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물음표로 끝맺는 연극 <이갈리아의 딸들>

 

글_이민영

원작   게르드 브란튼베르그(Gerd Brantenberg)
각색/연출   김수정
제작   두산아트센터, 극단 신세계
장소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일시   2019년 10월 1일~19일

 

김수정 연출과 극단 신세계의 연극을 관람한 후 극장을 나서는 관객들의 머리 위에는 물음표가 하나씩 따라붙는다. 김수정 연출과 극단 신세계가 연극을 통해 관객들에게 던진 질문들이다. 이들은 다양한 사회의 단면을 비추는 작품들을 통해 관객에게 불편한 질문들을 안겨주지만 그에 대한 답이나 어떠한 해결방법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생각의 여지를 남겨두고 관객과 함께 이야기해나갈 수 있기를 소망하는 김수정 연출의 의도가 녹아든 지점이다. 이러한 그들의 작품 <그러므로 포르노>(2016) 에서는 상대를 고려하지 않고 강요를 퍼붓는 이 가학적 ‘포르노’가 정말 당신의 일상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가를 물으며 관객에게 불편함의 시각을 일깨우고, <광인일기>(2018) 에서는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시대 속 진정 광인은 누구인지 질문을 던지며 방관적 태도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2019년 지금, <이갈리아의 딸들>을 통해 이들은 다시 한번 관객에게 질문을 건넨다. 선생님, 정말 답이 없는 이 시대에 우리가 답을 찾아갈 수 있을까요?”라는 극 중 페트로니우스의 질문을 관객이 함께 사유하게끔 만드는 것, 그것이 김수정 연출과 극단 신세계가 관객들과 소통하는 방식이다.

 

 

불편한 유토피아, 이갈리아로의 여행

여자는 임신이라는 축복과 함께 아이를 낳고 사회 활동을 하며, 남자는 아이를 돌보면서 집안일을 하는 것이 당연한 나라가 있다. 성대한 생리축제가 펼쳐지고 소년들의 무도회가 열리는 나라, 이갈리아. 가이드가 관객을 이갈리아로 안내하고, 패션쇼장의 런웨이를 방불케 하는 인물들의 등장과 뮤지컬처럼 화려한 안무를 시작으로 이갈리아라는 유토피아적 세계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하지만 공연의 초반부 유토피아와도 같이 화려한 모습을 보인 이갈리아는, 극이 진행될수록 추악한 모습들을 드러내고 관객에게 불편한 감정들을 안겨준다. 약 160분간의 공연 속에서는 계급차별, 젠더갈등, 결혼제도와 가족, 성적지향, 미투운동 등의 현재 우리 사회 속의 수많은 담론들이 펼쳐진다. 이들은 모두 권력으로부터 비롯된 갈등이다. 그렇다면 이 ‘권력’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

 

 

