할아버지와 나>-

 

글_오대산

 

극작 : 이방 칼베락( Ivan Calberac)
번역 : 신주훈
연출 : 이해제
제작 : 파크컴퍼니
장소 : 대학로 유니플렉스
일시 : 2019년 3월 15일 ~ 5월 12일

 

 

불편한 동거

 

 

오늘날은 갈등의 시대라 보아도 무방하다. 80년대의 운동권과 보수세력이 오늘날까지 진보와 보수 사이에서의 팽팽한 줄다리기를 이어왔듯 경제권에서는 경영자와 노동자 간의 갈등, 혹은 빈부갈등이 십수 년 넘게 계속되고 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에는 남녀 성별 간의 대립, 서로 다른 문화 간의 상충과 폄하 등 미시적인 차원에서까지 갈등과 충돌이 일어나며 갈등이 하나의 사회 트렌드로 자리를 잡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갈등은 이제 사회가 피부로 체감할 수 있을 정도의 문제가 되었다. 사회 안에 녹아있는 각 구성원 간의 충돌이 이제는 의견피력과는 별개로, 사회의 통합을 막아 공동체의 발전을 저해하는 사회 문제가 되었음은 저명하다.

이중에서도 특히 세대갈등은 문제가 복잡하다. 세대갈등은 단순히 서로를 감정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정치 현상이나 문화 현상에 대하여 상반된 반응을 보이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신세대와 구세대가 서로의 자리를 빼앗고 밥그릇을 강탈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다. 늙어버린 양친을 부양해야 하는 자식들의 부담, 기성세대가 꽉 쥐고 있는 이권을 가져와야 하는 청년세대의 절망감과 피로감, 한평생을 붙잡고 살아온 가치가 자식세대에 의하여 부정되는 것을 바라보아야 하는 부모세대의 박탈감, 정치와 경제의 일선에서 물러나면 한없이 추락해야 하는 노인세대의 위기감은 사회라는 협소한 무대 안에서 치열하게 부딪히고 싸운다. 좋든 싫든 간에 한 무대에서 공존하는 두 세대가 불협화음을 내며 불편한 동거를 지속하는 것은 다소간의 피로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

 

 

<앙리 할아버지와 나>는 이러한 피로를 묘사하고 있다. 괴팍하고 독선적인 70대 노인 ‘앙리’와 그가 보기에 고까운 아들인 ‘폴’, 폴의 아내인 ‘발레리’와 세상물정 모르는 마냥 해맑은 아이인 ‘콘스탄스’는 앙리 할아버지의 작은 아파트 안에서 갈등을 겪는다.

아내와 사별하고 은퇴한 뒤에 혼자 지내는 앙리는 하나뿐인 아들의 며느리가 아니꼬와서 그들 부부가 이혼하기를 바란다. 그러한 아버지와 관계가 좋지 않았던 폴은 결혼한 뒤에 아버지와 떨어져 살지만, 혼자 지내는 아버지가 걱정되어서 폴은 앙리와 함께 지낼 세입자를 구한다. 폴은 앙리의 아파트의 방 하나를 세놓았고, 콘스탄스가 세입자로 들어오게 된다. 앙리는 손녀뻘의 세입자를 두고도 온갖 심술을 부리며 그를 내쫓을 꼬투리를 찾는 데에 급급했다. 콘스탄스는 괴팍한 할아버지의 집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앙리의 억지스러운 요구도 웃으며 받아들이지만, 사별한 아내의 피아노를 콘스탄스가 연주하자 앙리는 즉각 그를 내쫓으려 한다. 다른 셋방보다 좋은 조건을 가진 앙리의 아파트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콘스탄스는 앙리에게 내보내지만 않는다면 무엇이든 하겠다며 애원하고, 앙리는 이에 평소에 언짢게 여기던 아들 부부를 콘스탄스를 이용해 찢어놓을 작정으로 콘스탄스에게 자신의 아들을 유혹하여 아들 부부가 이혼하게 만들어달라고 부탁한다. 셋방과 방세가 아쉬웠던 콘스탄스는 이 고약한 요구에 선뜻 응하게 되고, 그는 폴을 유혹하기 위하여 발레리가 충족해주지 못한 폴의 판타지를 앙리로부터 청취하게 된다. 콘스탄스는 이들 부부를 정말로 찢어놓을 생각은 하지 못했으나 조금 어리숙하고 줏대 없는 구석이 있었던 폴은 의외로 콘스탄스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고, 폴과 발레리의 부부관계는 위기를 맞게 된다. 앙리의 망측한 계획이 정말로 들어맞자 콘스탄스는 당황하며 모든 상황을 뿌리치고 도망가려 하지만 이미 폴은 콘스탄스에게 푹 빠져 있었을 정도로 상황은 심각해져 있었다.

