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이유가 아닌 죽음의 의미를 질문하다

-뮤지컬 <사의찬미>

 

글_최승연(청강문화산업대학교 공연예술스쿨 교수, 뮤지컬 평론가)

 

프로듀서   이성진
/연출   성종완
작곡/음악감독   김은영
드라마터그   이헌재
단체   ㈜NEO
장소   대학로 TOM(티오엠) 1관
일시   2019년 7월 6일 ~ 10월 20일
관극일시   2019년 7월 17일 16시

 

 

김우진과 윤심덕의 갑작스러운 정사(情死)는 당대에 무수한 관심과 추측을 낳았다. 그들이 관부연락선에서 현해탄에 빠져 죽은 것은 1926년이었으나 그 이후 몇 년 동안 매일신보 등에 지속적인 가십 거리가 보도될 만큼 그들의 죽음은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전도유망한 극작가와 유명 여가수의 동반 자살이라는 사건의 선정성 외에도, 죽음의 원인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은 사건에 대한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 그들은 사실 죽은 것이 아니라 일본 동경에서 잘 살고 있다더라 하는 가십이 생산되고, 이에 따라 시간이 갈수록 이 죽음은 불가해한 사건으로 정착되었다. 그들의 죽음이 미스터리한 만큼, 대중문화는 이들의 죽음을 소재로 활용했는데 영화 <사의 찬미>(1991), 드라마 <사의 찬미>(2018), 그리고 뮤지컬 <사의 찬미>(2013년 초연)가 대표적이다. 모두 ‘사의 찬미’를 제목으로 하여 그들의 ‘죽음’을 전면에 내세웠다는 공통점을 보이는데, 뮤지컬은 독특하게도 동반자살의 이유가 아닌 그 의미를 질문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에 띈다. 그리고 여기에서 동시대 관객과 소통 포인트가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김우진과 윤심덕, 그리고 사내

뮤지컬 <사의 찬미>는 2013년 초연과 2014년 재연 당시 <글루미 데이>로 시작되었으며, 2015년 삼연부터 <사의 찬미>로 바뀌어 2017년과 현재 2019년 공연까지 이어지고 있다. 자칭 ‘숯갱’이라는 마니아 집단을 양산하며 공연의 밀도를 높이는, 대학로 소극장 창작뮤지컬의 전형적인 레퍼토리화 과정을 밟고 있는 중이다. 이는 극작, 연출, 그리고 배우까지 겸하고 있는 성종완의 텍스트와 공연을 중단 없이 한 호흡으로 이어가게 만드는 김은영의 음악, 그리고 대본과 음악의 콜라보에 적극 응답한 관객이 만든 풍경이다.

사실 이 풍경 안에는 ‘사내’라는 인물이 핵심에 존재한다(물론 배우 라인업 역시 매우 중요하지만, 텍스트의 밀도는 ‘사내’라는 인물에서 근본적으로 시작된다). 만약 뮤지컬이 여느 작품들처럼 김우진과 윤심덕이 만나고 사랑하는 과정을 전경화하고 그 결과로 그들의 죽음을 다뤘다면 여타 텍스트와의 차별성이 지금처럼 두드러지지 않았을 것이다. 뮤지컬은 그들의 죽음을 한계상황에 부딪친 사랑의 당면한 결과로 다루지 않고, 오히려 운명을 거부한, 새로운 세계를 향한 진취적이고 주체적인 선택으로 다룬다. ‘사내’라는 인물이 김우진과 윤심덕 사이에서 그들을 각각 압박하면서 나온 결과다.

 

 

뮤지컬은 김우진과 윤심덕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낭만적인 장면들을 전혀 다루지 않는다. 드라마 <사의 찬미>가 이종석과 신혜선의 케미 및 화면의 색감과 리듬으로 최대한 그들의 사랑을 로맨틱하게 그렸다면, 뮤지컬 <사의 찬미>는 미스터리와 추리의 양식 안에서 날선 사랑과 극단의 갈등을 보여준다. 사내는 고국 조선에서 순회공연을 계획 중인 일본 유학생 김우진에게 접근하여 번역극 대신 창작극 레퍼토리를 만들자고 종용하고 함께 대본을 쓸 것을 제안한다. 우진은 이를 수락하였으나 사내의 대본이 심덕과 연애하는 자신의 실제 삶과 일치할 뿐만 아니라 둘의 삶을 파괴적이고 파행적으로 이끌고 있음을 감지하고 사내와 절연하려 한다. 그러나 사내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마치 죽음의 신처럼 대본을 통해 우진과 심덕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조종하려 든다. 이때 마침 심덕은 자신을 홀로 두고 잠시 떠났던 우진을 믿지 못하고 처음부터 지속적으로 자신을 욕망해오던 사내와 새로운 미래를 약속하지만, 결국 우진의 사랑을 알고 ‘믿게 된다.’ 그리고 그 믿음의 징표로 ‘자유와 사랑이 있는 새로운 세상’을 위해, 사내가 짜 놓은 결말 대신 그들이 함께 현해탄에 빠져 죽는 결말을 선택한다.

뮤지컬은 그러니까, 둘의 죽음이 타자의 시선과 기획에 강박된 운명적 흐름을 거부하고 자유와 사랑을 스스로 선택한 결과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사내의 정체성이 애매하고 미궁에 빠질수록 그 사내를 거부한 우진과 심덕, 함께 배 ‘바깥’으로 나와 바다에 몸을 던진 젊은 그들의 선택이 더 빛나 보이는 구조를 갖고 있다. 관객을 향해 열린 무대가 시종일관 배의 ‘안쪽’, 즉 사내가 지배하는 공간으로 고정되어 있다가 선택이 이루어지는 순간 비로소 두 인물은 그 공간을 벗어나 ‘무대 뒤’로 사라진다. 현해탄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며 자유로워지는 순간이다.

