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한 리듬과 세련된 해학의 수려한 대중극
느닷없이 맞닥뜨린 허무한 결론

-연극 <낙타상자>-

 

글_오유경(극단 그룹動·시대 연출)

 

원작 : 라오서
각색 : 중원눙
번역 : 오수경
연출 : 고선웅
단체 : 극공작소 마방진
일시 : 2019년 5월 26일 ~ 6월 1일
장소 :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관극일시 : 2019년 5월 29일

 

 

 

2019 서울연극제 공식참가작 《낙타상자》는 라오서 원작소설을 경극희곡으로 각색한 것을 무대화한 작품이다. 극단 마방진이 《조씨고아》에 이어 두 번째로 무대화한 중국희곡이라니, 더구나 중국희곡이 서울연극제 공식참가작으로 선정되었다는 사실도 본인에겐 매우 신선한 흥미로운 관극 포인트였다. 예상대로 관극 내내 관객으로서 빠져들었고 즐거웠으며, 연극이라면 작품의 인물과 감정이입 되는 그 흔한 자신과의 갈등도 필요 없이, 작품이 들려주는 어느 중국인의 서사를 편안한 마음으로 스케치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극 마지막 장면이 지나고 공연이 끝나자 느닷없이 아니 준비되지 않고 무방비로 당했다라는 씁쓸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건 마치 누군가 마음속 어딘가를 마음껏 휘젓고는 예고도 없이 영혼을 훔쳐 달아나, 본인을 재기불능의 빈껍데기로 만들어놓고 도망가버린 느낌이었다. 정확하게 삶에 대한 희망아니 더 정확하게 살아내려는 의지자체를 인식도 못하고 순식간에 앗아가 버린 느낌이었다. 경험한 비극 중에서 제일 비극이었다.

 

 

작품 《낙타상자》는 20세기 초 중국의 격변시기에 한 인력거꾼의 삶의 서사를 그렸다. 주인공 상자는 매우 성실하고 부지런한 젊은 인력거꾼이다. 열심히 돈을 모아 연정을 느끼는 착한 복자와 어쩌면 가정을 꾸려 평범한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거라 작은 꿈에 부풀어 있는 청년이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그의 생각과는 달리 운도, 복도 지지리 없는 상황으로 꼬여간다.

 

 

 

사랑하는 복자는 알콜중독 아비 때문에 어느 남자의 후처로 팔려가고, 자신은 마음에 없는 다른 여인과 결혼하게 된다. 애써 모은 돈으로 마련한 새 인력거는 어느 날 손님을 태우고 성 밖으로 나가다 군인들에게 강제로 탈취당한다. 그래도 다시 마음을 다잡고 살려 했는데 임신한 아내가 난산으로 죽게 되고, 다시 인력거를 마련하려고 모은 돈은 도둑을 맞는다. 인생의 위기에 꺾인 상자는 알콜 중독에 염세적인 삶의 가치관으로 착한 본성을 잃고 거칠고 난폭한 심성(心性)을 지니게 된다. 그러던 중 복자가 돌아오고, 그를 아끼던 후원자가 일자리를 제안한다. 상자는 다시 희망을 품는다. 마음을 다잡고 다시 성실히 일하여 복자와 새 삶을 꾸려가려 한다. 하지만 복자는 다시 사창가로 팔려가고 상자가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갔을 때는 이미 늦었다. 복자는 자살했다. 상자는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며 장례를 치르고 허망한 마음을 안고 복자의 죽음을 슬퍼하며 막을 내린다.

 

 

작품 《낙타상자》는 매우 유연한 리듬과 세련된 해학과 아름다운 무대기술이 함께 어우러져 빚은 한마디로 수려한 대중극이다.

전통적인 중국 나무문창살을 형상화한 주된 무대는 사실적이지 않고 꽉 차지 않고 비어있으며, 빛이 투과하며 아름다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또한 다양하게 열고 닫힘으로써 인물의 속도감 있는 등·퇴장과 공간 전이의 유연성을 자연스럽게 가능하게 하였다. 더구나 인력거와 함께 인물들의 동선은 매우 자유롭고 곡선을 그림으로써, 관객이 부드럽고 유연한 리듬에 유도되어 방대한 서사를 질리지 않고 가볍게 즐길 수 있도록 하였다.

