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과 즉흥 사이

뮤지컬 <힐링 인 더 라디오>

 

글_최승연(청강문화산업대학교 공연예술스쿨 교수, 뮤지컬 평론가)

 

/연출   안혜진
제작   R&J 아트컴퍼니
장소   R&J 씨어터
일시   2019년 11월 13일 ~ 12월 29일
관극일시   2019년 11월 24일 오후 7시

 

 

현재 국내 뮤지컬씬은 몇 개의 그룹으로 나뉜다. 라이선스 뮤지컬과 창작뮤지컬, 대극장 뮤지컬과 중소극장 뮤지컬, 중소극장 덕극과 (대중적인) 소극장 뮤지컬이 그것이다. 예상할 수 있다시피, 각 그룹의 후자가 프로덕션 규모면에서 작게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뮤지컬 <힐링 인 더 라디오>는 가장 하위 그룹, (대중적인) 소극장 뮤지컬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때로는 극장의 140석을 다 채우지 못한 채 진행되는, 그야말로 작은 규모의 작품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번 공연이 초연이 아니라 3연이라는 사실이다. <힐링 인 더 라디오>는 2017년, 2018년에 이어 세 번째로 돌아왔으며, 앞으로 오픈런 공연도 계획되어 있다고 한다. 이런 결정은 전적으로 객석의 정서적 반응을 고려한 결과일 것이다. 오롯이 관객의 사연으로 채워지는 무대는 관객과의 정서적 밀착도가 높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힐링 인 더 라디오>는 대학로 소극장에서 언제든 관극이 가능한 상업극의 흐름을 타고 있으며, 공연의 속성상 새로운 배우로 새로운 시즌을 꾸려도 그다지 어렵지 않은 상황으로 전개될 것이 분명하다. 정확히 말해 이 작품은 뮤지컬이 아니라 음악이 있는 토크 콘서트 혹은 즉흥 공연이다. 작품은 ‘힐링 인 더 라디오’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보이는 라디오 방송을 공연화한 것이다. 공연은 오프닝 이후 ‘이 노래 뭐였지’, ‘뮤직 드라마’, ‘니가 필요해’의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노래의 한 소절을 듣고 곡목을 맞추는 관객에게 상품을 주는 ‘이 노래 뭐였지’, 관객의 사연을 바탕으로 한 단막극 ‘뮤직 드라마-마이 러브 스토리’, 미리 관객에게 받은 사연을 읽어주고 (캐스팅에 따라 실제 가수이기도 한) 극중 가수를 연기하는 배우가 사연에 맞는 노래를 선물해 주는 ‘니가 필요해’가 실제 내용이다.

 

 

정제된 극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따라서 2부, 뮤직 드라마가 전부다. 최진우라는 사연남이 동건, 수진과 친구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가 수진과 애인관계로 발전하면서 갈등하는 이야기를 담은 단막극이다. 청취자의 사연으로 만들어졌다는 설정은 1부, 3부와 달리 관객이 실제가 아닌 것을 믿게 만드는(make-believe) 가상, 즉 극중 설정으로 되어 있어서 극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드라마의 중간에 노래가 삽입되고 갈등이 형성되어 있으며 모든 페어의 공연에 동일하게 유지되는 드라마가 존재하기 때문에 뮤지컬과 가장 비슷한 양식이다. 그러나 이 단막극도 ‘청취자의 간단한 사연’에 의존한다는 컨셉트 때문에 극의 완성도보다는 1부, 3부와의 연결성에 더 치우쳐 있다. 보이는 라디오라는 설정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힐링 인 더 라디오>에서 극적 완성도는 심각하게 언급될 필요가 없는 문제다. 그것보다 이 작품의 공연성이 무엇을 목표로 두는가 하는 점이 중요하다. 거시적으로 보아 <힐링 인 더 라디오>는 관객이 자신의 사연을 들고 공연에 참여하는 형식을 취한다는 점에서 현재 공연계에서 떠오르는 화두인 ‘이머시브 공연(Immersive Theatre)’을 상기시킨다(12월 21일에서 2월 28일까지 공연될 영국발 뮤지컬 <위대한 개츠비> 역시 이머시브 뮤지컬로 화제에 올라 있다). 게다가 자신의 사연을 공연에 반영하려면 극장에 오기 전에 미리 사연을 보내야 하기 때문에 관객의 사전 참여도 및 자발성이 높아야 하며,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는 전제 조건도 있다. 공연 전 개별 관객의 참여도는 실제 극장에서 모두가 특정 사연에 공감하고 반응하는 과정을 통해 객석 전체가 일종의 정서적 공동체로 발전하는 토대가 된다. 객석이 ‘하우스’가 되는 체험인 것이다. 만약 이 작품을 뮤지컬로 호명한다면, 노래가 갖고 있는 정서적인 기능이 오로지 사연으로만 채워지는 3부에서 극대화되어 관객의 아픔과 행복, 슬픔과 기쁨을 위로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관극 시 이러한 장점은 분명히 인식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장에서 받는 인상은 연습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전체 공연의 틀만 상정해 놓고 즉흥으로 채워지는 토크 콘서트 현장에 온 것 같다는 것이다. 행사장 멘트에 가까운 정제되지 않은 대사, 배우들의 부족한 노래 역량, 애드립이 난무하는 상황, 마치 호객 행위를 하듯 진행되는 상품권 증정 시간… 가장 문제적인 것은 사족처럼 존재하는 1부와 2부다. 사실상 3부가 <힐링 인 더 라디오>의 모든 것임에도, 1부는 시작부터 관객의 정서적 몰입도를 과장되게 강조하고 2부는 거의 아마추어 극처럼 존재하며 3부에 선행한다. 배우의 수다와 연기는 예술적 가공의 과정을 생략한 것 같았는데, 그렇다고 코메디아 델아르테처럼 정교한 배우훈련의 결과물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힐링 인 더 라디오>는 그 유의미한 목적에도 불구하고, 다소 저렴한 대학로 소극장 상업공연으로 존재하고 있었고 향후 그 틀을 벗어나려 프로덕션 차원의 노력이 더해질 것 같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 작품에 굳이 공연의 질을 높이기 위한 정식 프로덕션의 과정을 입힐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대학로 뮤지컬씬을 구성하는 주체들에게 때로는 그들만의 존재방식이 가장 긴요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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