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을 깨고 나온 오이디푸스의 아이들
연극 <아빠 안영호 죽이기>
글_조승미
작 도은
연출 고유빈
제작 프로젝트 고도
장소 삼일로 창고극장
일시 2019년 9월 26일~29일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 부부는 아들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그를 죽이고자 했으나, 오이디푸스는 끝내 아버지를 죽이고 예언을 실현한다. 비극적인 운명 앞에서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눈을 찌르며 오만함을 반성한다. 오이디푸스 신화처럼 <아빠 안영호 죽이기>에는 아버지를 죽인 아이들이 나온다. 극은 처음부터 안영호가 죽은 시점에서 시작하여 이 사건이 왜, 어떻게 벌어지게 된 것인지 과거의 행적을 따라가는 형식으로 짜여 있다. 그러나 안영호가 등장하는 시점부터 ‘아버지’와 세 명의 아이들로 구성된 가족은 일반적인 형태가 아닌 것이 드러난다. 가정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또 다른 가정을 만든 가출 청소년들의 이야기가 <아빠 안영호 죽이기>의 진짜 이야기다. 이들은 왜 아버지를 만들고 왜 아버지를 죽였나.
시체가 든 캐리어를 들고 무작정 바다로 간 여자아이 두 명은 ‘무해’와 ‘코다’다. 나중에 합류한 남자아이 ‘오카’와 함께 시체를 유기할 방법을 찾는 이들에게 분명히 죽어 있는 안영호가 찾아온다. 죽기 바로 직전의 멀쩡한 모습인 안영호는 아이들 중 누가 자신을 죽였느냐며 추궁한다. 안영호는 아이들보다 조금 더 나이가 많은 청년일 뿐이다. 그는 가출한 아이들을 인터넷으로 구해 패밀리(팸)를 만들고 ‘아버지’ 역할을 한다. 가출한 아이를 빌미로 부모를 협박해 돈을 뜯어내며 모텔을 전전하는 방식이 네 명을 가족으로 유지하게 하는 조건이다. 안영호의 ‘가출팸’에 들어오게 된 아이들은 각자의 이유로 원래 가정으로부터 탈피했다. 자신을 ‘오카’로 부르기로 한 남자아이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지만 구원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늘 폭력적으로 행동하는 형과 그걸 방관하는 부모 밑에서, 오카에게 ‘기도를 해야지만 지옥에 가지 않는다’는 설교는 와닿지 않는다. 이미 삶이 지옥 같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집을 나오는 것을 택한다. ‘코다’는 아버지가 배를 타고 나가신 뒤 돌아오지 않자 혼자가 되었다. 아버지가 사라지면서 코다의 가정도 통째로 사라진 것이다. 코다 역시 정해진 이름이 아닌 자신이 정한 닉네임으로 살아간다. 오랫동안 가출팸을 전전해 살아온 탓에 눈치가 빠른 아이로 살며 때때로 17살, 18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모텔 이름 ‘나폴리’가 아닌 진짜 이탈리아 도시 ‘나폴리’로 여행 가고픈 순진함이 있고 여자아이인 무해와 코다에게 조건만남, 즉 성매매를 시키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라는 안영호의 말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인다. 안영호의 말하기는 이런 식이다. ‘너를 걷어주고 키워주고 재워주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느냐?’ 배신감이 기저에 깔려있는 안영호는 회유와 분노를 반복하며 집요하게 물음을 던진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이름이 아닌 닉네임을 쓰고 있다. 이름은 오로지 나의 의도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전가하는 것이며 선택의 여지가 없는 필연적인 것이다. 이는 이름을 부여하는 부모의 책임을 상징하기도 하며 극 중 등장인물의 닉네임은 그런 책임으로부터 방치된 이들을 대변한다. 스스로 호명한 이름을 가지고 ‘가출 패밀리’의 일원으로 들어가는 아이들. 그들은 서로를 패밀리라 부르며 누나, 동생, 아버지의 역할 놀이에 참여하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패밀리’의 의미는 사라진다. 안영호는 무해, 코다, 오카가 다른 가출 청소년의 돈을 빼앗는 일에 주저하고 회의를 느끼자 폭력적으로 변한다. 무해의 소지품을 던지며 화를 내고 남자 손님을 유인하겠다며 오카를 끌고 나가버린 것이다. 오카를 찾기 위해 ‘누나’ 역할인 무해와 코다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받지 않는 전화를 붙들고 있는 것뿐이다. 코다가 신호가 가지 않는 핸드폰을 들며 ‘실종신고는 가족만 할 수 있다’고 말하는 부분은 가족이 아니기에 지금까지의 역할 놀이가 무력해지는 모습으로 ‘패밀리’의 의미가 무너지는 결정적인 장면이다.