 

 

노인 한 명이 사는 아파트 안으로는 자식 부부를 이혼시키려는 아버지가 살고, 유부남을 유혹한 젊은 세입자가 세 들어 산다. 현관으로는 아내를 두고 어린 여자에게 푹 빠진 유부남이 출입하고, 며느리는 시아버지의 집에 드나들 때마다 남편의 외도 대상과 마주해야 한다. <앙리 할아버지와 나>는 이러한 불편한 관계를 극의 전제로 두고 시작한다. 이십 대의 젊은 청년에게 앙리는 삶의 지혜가 담긴 충고나 도움이 될 만한 첨언은 못 해줄망정 콘스탄스에게 요부가 될 것을 강요한다. 다시 한번 아버지의 꾀에 놀아난 소갈머리 없는 폴은 염치도 모르고 아내를 둔 채 콘스탄스를 만나러 아버지의 아파트에 온다. 콘스탄스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운영할 줄도 모르는 어린아이고, 며느리인 발레리는 자기 딴에는 지극히도 챙겨주었던 시아버지와 귀엽게 여기던 세입자 아가씨에게 배신을 당한 셈이다. 한 아파트를 드나드는 서로 다른 3세대는 서로의 발목을 잡고 방해하는 관계에 놓여있다. 진즉에 은퇴하고 가족과 떨어져 사는 노인이 뒤안길로 사라지지 않고 앞길 창창한 자식의 멀쩡한 가족생활에 훼방을 놓고, 노인 세대는 저보다 어린 세대에게 고압적이고 불편한 제안을 강요한다. 정말 피로한 관계가 아닐 수 없다.

 

 

노인 세대, 샌드위치 세대, N포 세대…… 3세대의 동거

 

 

앙리는 회계사 일을 그만두고 자신의 작은 아파트에서 손주 안아보기만을 기다리는 노인이다. 그렇기에 앙리의 관심사는 자신의 집에서 조용하게 시간을 보내는 일, 귀엽고 영민한 손주를 안아보는 일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자신만의 목표 때문에 앙리는 어린 세입자인 콘스탄스와 자신의 모자란 아들의 의중은 철저히 무시하고 그들을 자기 뜻대로 조종하려 한다. 고향을 떠나 앙리의 아파트로 올라왔을 때에는 아버지와의 관계도 포기하고 소망해온 꿈도 접은 콘스탄스였기에 그는 앙리의 무리한 요구에 순순히 응한다. 콘스탄스에게는 그저 방세나 신경질적인 집주인이 문제였을 뿐, 나머지 시간은 노닐거나 술에 취한 채로 보내는 콘스탄스는 이미 목표고 자신감이고 다 내려놓았으며, 스스로에 대해 생각을 깊게 하지 않기 때문에 앙리가 손쉽게 조종할 수 있었다.

앙리의 간섭을 가장 피로하게 느끼고 있었을 폴과 발레리는 자신들의 일뿐만 아니라 부양해야 할 늙은 부모님도 신경 써야 하는 곤고한 세대다. 원만한 부부관계도 유지해야 하고, 번듯한 직장에서 일도 해야 하고, 자식도 본 뒤에 늙은 부모님도 기쁘게 해드려야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부부관계는 어린 세입자의 어설픈 유혹에 바로 흔들릴 정도로 위태롭고 폴의 직장은 앙리가 만족하기에는 한참 못 미친다. 난임으로 자식까지 못 보고 있던 그들 부부는 급기야 ‘똘똘한 손주’를 보겠다며 ‘멍청한 며느리’를 내쫓으려는 앙리의 방해공작에 시달려야 했다.

 

 

<앙리 할아버지와 나>의 무대는 앙리의 아파트라는 협소한 배경만을 연출하고 있다. 관객은 그 공간을 통해서만 정보를 전달받으며, 그 공간 내에서 소통하는 인물들만을 볼 수 있다. 때문에 관객은 배경에 드나드는 인물들, ‘앙리의 아파트’에 드나드는 인물들이 배경을 주축으로 하여 하나의 구심점으로 모여드는 것을 보게 되고 등장인물들이 같은 관계 내에서 얽혀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또한 무대는 여러 오브제와 구조물로 가득 차 있고, 이것이 매우 희극적으로 이용되기 때문에 인물들이 한 집에 모여드는 ‘동거’를 하고 있으며, 그 관계가 조용히 관조하기에는 조금 상식에서 벗어나고 우스꽝스런 모습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앙리는 가장 어린 콘스탄스에게 자신의 무리한 요구를 주입하고, 콘스탄스는 요구받은 대로 폴과 발레리 부부를 괴롭힌다. 이 때문에 3세대는 서로가 서로를 거북하게 느끼는 관계를 형성하고 서로를 깎아내리게 된다. 때문에 공연을 보는 관객들 또한 이들 관계가 서로 뭉쳐있기는 하지만 매우 부자연스러우며, 각각이 평균 이하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부족한 존재, 겉도는 존재

 

 

