뱅뱅 도는 당신, 기억, 그림자
연극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글_김민송
원작 장강명
각색 정진세
연출 강량원
제작 남산예술센터, 극단 동
장소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일시 2019년 10월 9일~27일
같은 일인데도 사람마다 기억이 다른 경우는 흔하다. 사건을 떠올려보라고 했을 때, A 부분을 이야기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B를 먼저 말하고 이어가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기억이 다르면 같은 사건을 전하는 순서나 내용 역시 조금씩 달라진다. 혼자 얘기하는 경우도 그렇다. 어떤 상황을 설명할 때, 나중에 일어난 걸 먼저 얘기해버리는 경우가 있다. 순서가 뒤바뀌기도 하는 이유는 후반부사건에 대한 인상이 강하기 때문이다. 기억은 사람, 인상에 따라 달라진다.
동급생을 살해하고 출소한 남자와 화목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란 여자가 고등학교 이후 다시 만나고, 남자에게 살해당한 사람의 어머니가 그 주변을 맴도는 동명 소설을 각색한 연극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은 이 주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극 중에서 ‘우주 알’이 몸에 들어오면 과거, 현재, 미래를 볼 수 있는데, 책을 그대로 읽는 것이 아니라 모든 페이지를 흩트려 놓고, 순서를 맞추지 않은 채 보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이 ‘우주 알’처럼 극의 전개 방식은 어지럽다. 남자가 동급생 영훈을 찌르는 과거에서 시작해서 현재로 갔다가 거기서 더 오래된 과거 혹은 헤어짐 등 미래 얘기를 하는 식이다. 게다가 남자의 살해에 대한 과거는 일관적이지도 않다. 남자가 괴롭힘을 당해서 정당방위라는 게 있는가 하면 영훈은 그를 괴롭힌 적 없다는 경우도 있다. 관객들은 이러한 장면 중에서 마음이 가거나 더 신뢰되는 것을 택하게 된다. 아들의 무고를 주장하는 아주머니, 괴롭힘을 당했던 남자, 자신의 형량을 줄이기 위해 거짓말했다는 남자 등 제시되는 것들 중에서 무언가를 믿을 것이다. 작품은 어느 것이 정답이라고 정확히 제시해주지 않지만, 관객이 이 인과관계를 직접 엮게 함으로써 어떤 사건이든 상황과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이어진단 걸 느끼게 해준다. 앞에서 본 인상에 남은 것들로 뒤의 이야기를 각자 이해하게 만들어 기억하는 방식을 다시 바라보게끔 하는 것이다.
연극에서 중요한 사건인 남자의 살인이 일어난 과거의 시대적 배경과 그를 바라보는 현재에서도 이 주제가 잘 드러난다. 남자가 동급생 영훈을 살해한 시기는 한창 학교폭력으로 청소년들이 자살하는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던 때인 동시에 교사가 학생들을 폭력적으로 다뤘던 시기다. 인권을 침해하지 말라는 고등학생 시절 남자의 말을 듣고 남자를 제외한 반 아이들을 모두 몽둥이로 때린 선생의 태도는 당대의 문제를 고발하고 영훈이 남자를 건드는 계기가 되어 작품 내 사건을 심각하게 만든다. 더불어 살인사건 직전에 전국에서 일어난 학교폭력 관련 사건들은 남자가 그 시기 이슈를 파악하여 영훈에게 따돌림을 당했던 것처럼 이용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고, 영훈에게 당했던 사건을 진술하는 것과 반대되어 영훈이 진짜 일진이었는지 아닌지 그 경계를 흐리는 역할을 한다. 학교폭력 사건들의 경위를 자세히 알고 언급하는 사람이 영훈의 어머니뿐이라는 부분도 인상 깊다. 자기 아들은 일진이 아니었는데 당시 사회 이슈가 그것이었기 때문에 남자가 이를 노렸고, 그를 증명하기 위해 관련 사건들을 달달 외운 것이다. 아주머니뿐인 것은 그녀가 아들의 무고함을 밝혀야 하기 때문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각자 사정에 따라 현재에도 기억하는 내용이 이토록 다르다.
시대적 배경처럼 연극의 주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장치인 동시에 연출가 강량원이 말하는 이 연극의 ‘필살기’는 배우들이 계속해서 뱅글뱅글 도는 것이다. 뱅뱅 돌게 되면 관객들은 어느 좌석에 앉든 간에 배우의 모든 면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관객에 따라 기억하는 신체 부위, 인상, 구도 등이 다를 것이다. 기억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점을 철저하게 이미지화한다.
