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매체 시대의 연극을 위한 새로운 이정표 : 수행성의 극작술

-연극 <이방인>

 

글_김효(연극평론가)

 

원작   알베르 카뮈
각색/연출   나진환
단체   극단 피악
일시   2019년 8월 20일~31일
장소   동양에술극장 2관
관극일시 2019년 8월 20일 오후 8시

 

 

 

카뮈의 <이방인>은 작열하는 태양아래 찌는 듯이 더운 알제리를 배경으로 태양이 눈부셔서 총을 쏜 한 사나이의 회상과 고백으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카뮈는 자신이 쓴 <이방인>에 대해 “아무런 영웅적 자세를 취하지 않으면서 진실을 위해 죽음을 받아들이는 한 사내의 이야기”라고 자평했다. 카뮈에게 궁극의 진실은 감각의 세계이다. 감각만이 존재의 실체이다. 헌데 감각의 경지는 인간의 합리적 논리로 설명 불가능한 경지이므로 카뮈는 그것을 부조리라 부른다.

 

 

진실이 무엇인지, 우리는 어떻게 진실을 외면하고 회피하며 억압하는지, 그것을 명료하게 드러내기 위해 카뮈는 자연과 생명, 죽음과 관능, 법과 종교의 배치 속에 뫼르소를 밀어 넣는다. 감각적 진실에 충실한 뫼르소, 모든 허위의식으로부터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허위의식에 갇혀있는 사람들로부터 영원히 추방당하는 뫼르소, 그의 초상을 통해 카뮈의 <이방인>은 우리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던 위선과 기만의 가장 깊은 심연에 총성을 울림으로써 세계를 충격에 빠드린 작품이다.

 

 

극단 ‘피악’의 <이방인>은 대본의 대부분을 카뮈의 소설에서 따왔다. 하지만 극적인 긴장감을 위해 원작 텍스트의 배열을 바꾸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원작에 없는 텍스트를 과감하게 첨가하였다. 프롤로그를 덧붙여 자기서사의 연극으로 재창조하고 주관적인 해석을 돋보이기 위해 에필로그에 새로운 문장들을 첨가했다. 그 속에서 소설이 연설로 바뀌고, 재현의 미학 대신 수행성의 미학을 구사하여 강렬한 무대를 선보였다.

 

 

최근 들어 자기서사와 영상의 ‘남용’이 연극의 무대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영상매체 시대에 영상기술을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하지만 연극 무대에 자기서사가 들어오면서 생기는 문제점은 마땅히 연극 고유의 미학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너무 쉽사리 영상에 의지해 버리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오늘날 자기서사의 연극 무대는 영상에 의해 점령당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연극 무대에서 상상력과 창의성을 고갈시킨다. 영상의 남용은 연극예술을 위협하는 중대한 요소가 된다. 그런 점에서 극단 ‘피악’의 <이방인>은 오늘날 일종의 장르처럼 되고 있는 자기서사의 연극에 하나의 미학적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다.

 

 

<이방인>에서 시공간적 배경을 이루는 태양의 열기와 무더운 날씨의 분위기는 주제를 암시하는 은유이자 이 작품을 이끌고 가는 물질적 힘이다. 물질의 힘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힘은 단지 느껴질 뿐이다. 극단피악의 <이방인>은 물질적 힘을 ‘표현’하기 위해 그 손쉬운 사진이나 영상물을 동원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그 대신 물질의 현존성에 대한 우직하리만치 치열한 탐구를 통해 그 강렬함의 에너지로 극장을 가득 채운다.

 

 

조명이 들어오면서 모습을 드러내는 무대는 온통 백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눈이 부시다. 태양은 백색이 아니다. 붉은 색이다. 따라서 백색의 무대는 태양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태양을 ‘느끼게’ 하려는 의도의 소산이며 수행적 미학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연구의 흔적이다. 태양의 열기가 더욱 강렬해질 때 무대에는 다수의 백열전구가 동시에 점화된다. 그렇게 태양의 햇살과 열기는 재현되지 않고 감각적으로 수행된다.

 

 

무대의 중앙을 점령하고 있는 정사각의 탁자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답답하게 하며 손을 닦기 위해 인위적으로 돌려야 하는 회전식 수건기계가 발산하는 소리는 땀을 닦는 행위를 팽창시키는 효과를 발생시켜 더욱 밀도 높은 더위의 느낌을 조성한다. 마침내 더위를 참을 수 없는 뫼르소가 옷을 벗고 자신의 정수리에 쏟아 붓는 커다란 주전자에서 물 대신 밀가루가 쏟아져 나올 때 의아해진 관객은 호기심을 가지고 무대에 집중하게 된다. 젖은 얼굴과 알몸에 덕지덕지 붙은 밀가루는 보는 이로 하여금 물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밀도의 질감으로 무더위의 끈적함을 느끼게 해 준다. 이렇게 극단 ‘피악’의 <이방인>은 (더위를) ‘재현’ 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게’ 하는 수행성의 미학을 치열하게 밀고 나간다.