젠더와 권력, 사회가 만들어낸 역할놀이

권력이 만들어지는 수많은 시작점들 중에서 <이갈리아의 딸들> 속 드러난 지점 중 하나는 ‘계급’이다. 극의 전체에 배치되고 있는 노동계급인 집사 콘필드와 메이드 바야는 이갈리아 속의 계급구조를 관객에게 끊임없이 상기시켜주는 역할을 하며, 페트로니우스와 그로의 관계 속에서도 계급차별의 문제가 드러난다. 그러나 극의 진행과 인물들의 행동을 통해 관객은 계급구조를 뛰어넘는 권력의 시작점이 존재함을 알게 된다. ‘노동계급’이면서 ‘여자’인 콘필드가 ‘지배계급’이면서 ‘남자’인 올모스에게 대항하며 메이드 바야를 데리고 집을 떠나는 모습, ‘지배계급’이면서 ‘남자’인 페트로니우스가 ‘노동계급’이면서 ‘여자’인 그로에게 저항하지 못하는 모습들은 계급 간의 차이를 넘어서는 젠더 권력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젠더(gender)’라는 것은 생물학적 성별(sex)이 아닌 ‘사회가 규정한 성별’을 이야기한다. <이갈리아의 딸들>은 이러한 젠더, 즉 여성스러움과 남성스러움이 그저 사회에 의해 만들어진 일종의 역할놀이일 뿐임을 이야기해준다. 극 속의 여자 배우들은 편한 복장 또는 권위를 드러내는 양복을 입고 무대 위 공간을 자유롭게 활보하며, 큰 동작 그리고 큰 목소리로 자신들의 존재를 마음껏 드러낸다. 반면 남자 배우들은 짧은 치마와 몸에 붙는 의상을 입고 하이힐을 신은 채로 조심스럽게 행동하며 상대의 눈치를 끊임없이 살핀다. 또한 원작 속 이갈리아의 남성들이 착용하는 페호(peho)는 연극에서 관객에게 더욱 직접적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좆브라’라는 명칭으로 변형되어, 그것이 현실 속 여성들의 속옷인 브래지어를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이러한 것들은 일종의 ‘미러링(mirroring)’이라고 볼 수 있다. 작품 속의 미러링은 여성스러움을 비롯한 젠더 권력이 얼마나 터무니없고 차별적인가를 여과 없이 드러내는 비틀기 장치로서 작용한다. 극 중 미러링이 이루어지지 않은 지점은 단 하나, 머리의 길이이다. 이에 대해 김수정 연출과 극단 신세계는 ‘신체발부 수지부모’라고 이야기한다. 이갈리아에서는 자랑스러운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머리카락이 여자들의 권력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또한 남자들은 결혼하여 부성보호를 받으며 떠나는 출가외인으로서 긴 머리를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들의 설명이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이 극 속에서 충분히 설명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모든 관객이 머리의 길이가 권력을 상징함을 알아채지 못하고, 그에 대한 미러링이 이루어지지 않음에 대해 아쉬움을 느끼는 부분이 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아쉬운 지점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극을 보며 젠더 권력의 불합리함을 직관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관객을 이갈리아로 안내하는 ‘가이드’라는 인물이 이끌어내는 효과이다. 가이드는 관객과 연극 사이의 ‘제4의 벽’을 과감히 무너뜨리고 “전환”이라는 대사와 함께 극을 진행해나간다. 이갈리아 안에 있으면서도 관객을 이갈리아로 이끄는, 관찰자이자 진행자로서의 기능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가이드는 거리두기를 통해 현실과 이갈리아를 넘나들며 극의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사회가 부여한 젠더라는 것이 역할놀이에 불과함을 계속해서 관객들에게 상기시켜준다.

 

 

관객들은 극의 전반에 펼쳐진 미러링 요소들과 가이드를 통한 풍자에 때때로 웃음을 터트린다. 하지만 이 성역할의 희화화를 바라보며 누구도 마음 편히 웃기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갈리아의 세계가 현실과는 확연히 다르면서도 익숙한 모순 때문에 경험하게 되는 불편함이다. 이러한 불편함은 고정된 성역할과 화목함 속 내재된 폭력, 그 자체에 대한 질문으로 연결된다. 극명하게 젠더 크로스 된 인물들을 통해 관객은 우리가 남성적이고 여성적이라 믿었던 특징들은 언제부터 전형성의 기준이 되었는지, 이 기준을 정하는 이는 누구인지, 이 권력은 어디에서 기인했고 어디로 움직이는지 질문하게 된다.(프로그램 p.16)

 

 

김수정 연출과 극단 신세계는 <이갈리아의 딸들>을 통해 젠더 권력이 난무하는 폭력적 현실에 대한 무감각함과 그러한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태도를 경계하라고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을 보다 노골적이고 비판적으로, 다소 불편한 시각으로 바라보라고 배우들의 눈을 통해 말하는 것이다. 나보고 뭘 어떻게 하라구요.” 라며 울부짖는 페트로니우스의 대사를 마지막으로 배우들은 천천히 극장 안의 관객들과 시선을 맞춘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하는 질문을 관객에게 던져버리는 것이다. 오랜 시간 정적에 휩싸인 채 관객과 시선을 맞추던 배우들은 관객의 입·퇴장로로 걸어 나가며 이 질문을 현실로까지 확실하게 가지고 나간다.

이 극이 던져낸 질문들의 답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이는 정답이 없는 물음일 수도 있다. 하지만 권력의 근원을 탐색하고, 여성성과 남성성이 사회에 의해 만들어지고 교육된 것임을 인지해가는 과정이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 길잡이가 되어줄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이갈리아의 딸들>이 건넨 정답이 없는 문제들을 계속해서 풀어나가려 고민하고, 불편함을 마주하고 사유하며 이 시대를 극복해낼 방법을 찾아나가야 할 것이다.

 

 

2019년에도 김수정 연출과 극단 신세계는 연극의 마침표를 물음표로 찍는다. 사회가 만들어낸 역할놀이의 배우가 되지 않기 위해, 내가 나로서 살아가기 위해 관객들은 그들이 던지는 물음표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새로운 세상은 없습니다. 새롭게 사는 방법만 있을 뿐입니다.”라는 극 중 대사처럼 새로운 세상은 없으니까, 우리는 새롭게 살아가려 발버둥 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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