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집힌 것에 닿는 세 가지 방법

연극 <와이프>

 

글_이효리

 

원작   사무엘 아담슨(Samuel Adamson)
각색   윤성호
번역   이나리, 이주리
연출   신유청
제작   서울시극단
장소   세종S씨어터
일시   2019년 10월 1일 ~ 6일

 

 

세상에 과연 무조건적으로 옳은 것이나 그른 것이 있을까? 오늘날 우리는 법에 저촉되지 않는 선에서 서로의 다양성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살아간다. 클래식 음악을 듣는 사람이 힙합 하는 사람을 비난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아직 까지도 사회는, 성적 취향에 대해서 만큼은 정성스러운 참견을 아끼지 않는다. 취향은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이라는 사전적 의미가 말하고 있듯이 아주 개인적인 기호라서 누구도 함부로 평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만큼 동성애나 이성애는 이분법적으로 나뉠만한 호불호의 문제가 아니며, 자연스럽게 우리의 삶을 이루는 개개인의 선택이라는 것을 우선적으로 말해 두고 싶다.

 

 

연극 <와이프>는 바로 이러한 성적 지향점의 다양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총 네 가지 시간적 배경과 네 쌍의 커플을 통해 순차적으로 전개되는데, 그 중 첫 부분은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의 마지막 장면이다. 일종의 극중극 이라고 볼 수 있다. 노라가 자유를 찾아 문을 박차고 나오면서 진짜 연극이 시작된다.

 

 

노라 역을 맡은 여배우 수잔나는 유부녀인 데이지와 비밀스러운 애정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당시는 1959년으로, 동성애가 무려 ‘법’으로 금지되고 있던 때다. 두 사람이 백 스테이지에서 대화할 때 데이지가 말한다. 아버지가 자신의 성적 취향에 대해서 ‘뒤집혔다’는 표현을 사용했다고 말이다. 여기서 뒤집혔다는 말의 뜻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틀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사랑하는 모습은 지극히 평범해 보인다. 서로를 걱정하고, 쓰다듬는 애정 어린 손길은 이성 간의 연애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그 때는 그게 올바르지 못한 것이라고 규정되어 있었을 뿐더러, 남편의 강제에 의한 데이지의 임신으로 인해 둘은 헤어진다. 결국 시대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삶에서 주체가 될 수 없었던 이들의 짧은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 난다.

 

 

이와 같은 동성애, 즉 ‘뒤집힌 것’은 작품 속 다양한 연극적 장치를 통해 관객에게 접근하고 있다. 이를 통해 작품이 담고 있는 메시지에 관객을 융화 시키려는 노력을 찾아볼 수 있는데, 그로 말미암은 효과들이 흥미롭게 느껴진다. 관객이 작품의 의미에 닿을 수 있도록 하는 방법 중 하나는 배우의 활용이다. 연극에서 한 배우가 다중 역할을 하는 것은 매우 보편화 되어 있다. 그런데 <와이프>에서는 이러한 기법이 주목할 만한 효과를 가진다. 동성애가 합법화된 이후인 1988년에는 바(Bar)를 배경으로 게이 커플 한 쌍이 등장한다. 바로 데이지의 아들인 아이바와 그의 연하 남자친구인 에릭이다. 아이바는 에릭과의 관계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하는 적극적인 성격이다. 반면 에릭은 아직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여기서 아이바는 데이지의 남편 역할로 등장했던 배우가 연기한다. 앞서 가부장적 이미지를 보여 준 인물이 여기에서는 유혹에 능한 게이로 분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그는 여자친구와 결혼을 앞둔 이성애자 역할로도 등장한다.

 

 

이렇게 배우에게 다중성을 부여한 경우는 또 있다. 2019년 현재 장면에 등장하는 나이 든 아이바는 1988년 술집에서 게이 커플을 혐오하며 폭언 하던 술집 주인을, 더 과거에서는 1959년 여배우 수잔나를 짝사랑하던 톨발 역의 남배우 피터를 연기했던 배우다. 그리고 초반에 동성애자인 데이지를 연기했던 배우는 2019년 장면에서 남자친구와의 약혼을 앞둔 클레어 역할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배우의 잇따른 역할 변화로, 관객은 배우가 연기한 모든 캐릭터들의 속성을 그 배우 한 사람이 가진 것으로 통합해서 받아들이게 된다. 이는 결국 여러가지 속성들이 완전히 구분되지 않고 각 배우에게로 회귀하는 효과를 발생시킨다.

