를 생각하는 시간

연극 <낙원>

 

글_조종일

   김주희
연출   임범규
제작   프로젝트1인실
장소   창동극장
일시   2019년 11월 21일 ~ 12일 1일

 

 

다시금 떠올린 플라톤의 세계

‘철학’이란 말은 언제나 어렵다. 경제학은 경제를 연구하는 것이고, 사회학은 사회를 공부하는 것이다. 그런데 철학은 어떤 것을 연구하는 것인지를 쉽게 알 수 없다. 연구대상부터 추상적인데다, 접근도 어렵고, 남에게 설명해 주는 것도 상당히 어렵다. 철학의 쓸모에 대한 고민과 더불어, 이리저리 치이면서 사는 현대인들에게 철학적 사유는 더욱 멀게만 느껴질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어려운 철학이라 할지라도, 나름대로 이에 대한 이미지는 갖고 있다. 사람들을 대상으로 ‘철학’하면 떠오르는 것에 대해 질문하게 되면, 여러 대답이 나올 것이다. 종교에 관련된 것, 칸트나 헤겔과 같은 근대철학, 유교나 도교와 같은 동양철학, 혹은 한국 유학자인 이이·이황 같은 것이 그러할 것이다. 이외에도 많은 답이 있겠지만, 가장 많은 답은 분명 ‘그리스’와 관련된 무언가일 것이다.

 

 

현대의 철학은 유럽 근대철학의 연장선상에 있고, 유럽의 철학은 르네상스 이후 다시금 존재감을 발휘한 그리스 철학이 근간을 이룬다. 그 중 플라톤의 이데아는 그리스 철학의 정점이라 평가된다. 그의 이분법적 세계관은 후대의 사상이 형성되는 데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플라톤 철학의 특징 중에 주목해야 할 건, 플라톤은 자신의 철학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신화와 설화를 활용하곤 했다는 점이다. 그 중엔 또 다른 작품들의 모티브가 되어 새롭게 태어난 경우도 있다. 김주희 작가의 『낙원』에선 플라톤 설화인 ‘추니설화’를 모티브로 활용하며, 이를 통해 사람의 관계에 대해 얘기한다. 가벼운 맘으로 찾은 극장이었으나, 생각할 거리를 듬뿍 안고 가게 됐다. 개인적으로는 다시 플라톤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 계기가 됐다고 생각한다.

 

 

작지만 작지 않은 적지만 적지 않은

극장은 작았다. 명동극장이나 세종문화회관 같은 극장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작았다. 객석에 앉아 손을 뻗으면 무대에 닫을 것만 같았다. 무대는 뒤편이 천으로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규모를 알 수 없었으나, 그렇게 크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극장이 작아서 몰입에 한계가 있지는 않을까 걱정도 했으나, 막상 몰입하게 되니 그러한 걱정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자그만 무대를 최대한으로 활용하려는 노력이 보였다.

 

 

우선, 공간의 활용이 돋보였다. 무대 위의 무대장치를 최소화하여 배우들이 활동하는 영역을 최대한 확보했다. 무대장치로는 계단과 책상과 문이 전부이며, 소품 역시 공책 말곤 전무하다. 극이 진행됨에 따라 필요해 보이는 장치와 소품이 있긴 했다. 하지만 환경을 고려하면 배제하는 것이 마땅했다 생각된다. 나무의 경우는 무대의 규모를 고려해 보았을 때, 관객의 시야와 배우의 동선을 방해하게 된다. 칼과 같은 경우에는 배우들이 안무 도중 상해를 입을 우려가 있다. 문을 고칠 때 쓴 망치 역시 마찬가지이다. 장치와 소품의 배제와 더불어 조명, 음향, 안개 등의 특수효과가 활용되는데, 분위기를 사뭇 웅장하게 하여 무대를 넓어 보이게 한다.

