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쥐를 위한 농장은 없다
연극 <생쥐와 인간>
글_정다혜
원작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
번역 김수빈
각색 박해림
연출 민준호
제작 ㈜빅타임프로덕션
장소 대학로 유니플렉스 2관
일시 2019년 9월 24일 ~ 11일 17일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고들 말한다. 낭만적인 말이다. 꿈을 이루기는 힘들어도 그 꿈에 다가가기 위한 과정이 살아가는 데에 동기를 부여한다는 믿음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꿈에 가까워지려는 반복되는 노력들이 사실은 그 꿈을 이룰 수 없는 현실을 알아가는 과정이라면 어떨까. 이것이 밑바닥에서 정상에 오른 이들의 이야기가 많은 이들의 삶의 지침이 되기보다는 말 그대로 ‘성공 신화’로 소비되는 이유일 것이다.
연극 <생쥐와 인간>에는 이렇게 좌절되는 꿈들이 있다. <생쥐와 인간>은 존 스타인 벡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며, 자본주의의 모순이 드러나기 시작한 미국의 대공황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자신들의 농장을 사서 정착하고자 하는 가난한 청년 조지와 레니, 이 외에도 여성, 노인 등 상대적으로 약자인 인물들의 꿈이 어떻게 그 끝을 맞이하는지에 대해서 보여 준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제목인 <생쥐와 인간>의 생쥐, 인간은 어떤 목적으로 나열된 두 단어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조지와 레니는 집 없이 떠돌며 서로 의지하는 친구이다. 조지는 작고 왜소하지만 영리하며, 레니는 부드러운 것을 만지기를 좋아하는 거구의 지적 장애인이다. 두 친구는 자신들의 농장, ‘그곳’을 가질 꿈을 가지고 있다. 농장을 사기 위해서 남들의 농장에서 일을 한다. 농장에 있는 노인 잡역부 캔디는 농장 사람들이 자신의 노견을 냄새난다며 죽인 후 두 친구에게 돈을 보태며 농장에 함께 가기를 제안한다. 농장주의 아들이자 가부장적인 남편 컬리에게 억압받으며 살고 있던 컬리 부인은 집을 나가 배우가 되기를 꿈꾼다. 그러나 컬리 부인이 예기치 않게 레니에 손에 죽고, 이를 알게 된 조지가 캔디 영감에게 사실 농장은 없었다고 고백한 후 레니를 죽이며 이들 모두의 꿈은 좌절된다.
연극은 이렇게 농장으로 가기 전날부터 농장에서의 일까지를 다룬다. 연극에 나타나는 공간은 연못과 농장으로 한정적이라는 점에서 연극적으로 표현하기에 용이하다. 장면의 전환도 암전이 되는 잠시 동안 분주할 필요 없이 소품을 배우가 이동하여 이루어진다는 점도 어색함 없이 자연스럽다. 연못가의 자연물을 표현하던 나무 상자들은 농장 일꾼을 맡은 배우가 등장해 볏짚이나 곡식을 쌓듯이 옮기면 농장이 되고, 잘 준비를 하는 상황에서 침대처럼 길게 이어붙이면 농장 합숙소가 된다. 추가적으로 농장과 연못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나무 벽이 사용됐는데, 실내인 농장 장면들에서 나타났다가 연못 장면에서는 걷힌다. 소품인 상자의 표면을 넓고 길게 이어놓은 듯한 나무 벽은 통일감을 주면서도 공간의 구분은 확실히 되도록 돕는다.
1막과 2막을 구성하는 정서가 희망과 절망으로 극명하게 대비되는데 이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공간은 연극의 처음과 끝을 구성하는 연못이다. 연못이라는 공간은 나무 벽이 걷히고 그 뒤에 있던 밤하늘이 표현된 배경이 드러나며 제시된다. 연못에서 농장에 가기 전 꿈을 되새기며 조지와 레니의 뒤로 별이 총총히 수놓아진 밤하늘이 펼쳐진다. 음악소리가 커짐과 함께 농장 이야기를 하며 점점 더 아이처럼 들뜨고 흥분하는 두 사람은 보는 이들에게도 따뜻함을 준다. 이와 대비되도록 극의 마지막에, 레니가 컬리 부인을 죽인 후 도망쳐 나와 조지를 기다리는 곳도 처음의 그 연못이다. 똑같이 밤하늘에는 별이 빛나고 조지는 레니의 부탁에 따라 다시 한 번 더 농장 이야기를 해 주면서 레니를 죽이게 된다. 총소리와 함께 죽은 레니를 등지고, 가만히 별이 빛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조지의 실루엣만이 보이도록 조명은 어두워지며 연극은 끝난다.
