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멀 라이프 미니멀 스테이지

– 최소의 장치로 최고의 효과를 이끌어낸 연극 <오만과 편견>

 

글_김영은

 

원작   제인 오스틴(Jane Austen)
각색   조안나 틴시(Joannah Tincey)
번역   김희수
연출   박소영
제작   달 컴퍼니
장소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
일시   2019년 8월 27일 ~ 10월 20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연극을 만드는 연출가에게 표현에 관한 물음은 필연적이다. 같은 서사라고 할지라도 연출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관객에게 전달되는 정서와 주제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빌렘 플루서의 말처럼 오늘날 우리는 방대한 정보와 기술의 발전으로 다양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단순히 텔레마틱 정보 사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아날로그 예술로 꼽히는 연극 분야에서도 적용된다. 오늘날 많은 연출가가 화려하고 파격적인 방식으로 이목을 끌고 있는 지점에서 박소영 연출가의 연극 <오만과 편견>은 다른 의미로 파격적이다.

 

 

미니멀한 무대. 완성되지 않은 액자와 몇 개의 가구가 전부였던 무대의 첫인상이다. 군더더기 없이 서사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로만 남겨진 무대에서는 무엇을 제외할지보다는 무엇을 남겨둘지를 고민한 흔적이 역력했다. 다원화된 현대 사회 속에서 본연의 가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사회 풍조인 미니멀 라이프가 등장했을 때처럼 말이다. 삶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만 소유하고자 하는 미니멀 라이프처럼, 간결한 무대에서는 화려한 장치보다 서사에 집중하겠다는 일종의 자신감 혹은 비장함까지 엿보였다. 박소영 연출가는 한 인터뷰에서 연극 <오만과 편견>을 무대가 아닌 두 배우에게 집중되는 무대로 정의했다. 그녀의 말처럼 2인극으로 진행되는 연극 <오만과 편견>은 다른 어떤 요소보다 배우의 역할이 컸다.

 

 

이 연극의 원작이 되는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은 여성에게 참정권과 재산 소유권이 허용되지 않는 18세기 영국의 불합리한 사회 제도와 그 속에서 탄생하는 다양한 인물상들을 사랑이라는 부드러운 방식을 통해 세밀하게 전달한다. 이 길고 방대한 서사를 단 두 명의 배우가 성별과 나이, 직업 등 각기 다른 21개의 캐릭터를 모두 소화해가며 표현해야 하기에 극에서는 무엇보다 배우의 역할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두 명의 배우는 인터미션을 제외하고 등장 이후 단 한 차례의 퇴장도 없이 극을 이끌어간다. 2인극의 경우 제한된 무대에서 표현할 수 있는 한계가 있기에 보편적으로 1시간 내외의 짧은 공연으로 진행한다. 이에 비해 150분의 상영 시간을 가지고 있는 <오만과 편견>의 경우 과도하게 긴 시간으로 비춰질 수 있으나, 원작 소설의 분량만 500쪽이 넘어간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그리 길지 않은 시간임을 알 수 있다. 150분이라는 시간 동안 보다 효율적인 극의 진행을 위해 메리 베넷과 같은 중심 서사에 불필요한 인물은 과감하게 생략된다. 생략된 인물이 등장하는 지점에서는 실제로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치 눈에 보이는 것처럼 두 배우가 상대역 없이 허공을 바라보고 연기한다. 또한 리지와 다아시 사이에 긴 침묵이 흐를 때는 배우가 직접 “긴 침묵”이라고 소리 내어 말한 뒤 곧바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데 이 역시 불필요한 공백 시간을 최소화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이 지점에서 관객은 불필요한 부분을 최소화하고 중요한 부분에 집중하려는 연극의 미니멀한 특징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다.

 

 