 

 

작품이 의도하는 것, 관객이 욕망하는 것

따라서 작품의 의도는 사실 명백하다. 작품은 (부자인 우진과 가난한 심덕이 연애하다가) ‘왜 그랬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그들을 말초적인 시선으로 대상화하지 않고, 그 비밀스러운 죽음은 ‘젊은 그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질문한다. 사내는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일 수도 있고, 타나토스적 충동일 수도 있으며, 우진과 심덕의 니힐리즘 그 자체일 수도 있다. 이런 관념/사내를 거부하고 뛰어넘었던 그들의 생명력을 칭송하는 것, 죽음은 곧 생명력 넘치는 행위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뮤지컬 <사의 찬미>가 의도하는 바일 것이다.

이 맥락에서, 김은영이 작곡한 <사의 찬미>의 음악은 작품을 벗어나 넘버가 단독으로 가창되어도 그 원천이 무엇인지 구분 가능할 정도로 선율과 화성이 특징적이다. 작곡가/음악감독 김은영은 주로 Bm와 Em를 기본 음계로 활용하면서 드라마의 극적인 지점과 정서를 카리스마 있는 선율로 뽑아내는 데 강점을 보인다. 가장 잘 알려진 우진의 넘버, ‘저 바다에 쓴다’는 사내가 제시한 결말을 거부하고 스스로 감당해야 할 미래를 다짐하는 우진의 매우 의지적인 노래로서 파도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전주와 고조되는 드라마를 드러내는 멜로디 진행이 돋보인다. 다시 말해, 드라마와 넘버 사이의 균열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매끈하다. 이러한 스타일의 넘버들은 인물의 파토스를 담아내기 적절하고 배우가 드라마 안에 몰입하기 편하게 되어 있다. 작품의 밀도가 높은 또 다른 주된 이유인 것이다.

 

 

한편, 공연의 밀도와 관련하여 <사의 찬미>가 김우진, 윤심덕, 그리고 사내, 이상 세 명이 등장하는 3인극이라는 점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 사람 사이의 관계가 초점화되고 객석에서는 그들 각각의 드라마와 관계가 얽히는 국면들에 집중하도록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질문할 것은, 공연에서 실제로 그 관계성이 잘 드러났는가 하는 점이다. <사의 찬미> 공연의 가장 문제적인 지점이다. 가령, 윤심덕이 김우진의 진심을 확인하고 함께 사내를 ‘거역’할 동력을 얻는 장면의 흐름이 정교하지 않아, 이후 운명을 거부하는 두 사람의 죽음이 극적인 설득력을 크게 얻지 못한다는 점은 가장 아쉬운 대목이다. 사내가 자신을 속인 이들을 추격하고 새로운 결말을 향해 나가는 그들을 막으려고 하는 장면 역시, 삼각관계에서 패배한 한 남자의 객기로 해석될 여지가 있어 그 의미가 축소될 수 있다. 두 장면이 연동되어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따라서 공연은, 그 메시지와 별개로 다소 모호하다. 우진과 심덕은 얼마나 사랑하는 사이였는지, 그것이 한 순간에 믿음이 회복될 수 있을 정도의 관계였는지 관객은 사실상 제대로 알기 힘들다. 짐작만 할 뿐이다. 물론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수용되기 어려운 여인 윤심덕을 연기한 최수진은 농염과 순수를 인물의 이면에 녹여내며 설득력을 강화했고, 김우진을 연기한 주민진, 사내 역의 김종구는 무난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들의 연기의 합이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기보다 소리 지르기, 압박하기 등의 방식으로 결말까지 급박하게 이어진다는 느낌이 강하다.

 

 

현재 대학로에서 중소극장 뮤지컬로 레퍼토리화 되고 있는 작품들은 대부분 소위 ‘시체 관극’의 패턴으로 소비되고 있다. 시체 관극이란 공연의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를 그대로 유지한 채 관극하는 관객들의 관람 태도를 가리키는 현장의 용어다. 극장이 크지 않아 작은 소리도 관극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그리고 이 경우 자신의 관극을 방해하는 다른 관객들의 매우 다양한 여러 행위들이 ‘관크’라는 명칭으로 제한된다). 매우 큰 집중력으로 관객들이 공연을 따라간다는 장점이 있지만, 무대에서 벌어지는 행위들이 객석의 별다른 반응 없이 그저 이어진다는 점은 치명적이다. <사의 찬미>도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사의 찬미>처럼 공연의 밀도가 높은 작품에 대해서는 이러한 관극의 강도가 더 강화된다. 만약 이러한 관극 방식이, 배우의 대사와 연기의 디테일을 온전히 관객 개인의 기억 속에 저장하기 위해서라면, 그래서 공연의 메시지와 전체적인 흐름보다 미시적인 관극을 선호하는 것이라면 이는 분명 문제적이다. 이 현상은 관객뿐만이 아니라 이러한 방식의 향유를 자극하는 제작사, 그리고 대학로 전체 분위기가 결합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재미있으면 (때로는 크게) 웃고, 흥미가 생기면 호기심을 품고, 피곤하면 몸을 뒤틀 수도 있으며, 공연이 관객의 감수성을 자극하면 편안하게 울 수 있는 극장 안의 공기가 필요하다. <사의 찬미>가 부르짖는 창의적인 사고, 창조적인 삶이 객석의 분위기와 함께 실현되어야 그 공연은 완전해질 수 있다. 공연의 명백한 약점이 배우를 디테일한 눈으로 따라가는 관객의 시선으로 가려진다면, 대학로를 채우는 공연들의 다양성은 확보되기 어렵다. 이는 비단 <사의 찬미>의 문제만은 아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