칠흑같이 어두운 검은색만 있는 무대, 극 전반에 깔리는 파도 소리와 거친 바람 소리는 이들의 불안한 현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무대의 끝에 설치되어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실 또한 어딘가로 벗어나기 힘든 상황을 암시한다. 그들은 이곳이 애정과 보호로 결속된 가족의 울타리가 아닌 거미줄 같은 덫임을 직시하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안영호가 느낀 배신감은 실은 배신감이 아니라 조건과 만족이 충족되어야 이루어지는 철저히 계약적인 보상심리다. 이는 부모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이기도 하다. 자신의 욕망을 자식에게 투영해 수단화시키는 것. 그 과정엔 애정과 보호가 없다. 무해, 코다, 오카가 스스로 이름을 지우며 억압과 착취를 당하면서도 안영호를 아버지로 부른 것, 패밀리가 된 것은 애정이 절실한 이유였을 것이다.
혼자 남겨진 이들에게 안영호의 공동체는 소속감과 안식처를 따라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다만 가족을 연기하고 있었을 뿐 이곳이 진정한 안식처가 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애초에 그들은 안식처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했다. 아버지의 세계가 어떤 곳인지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모방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실로 극에서 안영호를 제외한 ‘아버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오카와 코다의 과거 부분에서도 아버지는 대사로만 존재할 뿐이다. 알지 못한 세계를 막연히 욕망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비극적인 현실을 극대화한다. 무해와 코다가 안영호에게 위협을 느끼고 짐을 싸서 도망치려고 할 때, 마침 돌아온 안영호는 떠나려는 무해, 코다와 실랑이를 벌인다. 무해가 안영호의 목을 조르고 코다는 그가 저항하지 못하게 몸을 붙잡는다. 안영호는 그렇게 죽는다.
헤르만 헤세 소설 <데미안>에서는 ‘알의 세계’가 등장한다. 알을 깨뜨려야 새가 태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버지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그 외에 다른 세계를 욕망할 수 없는 아이들의 이야기 같기도 하다. 혼자인 아이들은 보편적인 가족의 형태 ‘아버지’가 아닌, 다른 세계를 떠올릴 만큼 충분히 보호받지 못 했을뿐더러 부재한 애정에 목말라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세계는 폭력과 인스턴트로 점철된 안영호의 세계가 아니다. 이 매정하고 불친절한 세계는 무해로 인해 깨어진다. 무해는 작 중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과거가 다루어지지 않는다. 그는 극이 진행되는 동안 묵묵히 지켜보다가 유일하게 안영호에게 대항하는 인물이다. 협박을 통해 돈을 버는 일에 불만을 제기하고 ‘당신은 아버지가 아니’라며 안영호를 직접적으로 살해한다. 과거를 알 수 없어 감정이입도 할 수 없는 인물, 무해가 벌이는 충격적인 사건은 마치 그가 ‘아버지’가 되지 못한 자를 무참히 벌하는 것으로 보이게 한다. 아버지의 세계, 가부장의 세계, 폭력의 세계에 분노한 무해는 심판자처럼 알을 깨고 새가 된다.
그의 이름이 ‘무해(無害)’인 것을 떠올린다면 극 말미의 가해(加害) 행동에 안타까움과 함께 아이러니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제목 <아빠 안영호 죽이기>는 ‘죽이다’라는 사동 표현을 사용했기에 가해자의 시점으로 쓰인 무해와 아이들의 이야기다. 비록 아버지를 죽이는 행위는 가해일지라도 연극 전체는 피해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유일하게 ‘안영호’에게만 익명을 부여하지 않은 이유는 버젓이 이름 석 자를 가지고 있는 수많은 어른에게 물음을 던지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극의 후반부 대사 ‘또 아버지를 가질 수 있을까?’라는 물음은 ‘안영호의 행동에서 자신을 보았는가? 안영호만의 잘못인가? 당신은 어떤 어른인가?’라는 질문으로 치환될 수 있다.
아이들은 비로소 알을 깨면서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법을 배운다. 그들은 다시 처음의 바다로 돌아가 여행을 꿈꾼다. 극의 ‘캐리어’는 여행 가방이면서 동시에 시체가 들어 있는 물건으로 여행의 자유와 현실의 잔혹함이 공존하는 유일한 오브제다. 오이디푸스 신화는 직면한 비극적인 운명을 회피하지 않고 ‘반성’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아버지의 세계를 깨뜨리고 나온 아이들도 다시 똑같은 세계를 반복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캐리어를 옆에 둔 아이들이 잘 항해할 수 있기를 바라는 관객 역시 오이디푸스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극에서 마주친 세계는 필연의 이름으로 어른에게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안영호의 세계가 반복되지 않도록 움직일 때 익명의 무해, 코다, 오카들이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