콘스탄스는 ‘지금’을 가장 잘 누릴 수 있는 젊은이면서도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그 환경 속에서 자신은 무얼 해야 하는지, 애초에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하나도 알지 못한다. 인생을 먼저 산 앙리의 조언조차 제대로 듣지 못할 정도로 그는 불안정하다. 폴과 발레리는 앙리 품을 떠나 사회에 발을 디딘 사람들이지만, 금방 관찰할 수 있듯 그들 역시 어리숙하고 무능하다. 자기 일을 능히 감당하고 윗세대까지 부양하기에는 한참 모자라다. 가장 지혜로워 보이는 앙리 역시 이미 자식에게 외면받고 자기 뜻대로 되지도, 환영받지도 않을 일에 공연히 힘을 쓰는, 그야말로 ‘아웃사이더’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작품의 후반부에는 미래를 두려워하던 콘스탄스를 무심한 듯 따듯한 말로 독려하며 지도해줬던 앙리 역시 자신의 일을 다 재단할 수 없음이 드러나게 된다. 아들 부부의 사이가 멀어지길 바랬던 앙리의 바램은 앙리가 바래 마지않았던 자식이 폴과 발레리 사이에서 태어나는 것으로 좌절되고 앙리는 자신의 고집을 꺾게 된다.

일찍이 콘스탄스, 폴과 발레리는 무능하고 자기 할 바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앙리는 이러한 이들을 보고 답답해하며 그들의 모자란 부분을 지적하고 자신이 아는 바, 지혜를 주고 바른 길을 가르쳐 주려 했지만 앙리는 자신이 상상도 못했던 방향으로 일이 전개되며 자신의 아집이 꺾이는 과정을 겪는다. 그 과정 중에 앙리는 자신이 젊은이와 자식세대로부터 겉돌고 있는 늙은이라는 사실을 체감하게 되고 자신이 틀렸을 수도 있음을, 독선을 가지고 남들을 멀리한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깨닫게 된다. 앙리는 곧 콘스탄스가 앙리의 조언을 받아들였듯 자신의 부족함을 받아들이고, 고까워하던 자식 부부 앞에서 편안히 생을 마감한다. 서로를 괴롭게 하고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던 각자의 부족함으로 인하여 끝내는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조율이 필요한 때

 

 

연극에서 보여준 것처럼 젊은이임에도 자신이 처한 ‘지금’을 파악하지 못하고 현실을 헤매는 경우는 아주 빈번하게 보인다. 또한 그러한 젊은이들을 고깝게 보며 괴롭히는 늙은이들, 세태에 적응하지 못하고 바깥고리를 겉도는 노인세대도 자주 관찰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세대갈등은 심화되지만 동시에 연극에서 보여줬듯,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과 언제까지나 동거할 수밖에 없다.

젊은세대와 노인세대는 결코 같을 수 없고 서로를 이해할 수도 없겠지만, 둘은 서로의 부족한 점을 관찰할 수도 있고 상대에게 유의미한 도움과 조언을 주고받을 수 있는 존재임을 기억해야 한다. 두 세대가 서로를 향하여 고발하는 목소리 때문에 세대갈등이 심해지고는 있지만, 서로를 꼬집는 부족한 점이 각자 자기 내에 실존함을 기억해야 한다. 청년세대가 노인세대에게서 발견하는 문제점이 실존하듯, 노인세대가 청년세대를 더러 꼬집는 단점이 실존함을 발견해야 서로를 향한 이해가 깊어질 수 있다. 각자가 스스로의 부족함을 깨달아야 자신이 남을 더러 부족하다 하고 깎아내릴 정당성이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한 지붕 아래서 생활하는 ‘부족한 동거인들’은 남을 탓하거나 비난하지도, 남을 자기 뜻대로 이용하려 하지도 않는다. 남이 부족하듯 자신 또한 부족하며 자신의 뜻이 최선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서로 단결하고 보듬어주는 데에 집중한다. 좋든 싫든 간에 서로 엮여 있는 그들은 부정할 수 없는 관계를 애써 부정하려 하지 않고 부족한 모습, 다른 모습이더라도 서로를 품어주기 위해 노력한다.

 

 

갈등이 하나의 풍조가 된 사회에서 사람들은 청년세대와 노인세대, 젊은세대와 기성세대를 분리시키며 각자 자신만의 이익을 취하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의미가 없으며 두 세대가 이권을 가지고 다투는 일은 애먼 일에 자신과 상대를 상처 입도록 놔두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두 세대는 별개인 듯 보여도 같은 사회 안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으며, 현악기의 현이 서로 다른 음을 내더라도 조율을 통하여 자연스러운 선율을 연출할 수 있듯이 상반된 입장 사이에서도 통합된 목소리를 낼 수 있다. 다소간 불협화음이 나는 악기일지라도 거듭되는 조율을 통하여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할 수 있고, 오히려 소리의 각기 다름으로 인하여 풍부한 음을 낼 수 있다. 이처럼 우리 사회에도 불협화음을 고르는 조율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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