 

 

물질에 대한 치밀한 탐구에 기반한 물질적 유희로 관객의 감각을 때리고 자극하는 수행성을 천착하는 극단 피악의 미학적 전술은 배우의 입을 통해 발화되는 인간 실존에 대한 성찰과 공명하여 격렬한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그 결과 재현의 미학으로는 엄두도 못 낼 고도의 극적 효과를 달성한다.

 

 

수행성의 미학은 거침없는 과장과 유희를 창출하여 재현의 경계 속에 갇혀 있는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불가능한, 연극만이 해낼 수 있는 센티멘털리즘과 코믹의 재미를 관객에게 선사한다. 이 연극은 초지일관, 진실을 외면하고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채 살고 있는 다수와 진실을 추구하는 단 한명의 사람, 이 두 진영 사이의 갈등과 설전으로 이루어진다.

 

 

다수 진영의 인물들은 5명의 배우들로 구성된 코러스가 배심원, 양로원 사람들, 신부, 사제, 재판관, 변호사, 그 밖의 동네 사람들과 여인, 고양이와 개 등 다양한 역할을 번갈아 가면서 연기한다. 5명의 코러스가 나체가 되어 흙 위에 뒹굴다가 프랑스의 국가, ‘라 마르세예즈’ 노래에 맞춰 군무를 추는 장면은 진실을 외면하는 다수의 진영과 진실만을 추구하는 단독자 사이의 갈등을 아이러니하면서도 가장 격렬한 압축의 방식으로 연출하여 이 공연의 압권을 형성한다. 이어지는 장면, 뫼르소와 사제의 배틀이 이 극의 클라이막스, 정점을 찍는다. 얼굴에 회칠을 하고 흙투성이가 된 벌거벗은 몸 위에 사제의 가운을 걸친 신부의 모습은 그로테스크한 신성모독을 환기시킴으로써 이 두 사람의 배틀이 이미 한쪽으로 기울었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이렇듯 인간실존에 대한 성찰과 강렬한 수행성의 미학이 효과적으로 호응하여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극작술이 결말 부분에 이르러 다소 흔들리는 것이 유감스럽다

 

 

카뮈의 원작에서는 신부가 돌아간 이후 뫼르소가 자신의 정당함과 죽음의 동질성에 관한 소회를 밝히는 장문으로 소설이 마감된다. 헌데 극단 ‘피악’의 공연에서는 뫼르소의 독백이 스스로 자신을 예수와 등치시키는 담론으로 갑자기 비약한다. 실제로 카뮈도 뫼르소를 예수에 비유한 적이 있다. 카뮈에게 있어서 뫼르소가 예수와 등치될 수 있었던 것은 철저하게 진실만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반복하건대 카뮈에게 있어서 인간 존재의 궁극적 진실은 감각적 존재라는 점이었다.

 

 

헌데 극단 ‘피악’의 뫼르소는 자신을 예수와 동일시하는 근거를 “고독한 인간”으로 제시함으로써 원작의 궤도를 크게 이탈한다. 물론 극단 피악은 카뮈의 <이방인>을 자기서사로 재구성한 것인 만큼, 원작에서 나름의 새로운 해석을 끌어 낼 수도 있고 새로운 이야기의 조각을 덧붙일 수도 있다. 하지만 뫼르소의 ‘예수다움’을 고독으로 지목하는 해석은 논리적으로 재고의 여지가 있다. 뫼르소의 고독은 허위와 기만이 만연한 세상에서 진실을 추구한 결과이지 존재의 본질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예수 역시 고독한 사나이였으나 고독이 예수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을까?

 

 

또 한 가지, 이 공연은 여성의 젠더적 표현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극단 피악의 무대에서 뫼르소의 연인, 마리는 철저하게 남성의 시선에 의해 대상화 된 모습으로 등장한다. 남자 주인공의 시선에 포획된 마리에게는 어떤 주체성도 끼어 들 여지가 없다. 물론 카뮈의 원작도 이 문제와 관련하여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극단 피악의 <이방인>은 지금 여기에 사는 평범한 사람의 입장에서 카뮈의 <이방인>을 재구성한 작품이다. 마리에게 나타나는 젠더적 양상은 이 공연의 극작술에서 발산되는 빼어난 동시대성의 빛을 바래게 하며 결국은 이 공연을 박제화된 과거의 유물처럼 보이게 한다.

 

 

이 공연이 담지하고 있는 연극적 가치와 의의에 비하면 예수나 젠더적 표현의 문제는 미미한 것으로 치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와 관련하여 다각적인 숙고와 보완의 노력이 수반될 때 비로소 더욱 폭넓고 깊은 공감을 이끌어 내는 극단 피악의 <이방인>을 선보이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혼신을 다해 난이도 높은 연기에 헌신하여 좋은 공연을 만들어낸 배우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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