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아이를 죽이는 부모에게!
멈추세요!
연극 <당신과 상관없는 이야기>
글_오유경(극단 그룹動·시대 연출)
작/연출 박근화
제작 예술공동체 단디
장소 소극장 봄
일시 2019년 10월 16일 ~ 27일
관극일시 2019년 10월 22일
저 아이는 왜 어떤 이유로 아파야 하나요?
저 아이는 왜 잘못도 아닌데 미안해 하나요?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나요?
행복이 중요하다면 저 아일 놓아 주세요.
저 아이는 왜 어떤 이유로 아파야 하나요?
저 아이는 왜 혼자서 어떻게 하나요?
당신은 무엇을 듣고 살아가나요?
사랑한다면 저 아이의 말을 들어 주세요.
오오-
부모에게 죽은 아이들에 관한 뉴스가 이 노래와 함께 계속 계속 반복된다.
소극장 봄은 아주 작은 극장이다.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 3기 연출가 동인이었던 본인은 이 소박하고 어눌하고 풋풋한 수줍은 공간이 친근하고 설레였다. 하지만 분명 많은 결점이 예상되었고, 그 예상대로 찰진 공연이 되는데 방해가 되었다. 그중 가장 최악의 조건은 방음과 소리의 울림이었다. 공연 내내 공간 안에 공허하게 울리는 소리는 안 그래도 적은 예산으로 올리는 공연을 더욱 비어 보이게 하였고, 그날따라 관객도 적어 작품의 내용만큼이나 쓸쓸함이 더했다.
작품 <당신과 상관없는 이야기>는 재개발지역으로 이미 마을의 공동화(空洞化)현상이 상당히 진행된 어느 동네가 배경이다. 이웃들은 거의 모두 떠나고 곳곳에 빈집들이 생겨 왠지 동네 자체가 버려진 것처럼 쓸쓸한 곳. 아직 이사 가지 않고 남아있는 몇몇은 소주나 막걸리를 마시며 소박한 이웃의 정을 나눈다. 너나없이 가난하고 뾰족한 수가 없는 부족하고 팍팍하고 한숨 많은 인생들의 동병상련(同病相憐)이 오히려 요란스럽지 않지 않고 정겹다.
이러한 동네 배경을 작품 <당신과 상관없는 이야기>의 무대는 잘 표현해준다. 마치 거친 담벼락에 동네 아이들이 그린 낙서처럼, 무대를 이루는 까만 벽에는 하얀 분필로 전봇대가, 마을의 돌계단이, 어느 집 담벼락에 핀 잡초도 그려져 있다. 무대 중앙 주요 연기공간에 놓인 바퀴 달린 까만 상자 3개는 탁자도 되고 의자도 되는데, 이동할 때마다 무방비로 울리는 바퀴 소리 때문에 관객의 의식이 가끔 극에서 빠져 나와 열악한 공연조건의 현실을 깨닫게 한다.
돌연 사건이 일어난다. 많은 빚에 시달리던 민구 가족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고 건물 옥상에 올라선 것이다. 민구의 부모와 민구. 그들은 옥상에서 뛰어내려 동반 자살하려 한다. 이웃들은 이들의 계획을 말리려고 건물 아래에 모여 서로 돌아가며 갖은 이유로 설득하려 하지만 역부족이다. 민구네가 처한 비정한 현실 앞에서 그들이 내놓는 살아야 할 이유들은 모두 정당성을 잃고 말기 때문이다. 현실은 환상이 아니다. 현실의 각박함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어찌 지금 잠시 살기를 택한다고 하여도 현실은 그 잔인함을 멈추지 않을 테니, 언젠가 그들은 또 오늘처럼 옥상에 올라설 것이기 때문이다.
작품 <당신과 상관없는 이야기>에서 민구의 부모는 배우를 통해 현존하지 않고 민구만 존재한다. 부모는 대사도 없다. 부모의 움직임은 자살을 말리려는 이웃의 눈과 말, 반응 속에서만 짐작하여 알 수 있다. 민구는 옥상으로 여겨지는 주요 연기공간의 뒤쪽에 마련된 작은 공간에 있다. 그 공간은 두 개의 아크릴 벽으로 분리되어 있는데, 이는 민구의 움직임이 잘 보이도록 한다. 연출은 민구가 마치 물고기가 어항에 갇혀있는 것처럼 표현하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두 개의 아크릴 벽은 그런 의도보다는 오히려 다른 장면에서 조명의 효과와 함께 아름다운 미장센(mise-en-scene)을 만든다.
