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직 격려가 필요하다
연극 <오펀스>
글_이태나
원작 라일 케슬러(Lyle Kessler)
번역 성수정
각색/연출 김태형
제작 ㈜레드앤블루
장소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1관
일시 2019년 8월 24일 ~ 11월 17일
최근 위로의 말이 담긴 에세이 부류의 도서들이 서점가를 휩쓸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바로 일상 속에서 격려와 위로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많이도 치열하고 부단히도 노력하며 살아간다. 인생을 시작하는 출발선의 위치는 사람마다 다르다. 출발선이 너무 앞에 그려져 있는 사람을 탓할 필요도, 너무 뒤에 그려져 있는 사람을 탓할 필요도 없다. 그냥 자신의 출발선에서 천천히 나아가면 충분하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넘어지면 도태되고, 비난과 힐난의 화살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잘못된 경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세태가 당연시되는 사회 속에서 소외와 차별은 빈번하게 자라나고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넘어지고 쓰러지는 사람을 일으켜 세워줄 수는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서 뒤처지는 사람들을 찾아내 꼭 일으켜줘야 한다. 그리고 말해주어야 한다. 네 탓이 아니라고, 넌 혼자가 아니라고 말이다. 따뜻한 말의 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힘을 가진 연극이 바로 <오펀스>이다.
<오펀스>는 고아 형제 트릿과 필립에게 해럴드라는 존재가 개입하게 되어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이다. 이 과정에서 트릿과 필립이라는 인물들에게서 나타나는 행동의 차이를 중점으로 극은 전개된다. 트릿은 욕설과 거친 행동을 일삼고 다니며 동생 필립이 외부와 소통을 하는 것을 끊임없이 주시하며 막으려고 한다. 그러나 자꾸만 과장해서 자신의 공격성을 드러내는 모습이 어딘가 좀 어설퍼 보이기도 하고, 안쓰러워 보인다. 마치 자신의 존재를 강하게 확인시키려는 느낌이 든다. 반면 동생인 필립의 세상은 허름한 집 안이 전부이다. 형의 말들이 그에겐 곧 법이었기 때문이다. 집 안에서는 한 가지 색깔의 타일만을 밟을 수 있고, 가구 위를 뛰어다니는 그의 모습은 어딘가 위태로워 보인다. 그러나 창문 밖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궁금해하며, 미디어를 통해 나오는 상황들에 끊임없이 호기심을 갖고 몰래 외부와 소통하려고 할 때만은 눈빛이 살아난다. 이런 형제에게 해럴드라는 존재가 개입하게 되며 본격적인 극이 시작되는 것이다.
필립에게 해럴드는 선생님이 되고, 트릿에게 그는 보스가 된다. 해럴드는 운동화 끈을 못 묶는 필립을 위해 로퍼를 사주고, 헬멧 마요네즈가 아닌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음식을 만들어준다. 필립은 그로 인해 많은 것을 배우고, 의지하고 격려받으며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트릿 역시 초반에 적대적인 모습과는 달리 점점 그에게 충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필립과 반대로 여전히 공격적이고, 격려와 의지를 받으려 하지는 않는다. 제대로 된 임무를 달라고 재촉하고, 필립이 해럴드와 깊은 유대관계를 맺는 것을 불편해한다. 필립이 성장할수록 다시는 자신이 필요하지 않을까 봐, 그래서 자신을 떠나버릴까 하는 두려움이 내면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의 후반으로 갈수록 격려와 위로를 받은 필립과 그것을 거절한 트릿의 모습은 정반대로 드러난다. 필립은 해럴드로 인해 성장하는 모습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더는 집안에만 갇혀 있어야 하는 밤공기 알레르기가 있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지도를 볼 수 있게 되었고, 어디든 나갈 수 있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를 깨닫는 모습을 통해 필립은 완전한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온전히 자신을 위해 살아갈 수 있었기에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트릿은 점점 어린아이가 되어간다. 집에 들어왔을 때 필립이 없다는 것을 알고 주체할 수 없이 두려워하고 불안해한다. 계속해서 의지할 곳, 의지할 사물들을 찾아 헤매다 과거 필립이 하던 행위인 엄마의 코트가 가득한 옷장에 몸을 숨기고, 엄마의 코트에 코를 박고 웅크린다. 누군가에게 버림받지 않으려고만 했지 정작 자기 자신을 돌보지 못한 트릿은 결국 그렇게 점점 어린아이가 되어가는 역행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서 나타나는 트릿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해럴드가 말하는 ‘앵벌이 키즈’의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다. 