똑같은 곳에서, 똑같은 하늘에 빛나는 별들은 관객에게 대비되는 두 감정을 부여한다. 첫 장면에서 조지와 레니가 자신들의 꿈을 말하며 눈동자를 빛낼 때는 그들이 그 별들과 같다는 느낌이 든다. 마지막 장면의 조지는 별 때문에 더욱 어둡게만 보인다. 태연하게 빛나는 별들이 야속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별은 원래 우주에서 보면 사실은 조금씩 우리에게 멀어지고 있는 것처럼, 어쩌면 처음부터 그들의 꿈은 그 별들만큼 그들에게서 가까웠던 적도, 가까워질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극이 진행되며 필연적으로 레니가 죽을 것이라는 예상을 했으나 그 끝이 진부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연출의 역할이 컸다. 이 장면들은 소품의 활용만큼이나 연출의 효과가 잘 드러났으며, 조명과 극 자체의 분위기와 어우러져 극을 더욱 아름답게 기억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인물들이 보여준 폭력적인 행동들은 결말의 비극적 아름다움에 다소 몰입을 방해하는 면이 있었다. 레니가 컬리 부인을 죽이기 전에도, 컬리는 레니를 거칠게 제압하려 하며 레니는 지나친 저항으로 컬리의 다리를 부러뜨린다. 이렇게 인물들이 서로를 폭력적으로 대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은 관객들이 눈앞에서 일어나는 입체적인 상황이다. 소설에서 텍스트로 그 상황을 상상하며 볼 때와 연극을 통해 볼 때는 그 장면이 주는 충격이 사뭇 다르다. 특히 극중 유일한 여성 인물인 컬리 부인이 처음으로 자신의 꿈에 대해 말한 후 이어지는 장면이 그녀가 저항하지도 못하고 죽는 장면이라는 점은 불편함을 준다.
레니는 악의를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관객들은 알기에 그의 소박한 꿈을 진심으로 응원했다. 그래서 레니와 그를 직접 죽일 수밖에 없는 조지, 두 친구의 결말은 물론 충분히 애절하다. 그러나 레니가 지적 장애인이라는 설정에서 지적 장애인을 대하는 방식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레니가 해한 개체들이 말 못하는 생쥐, 새끼 강아지라는 작은 동물에서 사람까지 다양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어찌 보면 레니의 죽음은 합당한 결과라고 느껴진다. 그가 지적 장애인이라는 게 비단 살인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으며, 지적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형성하고 강화할 수도 있다는 염려를 하게 된다. 극에서 해당 장면들이 꼭 필요한 장면임을 감안하더라도 인권 문제에 대해 인식이 달라진 만큼 각색에서의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연극은 감수성이 예민한 최근의 관객들에게 조금은 부정적으로 다가온 장면도 존재한다. 원작에 비해 점점 더 개선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이 과정이 불편한 요소들과 헤어지는 과정이 되기를 기대한다. 이러한 한계에도 작품이 주는 메시지는 충분하다. 시작에서는 타국의 수십 년 전 이야기가 지금의 한국 관객과 어떤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그러나 의문이 무색하게 결말이 주는 위로와 무력감이라는 양가적인 감정은 세상과 타협하며 사는 현대인들의 것과 닮아 있다. 조지와 레니의 농장은 염원할수록, 농장을 살 돈을 벌기 위해 무언가를 할수록 그들에게서 멀어진다. 정확히 말하면 처음부터 자신들을 위한 농장은 없었다는 것을 깨달아 간다. 다리를 저는 노인, 집을 나가고 싶어 하는 여인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친구를 잃고, 죽었다. 이 연극에서 피해를 입지 않은 인물은 이미 안정적인 자신들의 상황에 안주하는 농장 사람들뿐이다.
현대에는 더 다양한 꿈을 가진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을 이루지 못함은 크게 다르지 않다. 소수의 대기업은 부를 축적할수록 그 몸집을 키우고 대부분의 이들에게는 그 사이를 비집고 설 공간조차 부여하지 않는다. 일례로 영화관의 독점상영으로 다양성 영화들이 극장에서 보기 어려운 것이 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의, 그리고 자신의 꿈이 좌절을 통해 절망감을 느낀다. 돈이 없어서, 돈을 벌 수 없어서 결혼, 집, 취업, 심지어는 연애까지 포기한다. 조지와 레니, 캔디 영감과 컬리 부인과 지금의 우리들, 그리고 레니의 주머니에서 죽어 있던 생쥐가 얼마나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원작이 창작될 당시부터 2019년 한국에서 연극으로 공연될 때까지 상황이 얼마나 나아졌다고 할 수 있을까? 선뜻 답을 하기가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