 

 

또 하나의 수려한 특징은 영창(永昌)조로 길게 둥글게 뽑아내는 화법이다. 대사의 어미는 모두 소리를 가볍게 둥글게 멀리 보내듯 길게 뽑아내고, 인물들은 상대가 매우 가까이 있음에도 서로에게 닿는 운명의 거리가 멀 듯이 멀리 있는 사람에게 말하듯 말을 길게 보낸다. 그 소리가 거칠지 않고 날카롭지 않아서 매우 듣기 좋은 시창(詩唱)처럼 혹은 부드러운 노래처럼 여울져 울린다. 가끔 이 형식이 단조롭고 지루할 때쯤 참으로 적절한 순간에 재치있고 슬기로운 위트와 해학이 번득 끼어든다. 특히 상자의 아내, 호네를 맡은 배우의 연기는 이 역할을 제일 효과적이고 효율적이게 수행한다.

 

 

작품은 어느 것 하나 흠잡을 수 없이 속도감 있게 진행되면서, 그러면서도 정서를 놓치지 않고 유연하게 세련되게 관객을 그 이야기 흐름 속으로 자연스럽게 유도한다. 정말 세련된 대중극 한편이라는 감탄이 절로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연이 끝나고 극장을 나설 때 문득 소름 끼치게 마음을 휘감는 허무감은 정말 순간 욱하게 화날 정도로 씁쓸하게 한다. 극장 계단을 내려가며 한 젊은 관객이 침 뱉듯 뱉어내는 한마디가 잊히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말야, 그냥 죽으라는 거지!’. 그 말은 곧 그러니까 애써 노력하며살려고 애쓸 필요 없다는 거지…! 그냥 일찌감치 죽는 게 낫다는 거지!’ 그 말이다. ! 어쩌란 말이냐! 그만 모르고 독을 마셔버린 기분이었다. 극 중의 노인이 말한다. ‘인생은 욕창! 독처럼 스며든다.’ 이 얼마나 최악의 결론인가…! 문득 어머니께서 오래전에 《패션왕》이라는 tv드라마를 보시면서 화를 내며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어째서 이따위로 끝내는 거야. 드라마는 드라마답게 희망을 줘야지. 무슨 대단한 예술을 하겠다고..!’ 애써 꿈을 이루고 살려고 최선을 다해 버둥대던 주인공이 곧 꿈이 이뤄지려던 순간에 허망하게 살해되는 결말을 보고 하신 말씀이다. 예술이 그리는 삶의 비극성을 너무 모른다고 그때 본인은 어머니가 매우 촌스럽다고 생각했다. 지금 본인은 딱 그때의 어머니가 되었다. 촌스럽고싶진 않지만 무방비로 삶의 의지를 빼앗긴 채 황망하게 허둥대고 싶지도 않다. 그것은 모욕적이다. 본인은 어떤 형태로든 예술의 비극적 결말을, 혹은 관객에게 던지는 비극적 셰계관을 존중한다. 다만 상자의 삶의 서사가 남 일 같지 않을 관객에게 어떻게 이것은 단지 예술적 관점일 뿐이라고, 그러니 그렇게 절망할 필요 없다고 설득할 수 있을까아니면 이렇게 절망을 안은 채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고..그렇지 않냐고 씁쓸한 동의를 얻고, 그러니 정당하다고그러니 공연을 보고 나서 상처 난 관객의 마음에는 책임이 없다고 훌훌 털어버릴 수 있겠는가…? 그것이 문제다.

 

 

왜 작품 제목이 《낙타상자》인가 궁금했다. 살려고 군대 낙타를 훔쳐 나오다 도망 길에 애물단지가 된 낙타 세 마리를 고생하며 끌고 다니다 설마 낙타가 된 게 아닌가.’ 스스로 정체감에 혼란이 왔던 상자 자신의 고백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매우 흥미로운 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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