도는 행위 자체도 중요하지만, 회전하는 배우들을 중심으로 6개의 그림자가 생기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후반부에는 조명이 굉장히 세서 그림자들의 존재감이 극대화된다. 배우들이 계속 돌기 때문에 그의 발밑에 생긴 그림자들도 움직인다. 이는 시간이 엉키는 극의 전개와 우주 알 이야기처럼 과거, 현재, 미래의 배우가 이미지화되어, 사람의 여러 면이 보이는 것 같다. 게다가 이 연극에서는 각자 기억에 따라 인물들이 다르게 묘사된다. 특히 남자의 손에 죽은 영훈의 경우 여자에게는 일진으로, 아주머니에게는 카레를 좋아하던 사랑스러운 아들로, 남자에게는 자신을 괴롭힌 사람 혹은 친구였던 사람 등으로 극명히 갈린다. 남자 역시 여자에게는 과거에도 교류했던 사랑하는 사람이고, 아주머니에게는 새 아들로 여겨지는 동시에 친아들을 죽인 원수 등 다양한 모습으로 보인다. 이 모습들은 인물들 발밑에 생겨나는 각각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겠다. 쉴 새 없이 도는 배우들 덕분에 방향에 따라 그림자들의 모양 역시 계속 바뀐다. 인물들의 평가가 지각하는 이나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너는 누구였냐고 묻는 여자의 말과도 연결된다. 도는 행위 자체는 이 연극의 필살기라고 할 수 있겠고, 발밑에 생기는 그림자들은 ‘필살기’로 인해 더 확실한 존재감을 가지며 중요한 의미를 확립한다.
그림자가 이 연극 내에서 중요한 장치라고 생각되는바, 다른 장면에서 두드러지는 그림자를 살펴볼 이유가 생긴다. 남자가 핸드폰으로 자신의 영상을 찍는 장면이 눈에 띈다. 살인을 고백하는 남자의 모습은 꽤 섬뜩하다. 형량을 줄이기 위해 그냥 반 친구였던 영훈이 자신을 괴롭혀왔다고 거짓 증언했고, 결국 정당방위가 인정되어 살인이라는 무거운 죄목에 비해 짧은 수감 생활을 마치고 나왔다고 하니 말이다. 그 고백을 덤덤하게 하는 남자는 몸을 돌리며 360도로 핸드폰 속 영상, 자신의 모습, 뒤에 맺힌 엄청나게 큰 그림자를 보여준다. 이때 생기는 그림자는 극장 전체를 먹어버릴 정도로 커서 압도되는 기분이 든다. 그 그림자를 등에 단 채 살인을 고백하는 남자의 모습은 소름이 끼칠 정도다. 그가 괴물처럼 보이게끔 그림자를 크게 만들었을 수 있다. 또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앞서 보았듯 그림자는 각자 기억에 따라 달라지는 인물의 모습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영상 촬영 장면에서 남자의 그림자는 아주 크게 맺힌다. 영상을 찍는 남자는 극 마지막에 “너를 만나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다시 겪으라면, 나는 그렇게 할 거야.”라고 읊조린다. 살인과 관련하여 남자의 어떤 증언이 거짓이고 진실인지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관객은 각자 판단할 문제이다. 그러나 이 대사에서 나타나는 여자를 향한 사랑만은 확실해 보인다. 모든 것이 엉켜있고 명확하지 않은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확정적인 부분인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인물에서 나오는 그림자가 유일하게 하나고, 가장 큰 상태에서 여자를 향한 마음을 표현하는 것에서 더욱 설득력을 가진다. 더불어 그림자의 의미가 아닌 핸드폰 화면, 남자, 남자의 그림자 순서로 보았을 때, 남자가 지구와 달 사이에 있던 우주 알과 같은 위치를 가진다는 점에서도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시공간 연속체가 뒤틀리는 그믐에 우주 알이 지구에 왔다. 남자가 보이는 게 총 3개라는 점, 공전 혹은 자전하듯 돈다는 점에서 달, 지구, 우주 알을 시각적으로 보여줬다고도 볼 수 있다.
여자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장단점이 동시에 드러난다. 극 중간에 노래를 부르면서 배우가 바뀌는 장면은 주제를 표현하기에 적절하다. 배우가 바뀔 만큼 여자에 대한 인상은 여러 가지라는 것이다. 한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가 중간에 바뀌는 것은 굉장히 파격적이고 새롭기 때문에 관객들은 왜 그랬는지 생각할 수밖에 없다. 관객이 한 번 더 생각하게 하고, 결국 각자의 기억에 따라 사람을 다르게 기억할 수도 있다는 주제를 드러낸 부분이다. 이렇게 연극의 장점을 살려 원작보다 주제를 더 강조한 장면이 있지만, 아쉬운 곳 역시 있다. 한 반에 보람이 세 명 있던 고등학교 때, 여자는 중간 보람으로 불려서 큰 보람, 작은 보람과 달리 어정쩡한 존재 같았다고 언급만 하는 연극과 달리 원작 소설에서는 그것에 더해 큰 보람이 부자가 됐다는 소문을 언급한다. 하지만 소설 막바지에서 여자가 큰 보람을 왕따 시켜서 힘들어했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여자의 기억 속에서는 자신이 열등한 입장이었는데, 남이 보면 아니다. 이는 사람의 기억에 따라 달라지는 모습을 아주 잘 보여주어 주제를 나타내는 장면이다. 그렇기에 이 장면을 제외한 것에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연극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은 제목처럼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을 다루어 여러 인물과 시간 흐름에 따라 사람과 기억을 다르게 인식하는 걸 보여준다.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뱅뱅 도는 행위, 그림자 등을 활용하여 연극의 장점을 잘 살린 반면, 원작에서 주제를 잘 살린 부분을 삭제한 것, 45도 기울어진 아슬아슬한 무대에서 너무 격한 행동으로 연기해 오히려 몰입을 깨트리는 점 등 아쉬운 부분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가운데서도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연극은 스토리, 연출, 무대 등 온몸으로 묻고 있다. 당신은 세계를 어떻게 기억하고, 남들에게 각각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