해럴드는 트릿과의 첫 만남부터 그를 앵벌이 키즈라 칭한다. 이것은 단순히 해럴드의 유년 시절을 함께 보냈던 텔레비전 속 앵벌이 키즈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어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트릿은 부모 없이 어린 동생인 필립을 보호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 동생을 사회와 격리했고, 마치 동물이 보호색을 띠듯이 자신을 공격성으로 무장해야만 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자신의 필요성을 드러내려고 몸부림친다. 그렇게 그는 필립에겐 부모의 역할을, 해럴드에겐 충실한 부하의 역할을 수행해야만 했다. 그래야 자신이 버림받지 않을 거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연극은 격려라는 확고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연출에도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극이 가진 메시지가 명확하게 전달되기 위해서는 관객들과 극 중 인물들 간의 교감이 이루어져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관객들은 극 중 인물들에게 온전히 몰입할 수 있어야, 더 나아가 인물들과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어야 했다. 극에서 쓰인 음향과 조명은 이 역할을 적절하게 이루어냈다. 특히 필립의 성장 과정을 보여줄 때 등장하는 노란색의 조명과 느리지만, 어딘가 몽환적인 분위기의 음악이 접목되어 활용되는 장면을 통해 관객들은 큰 위로를 주고받는다. 노란색 조명은 해의 이미지와 더불어 앞으로의 필립의 새로운 시작과 밝은 에너지를 느끼게 해준다. 더불어 음악은 느린 템포를 통해 잔잔하지만 차분한 느낌을 준다. 이는 관객들이 필립의 이야기에 온 신경을 집중시킬 수 있도록 도와준다. 조명과 음악이 완벽히 어우러질 때, 관객들은 필립의 새로운 시작을 함께 응원하고 격려하게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역시 노란색 조명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형제가 갈등을 풀고 서로에게 격려와 위로를 해줄 수 있을 때 비로소 그들의 주변을 노란 조명이 감싸게 된다. 트릿은 필립의 운동화 끈을 묶어주고, 필립은 집 안의 모든 색깔의 타일을 밟을 수 있다. 이는 형제가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어줄 수 있는 성숙한 어른이 되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해럴드의 죽음에는 안타까움이 남았다. 극에서 해럴드는 어깨를 주무르는 행위의 주체로서만 드러났기 때문이다. 해럴드가 이 고아 형제에게 힘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과거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온다. 그 역시 고아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해럴드가 어떻게 성장했고, 그의 위로는 어디에서부터 올 수 있었던 것인지가 극에서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고아 출신일 때 그가 겪은 힘들었을 시기들을 추측할만한 대사들만이 존재한다. 힘든 시기를 지나온 그는 자신이 겪었던 아픔을 그대로 겪고 있는 형제를 보고 지나칠 수 없었을 것이고, 이 불쌍한 앵벌이 키즈의 집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해럴드 역시 불쌍한 앵벌이 키즈에 불과했다. 트릿은 해럴드가 죽어 축 늘어져 있자 그제야 그의 손을 잡아본다. 그리고 자신은 그 빌어먹을 앵벌이 키즈가 맞다고 인정한다. 두 앵벌이 키즈 해럴드와 트릿의 접촉이 그의 생전에 이루어질 수 없었다는 것에서, 트릿과 해럴드 간의 소통에 진한 아쉬움이 남았다.
<오펀스>는 관객들에게 격려와 위로의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한다. 그리고 연극을 보는 내내 우리는 해럴드, 필립, 트릿에게 위로를 건네고, 위로를 받는다.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은 정해져 있지 않다. 그리고 이는 우리 현실에도 적용되어야 할 사실이다.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외면한다면, 계속해서 앵벌이 키즈들이 생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 격려가 필요하다. 약간의 관심과 조금의 격려가 누군가에게 힘을 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생각해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더욱 성장할 것이다. 연극이 끝나고 나서도 이 형제가 또 다른 앵벌이 키즈들에게 해럴드의 역할을 해줄 것이란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그들이 행복하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