 

 

<와이프>는 이 과정의 반복을 통해 동성애나 이성애가 다른 세상 이야기나 특출난 사항이 아니라,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개개인의 가치관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동성애를 하던 사람이 이성애자로 나오고, 반대로 이성애를 하던 사람이 동성애자가 되는 극 중 변화는 어색함 없이 자연스럽고 또 자유스럽다. 뒤집힌 것이 안 뒤집힌 게 되고 그 반대의 과정 역시 돌출되지 않아, 관객은 배우들의 연기하는 인물들의 성적 취향 변화에 대해 별다른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다. 즉 관객은 인물이 동성애자나 이성애자인 것에 대해 크게 의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배우의 다중 역할을 통해 다양한 성적 취향에 대한 낯선 인상을 지웠다면, 다음으로는 무대 배치가 관객과 작품 사이의 거리감을 대폭 줄인다. <와이프> 무대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무대와 객석 사이의 거리가 매우 가깝다는 것이다. 기존의 OP(Orchestra Pit)석을 걷어내고 그만큼의 무대 공간을 확장했기 때문이다. 비교하자면 마치 우리나라 전통 마당놀이 처럼 무대가 코앞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러한 무대 구성은 관객으로 하여금 극에 대한 몰입을 돕는 기능을 가진다. 여기서 말하는 몰입은 단순히 극에 대한 이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극 중 상황과의 일체감을 의미한다. 여타의 작품에서는 무대와 객석이 거리를 두고 있어, 관객은 작품과 자신을 의식적으로 분리하게 된다. 그런 만큼 100% 완벽한 몰입은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등장 인물들의 삶이 바로 눈 앞에서 펼쳐지기 때문에, 관객은 몰입을 넘어서 작품과 하나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효과는 우리 주변에 이성애자가 흔한 것처럼, 사회 안에는 마땅히 동성애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즉각적으로 피부에 와닿게 한다. 즉 동성애가 책이나 영화, 인터넷 커뮤니티에나 올라오는 풍문이 아니라 실재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것도 관객들의 바로 옆에 말이다. 이는 이성애와 동성애가 양극단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한 연출적 노력을 엿볼 수 있는 요소인 것 같아 꽤나 인상적이다.

 

 

또한 소품의 활용 역시 작품의 메시지에 가까워지도록 관객을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거울이 그렇다. 이 작품에서는 초반과 후반에 극중극 <인형의 집>의 마지막 장면이 동일하게 펼쳐진다. 그리고 노라 역을 맡은 과거와 미래의 수잔나가 백 스테이지로 돌아오면, 무대 중앙에 있는 그녀의 화장대 거울이 객석을 향해 있다. 이를 테면 수잔나가 분장을 지우는 장면에서는 객석을 등진 채로 거울을 보는 형태다. 이 거울은 환한 알 전구가 달려 있어 돋보인다.

 

 

보통 연극에서 거울은 인물이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일종의 성찰 유도 장치로 쓰이곤 한다. 이 작품에서도 역시 같은 목적으로 사용되는데, 중요한 건 그 대상이 바로 관객을 향해 있다는 포인트다. 관객들은 거울을 통해 자신을, 그리고 다른 관객의 표정을 살필 수 있다. 만약 배우의 연기에 집중했다면 이를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무대에 거울이 있었다는 걸 인지했다면 관극 이후에도 관객들의 표정이 어땠을지 충분히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와 같이 거울에 담긴 관객들의 표정 하나 하나가 연극의 일부가 되었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극 초반의 백 스테이지 장면에서는 분명 낯선 장면들에 대해 당혹스러운 눈빛을 보낸 관객들이 있었을 것이다. 동성 커플에 대한 관객의 이러한 우려는 거울 속에 담긴 채 뒷 이야기에 대한 추진력이 된다. 여전히 잔재하는 사회의 혐오적 인식과 우려의 목소리가 그대로 전해져 다음 장면의 후세대 인물들에게 파장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반부의 백 스테이지에서 관객은 더 이상 인물들을 불편하게 바라보지 않는다. 중간의 서사를 통해 여러 가지 사랑의 형태를 목격, 그리고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 거울에는 관객들이 보낸 연대의 눈빛이 담긴다. 그건 미래의 수잔나와 데이지, 아니 세상의 모든 성 소수자에 대한 응원과도 같을 것이다.

 

 

이처럼 연극 <와이프>는 다양한 모습의 사랑을 보여주었고, 또 관객은 거기에 스며들어 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사랑하는 마음 하나면 충분하지 않느냐고 수잔나에게 묻던 데이지의 말처럼 그들의 사랑은 진심이었고, 뜨거웠다. 동시에 관객은 잠시 나마 그들 곁에 닿을 수 있었는데, 이와 같이 수용자에게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는 예술의 순기능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의의를 발견할 수가 있다. 이제 ‘뒤집혔다’는 이유로 사냥 당하는 마녀들은 있어선 안 될 것이다. 물구나무 서서 세상을 본다 한들 무엇 하나 달라지는 것이 없음을, 오늘날의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