연극의 역할 배분에서도 보다 효율적으로 진행하려는 시도가 엿보였다. 2인극의 경우 동선에 큰 변화를 주거나 환복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하다. 그 때문에 관객의 시선을 환기해줄 수 있는 지점이 없어 극적 흥미가 떨어질 수 있다. 연극 <오만과 편견>은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는 이 지점을 빠른 대사 주고받기를 통해 타파한다. 두 배우의 빠른 대사 주고받기를 보는 관객은 마치 흥미로운 탁구 경기를 보는 것처럼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극적 흥미를 느낄 수 있다. 빠른 대사 주고받기를 원활히 진행하기 위해 두 배우의 역할은 자연스럽게 주는 역할과 받는 역할로 나뉘게 된다. 이를테면 제인이 빙리에게 주는 대사보다 리지에게 주는 대사 분량이 더 많기 때문에 제인과 리지를 서로 다른 배우가 표현하는 것이다. 이렇게 배역을 나눌 경우 그 반대의 연출 방법보다 배역의 구분이 또렷하게 이루어지기에 관객의 입장에서도 배우가 연기하는 수많은 역할을 훨씬 수월하게 구별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흥미로운 효과가 나타난다. 배역의 성적 구별이 사라지는 젠더 프리 캐스팅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여자배우가 남성 캐릭터인 빙리 역을 맡고 남자배우가 여성 캐릭터인 제인 역을 맡게 되는 식이다. 성별 구분이 사라진 배우의 연기를 바라보며 관객은 극에 대한 지나친 몰입에서 벗어나 적절한 거리감을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 미세스 베넷이 제인에게 “마을에서 제일 예쁜 외모를 가진 우리 제인”이라 부를 때 수줍게 머리를 넘기며 대답하는 남자배우의 외양을 보며, 관객은 기존의 자신이 상상하던 아리따운 제인의 이미지와의 괴리감을 강하게 느끼고 이는 곧 심리적 거리감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거리감은 관객으로 하여금 당대 18세기 후반의 영국의 불합리한 사회 구조를 더욱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준다. 여자배우가 표현하는 제인을 보았을 때 보다 남자배우가 표현하는 제인을 보았을 때 제인이 가지고 있는 수동적인 특질들이 더욱 눈에 띄기 때문이다. 관객은 제인의 특질을 보며 18세기 영국 사회의 전형적인 여성상을 더 또렷하게 느낄 수 있다. 마찬가지로 키가 크고 목소리가 굵은 남자배우의 빙리보다 키가 작고 목소리가 얇은 여성배우의 빙리를 볼 때, 똑같이 일하지 않아도 베넷가의 딸들과는 달리 경제적으로 부유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18세기 영국 남성 빙리를 더욱 객관적으로 느낄 수 있다. 이처럼 젠더 프리 캐스팅은 당시 영국 사회의 잘못된 관습이 남성에게 부여한 오만과 여성에게 부여한 편견, 그에 대한 갈등 해소 과정을 탁월하게 묘사하는 <오만과 편견>의 서사와 어우러져 깊은 주제 의식을 전달한다.

 

 

물론 미니멀하게 표현하는 방식이 장점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분명 연극 <오만과 편견>은 친절한 연극은 아니기 때문이다. 21개의 캐릭터가 순간순간 변화하기에 원작 서사를 알지 못하는 관객의 경우 흐름을 이해하는 데 부담을 느낄 수 있다. 또한 배우의 비중이 큰 만큼 연출의 비중은 줄어들 수밖에 없기에 무대 연출의 화려함을 기대하고 관람할 경우 흥미가 반감될 수 있다. 더불어 다아시의 고백을 대사가 아닌 “다아시는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보다 자신의 자존심을 더 많이 표현했습니다.”로 표현하는 것처럼 빠른 진행을 위해 몇몇 부분을 대사가 아닌 내레이션을 통해 전달하는데, 달콤한 대사를 느낄 수 있는 로맨스 연극을 원한 관객에게는 김이 빠지는 표현 방식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스터 베넷은 파이프 담배, 미세스 베넷은 손수건, 콜린스는 모자, 남작 부인은 지팡이, 캐롤라인 빙리는 부채, 치마를 걷으면 빙리, 치마를 내리면 리즈, 어깨띠를 메면 위컴, 머리카락을 돌돌 말면 리디아, 안경을 쓰면 샬롯, 숄을 걸치면 미시즈 가드너 등과 같이 연극 속에서 각 캐릭터는 자신을 대표하는 오브제를 가지고 있으며 배우 역시 오브제를 강조하며 극을 진행한다. 그 때문에 관객은 서사를 알지 못해도 현재 발화자가 누구인지 파악할 수 있다. 더불어 <오만과 편견>의 배경과 인물의 잦은 변화에 익숙하지 못한 관객을 위해 극을 시작하기 전 작품 속 배경을 담은 지도와 인물 관계도를 도식화하여 나누어주기에 원작을 읽어보지 못한 관객 역시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남작 부인과 다아시의 화려한 저택에서는 조명을 강하게 사용하고 베넷가의 집과 산책을 하는 부분에서는 조명을 은은하게 사용하며, 편지를 낭독하는 장면에서는 스포트라이트를 사용하는 등 조명의 효과만으로도 충분히 미니멀한 무대 장치를 보완하여 표현하고 있는 만큼 큰 단점으로 꼽을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2인극으로 표현되었기에 다른 곳에 시선을 뺏기지 않고 오롯이 열변을 토하며 생명력을 마구 뿜어내는 배우와 배우의 안내에 따라 울고 웃어가며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함께 읽어나가는 관객의 호흡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이렇듯 연극 <오만과 편견>은 불필요한 모든 것을 최소화하고 배우, 관객, 희곡만을 남긴 채 무대를 완성한다.

극 중 다아시는 위컴에 대해 “그는 좋은 인상 덕에 친구를 잘 사귑니다. 그러나 그가 관계를 잘 유지한다고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라 말한다. 점차 화려해지는 삶의 방식에 자신을 맞추다 본연의 색을 잃는 현대인들에게 그의 말은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미니멀 라이프를 꿈꾸지만 정작 맥시멈 라이프 속에서 헤매는 평범한 ‘우리’에게 연극 <오만과 편견>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방식이 무엇인지 다시금 짚어주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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