이웃 중 한 여인은 민구만은 살리려고 민구의 부모를 설득하는 다른 이웃들과 달리, 어쩌면 미래가 없는 세상에 어린 민구만 남겨두고 떠나느니 어차피 죽을 것을 되돌리지 못한다면 민구도 부모와 함께 차라리 지금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의 심연에는 그녀의 어두운 과거가 있다. 그녀의 부모도 그녀를 혼자 두고 동반 자살했기 때문이다. 부모가 떠난 후 혼자 세상에 던져진 그녀는 잔인한 성장기를 거쳤고 살아오는 내내 그때 차라리 죽는 것이 나았다고 되뇌었었다. 두 개의 아크릴 벽은 이 여인의 과거의 장면에서 빛과 함께 거울 효과를 얻게 되는데, 그녀의 모습이 일그러진 모양으로 일렁이며 투영되면서, 장면의 정서를 극대화하였다.
열악한 공연조건 속에서도 작품 <당신과 상관없는 이야기>가 가진 또 다른 미학은 1인 다역(多役)의 독특한 연기방식에 있다. 민구 부모를 설득하려는 이웃들. 그들은 설득의 과정에서 자신들의 과거를 떠올리며 과거 그때로 돌아가는데, 배우들은 각각의 과거의 주인들은 그대로 연기하고, 그 과거 속에 다른 인물로 존재하는 배경의 인물들은 현재에서 멈춘 그림처럼 동작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과거 속 배경 인물들의 말을 살아있는 대사로 표현한다. 조명은 오로지 과거 장면의 주인에게만 비추고 말로만 존재하는 배경 인물들은 어둠 속에 존재하도록 함으로써, 현실에서 멈춘 그 동작의 특징들을 그대로 유지하는 모습이 효과적일 수 있도록 고안한다. 매우 지혜로운 선택이다.
이웃들의 대사는 일상의 사실적인 말로 표현하고 민구의 대사는 이와 달리 매우 서사적이다. 마치 민구가 자신의 일기장을 읽어 내는 것 같다. ‘나는 ○○한다’로 표현되는 민구의 대사는 민구를 이 사실적인 상황에서 제3의 인물로 낯설게 하는 효과를 낸다. 또한 관객들은 동반자살이라는 사건에 감정이입 하기 보다,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부모로 인해 죽임을 당할 처지에 놓인 아이의 일방적인 피해 사실을 냉정하게 바라보게 한다. 부모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아동학대. 자신의 아이의 생명을 부모라는 이유만으로 생명을 앗아갈 권리가 있는 것인가.
어른들은 혼란과 공포로 허둥대며 떠들어댄다. ‘아이만 살았을 때 누가 아이를 키울까. 가난, 가난, 가난. 불행, 불행, 불행. 아이만 살았을 때 누가 평생 도와줄 거야? 사는 게 지옥이라면 지금 끝내는 게 나아.’ ‘부모를 살게 해야 아이가 살텐데…’ 어디에도 아이의 의사를 묻는 어른들은 없다. ‘민구야! 너 살고 싶니? 그럼 죽고 싶지 않다고 말해!’ 라고 민구에게 말하는 어른들이 없다. 그들은 그들이 책임질 수 없는 무기력한 딜레마에 빠져 오히려 허둥대기만 하고 있을 뿐.
작품 <당신과 상관없는 이야기>는 그렇게 끝난다. 정말 민구와 상관없이 관객은 민구가 아닌 소란한 민구의 이웃 어른들만 잔뜩 목격하고 극장을 나선다. 민구 가족은 어떻게 되었을까. 민구는 살았을까. 관객은 정말 상관없는 방관자로만 존재하는 자신을 뒤늦게 깨닫는다. 아이 문제만큼은 적당히 허울 좋은 관심과 도움으로만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 아이의 생명을 지키려면 부모 못지않게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는 것. 그런 용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그래야만 겨우 아이 하나를 살게 하고 성장시킬 수 있다는 것. 섣부른 동정심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작품 <당신과 상관없는 이야기>는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어른들이여! 이 아이 생명의 권리를 부모에게만 맡길 수 있는가. 에휴. 본인도 허둥대고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