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저장한 장소와의 혈투

-뮤지컬 <테레즈라캥>

 

글_윤진현 (연극평론가)

원작 : 에밀 졸라
극작 : 정찬수
연출: 정찬수
작사 : 정찬수·이수연
작곡: 한혜신
단체 : 한다프로덕션
일시 : 2019년 6월 18일 ~ 9월 1일
장소 : yes24스테이지 2관
관극일시 2019년 6월 18일 오후 8시

 

 

헤어지는 대신 살인을 고려할 만큼 부부제도는 비인간적 폭력성을 내포하고 있다.

20년도 더 된 이야기이다. 어쩌다 시작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해괴한 조합의 언어유희가 주변에 성행했다. “너는 나에 대해 너무 잘 알아. 이제 그만 헤어져!”와 같은 모양이었다. 이 말놀이의 최종승자는 스릴러 풍으로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와 함께 으스스하게 발화되는 문장이었다. “이제 그만 죽어줘야겠어. 당신은 나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아.”

당시 이 두 문장 사이에는 여러 가지가 더 있었고 문장마다 한 단계씩 심각성이 연장되는 분위기였는데 이에 대한 해석으로 문장 자체의 재미뿐만 아니라 발화환경과 발화자에 대한 분석까지 난상잡설로 이어졌었다. 대략의 합의는 첫 문장이 토닥토닥 싸우는 겨우 100일 된 연인이라면 마지막 문장은 10년 이상 결혼을 유지한 살벌한 부부관계라는 것이었다. 헤어지고 싶어도 갖은 복잡한 연관 때문에 차라리 살인을 고려하게 만든다는 것은 확실히 인간적이지 않다. ‘부부’라는 이 견고한 제도가 내포한 폭력성을 재고하는 계기를 던져주었던 것이다.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은 얼핏 보기에는 B급 불륜소재로 보인다. 사랑이나 주체적인 동인 없이 병약한 사촌 카미유과 결혼한 테레즈는 남편의 친구 로랑과 화려한 불륜에 빠져든다. 그리고 이들은 함께 살기 위해 카미유를 죽인다. 계획대로 로랑과 테레즈는 결혼하게 되지만 이들은 내면에서 분출하는 죄의식에 결국 파멸하고 만다. 에밀 졸라의 여러 작품에서 보이듯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이 원색적인 본능적인 캐릭터들과 교훈적으로 보이는 결말은 여전히 허다한 TV드라마 따위에서 재생산되고 있는 상투적인 감수성의 조상 중 하나이다.

 

 

<테레즈 라캥>의 성패는 테레즈와 로랑의 죄의식이 얼마나 개연성 있게 발현되는가에 달려있다.

이 작품의 성패는 테레즈와 로랑의 죄의식이 얼마나 개연성 있게 발현되는가에 달려있다. 사실 죄를 지은 인간이 양심이 따라 스스로를 처벌하며 반성한다는 것은 오랜 종교적 희망일 뿐이다. 양심은 교육되고 만들어지는 것이지 타고 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사촌이며 남편이며 친구를 살해한 이들이, 말하자면 죄로 연대한 이들이 죄를 반성하며 인간성을 회복하게 되는 데는 특별한 상상력이 필요한 것이다.

 

 

<테레즈 라캥>은 소설로 발표된 후 곧바로 에밀 졸라 자신의 각색으로 희곡으로 발표되었었고 연극으로 영화로 여러 번 제작되었으며 한국에서는 2007년 극단 동이 상연한 바 있으며 박찬욱 감독의 영화 <박쥐>에서 기초 플롯으로 응용되기도 하였으니 세간에는 익숙한 작품이다. 작품마다 이를 해석하는 방향이 다양하였으니 극단 동의 <테레즈 라캥>은 장애물이 사라진 사랑의 지루한 일상이 그 핵심이었었다.

 

 

 

은 그 자체로 인간에 대한 기억을 저장한다.

뮤지컬 <테레즈 라캥>은 ‘집’이란 장소를 제기한다. 부연할 필요없이 주택을 소유한다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 작품에서 이는 전면적으로 부각된다.

테레즈는 자신이 가꾼 ‘집’을 포기할 수 없어 로랑과 떠나는 대신, 카미유를 살해하고 ‘집’을 차지하려 한다. 그러나 ‘집’은 그 자체로 카미유에 대한 기억을 저장한 장소이다. 한 공간을 오롯이 점유한다는 것은 이 기억을 지배하거나 기념하거나 최소한 동거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카미유를 살해한 테레즈에게 이는 불가능하다. 요컨대 삶의 터전을 잃고 싶지 않아서 카미유를 살해하였지만 역시 그 때문에 삶이 파멸에 이른다는 해석은 교과서적이지만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삶의 터전을 잃고 싶지 않아서 살인까지 감행하였지만 그 때문에 삶이 파멸에 이르는 역설적 결말에 도달한다.

무대 곳곳에 매달린 액자 프레임은 이를 가시적으로 강조한다. 특히 카미유만의 초상화였던 원작의 그림은 테레즈와 카미유의 부부초상화로 변경되었다. 이는 이들의 집이 두 사람의 모두의 것임을 적시한다. 카미유를 제거한다고 해도 카미유의 기억은 생생히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테레즈의 공포와 함께 불안하게 흔들리는 조명도 인상적이었다.

 

 

다만 화사한 카미유와 테레즈의 공간, 부부침실과 나란히 설정된 허름하고 불결한 로랑의 공간이 효율적인 동선으로 안배되지 못한 것은 적지 않은 약점이다. 처음에는 예외적이고 부분적인 곳이던 로랑의 공간이 이들의 역할이 변화함에 따라 무대 전체로 확산되는 방식으로 표현되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음악 또한 전체적으로 고전에 잘 어울리는 깊이를 보여주었지만 테레즈의 역설적 감정을 드러내는 넘버가 좀더 적극적으로 가창되는 방식이면 더 좋았을 것이다. 발전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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