 

 

위의 과정을 통해 확보된 공간은 배우들의 동선과 안무로 채워진다. 배우는 단 둘 뿐인데, 둘은 계속 움직이며 비어 있는 무대를 채운다. 멈춰 있는 때는 거의 없다. 멈춰 있다 하더라도 계속 격한 안무를 추면서 무대 위에 생동감을 부여한다. 또한 안무를 통해 무대장치의 활용을 극대화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무대장치 중엔 문이 존재한다. 정확히 말하면 문 모양의 틀이다. 이 장치는 무대 위 중앙에 위치하여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쓰인다. 공연 시작 부분에서 배우가 문을 사이에 두고 데칼코마니처럼 서로의 안무를 따라한다. 여기서는 문이 거울로 쓰임을 알 수 있다. 중반 이후 문은 다시 입으로 바뀐다. 여기에선 안무를 활용해 사람이 사람을 먹는 것을 표현한다. 안무의 변화로 하여금 무대장치의 역할을 바꾸는 것이다.

 

 

사라진 것들은 어디로 갔는가

이번 공연에서 특이했던 점 중 하나를 꼽자면, 인물에 이름이 없었단 것이다. 배우의 배역을 소개하며 남성을 ‘가’로 여성을 ‘나’로 지칭하긴 했다. 허나 이는 형식적인 이름이지, 무대에서 활용되진 않아 이들의 이름을 알 순 없다. 사실 이들에겐 이름이 필요하지 않다. 필요한 인물이 두 명 뿐인데다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니, 사실상 이름은 없어도 괜찮다. 서로를 부르는 특별한 호칭은 필요 없다. 그저 서로에게 있어 ‘나(I)’와 ‘너(You)’만 존재할 뿐이다. 또한 이름이 없기 때문에 관객들이 어떤 특정한 인물의 이야기가 아닌, 보다 세상에 만연한 보편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이게끔 한다.

 

 

이름 말고 공연에서 없는 게 하나 더 있다. 앞에서 언급한 장치인데, 바로 나무이다. 앞에서는 나무의 배제를 통해 공간을 활용한 점을 언급했다. 헌데, 칼이나 망치와 달리 나무는 극의 흐름에 있어서 중요도가 남다르다. ‘나’는 폭풍우가 몰아쳐 나무가 갈라지는 것을 보고, ‘가’와의 관계에 대해 사유하기 시작한다. 이렇듯 나무는 극의 진행에 있어 중요하게 작용한다. 그렇지만 배제된다. 중요한 장치를 이렇게도 과감하게 배제할 수 있었던 건 적당한 대체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공책’이다. 공책은 공연의 거의 하나뿐인 소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책의 존재 이유에 대해 관객들은 생각하게 된다. ‘가’가 문을 고치는 동안에 ‘나’는 바닥에 누워서 공책을 펼친다. 공책이 펼쳐지는 모습을 정면에서 보게 되면, ‘ㅣ→V→ㅡ’처럼 나타난다. 폭풍우로 나무가 갈라지는 과정과 일맥상통한다. 공책을 펼치는 것을 통해 나무의 모습을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다. 또한 공책은 종이의 집합체라 할 수 있고, 종이는 나무로 만들기 때문에, 공책의 본질을 쫓다 보면 나무에 이르게 된다.

 

 

문으로써 활용되는 입의 역할

무대의 중앙에 있는 문은 상황에 따라서 다양하게 활용된다. 공연 중반 이후 문은 입으로 바뀐다. 일종의 치환인 셈이다. 공연에선 입을 통해 관계에 대해서 얘기하며 이러한 입의 역할을 세 개 제시한다. 첫 번째는 키스, 두 번째는 대화, 세 번째는 무언가를 먹는 행동이다. 세 가지 행위 다 입이 없을 경우에는 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리고 세 가지 행위 다 서로 다른 둘 사이에서 일어난다.

첫 번째는 키스다. 여기서 말하는 키스는 입을 맞추는 행위를 뜻한다. 키스는 모두가 알다시피,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하는 행동이다. 사랑의 표현의 일종인 셈이다. 키스를 하면서 입과 입을 맞댄 것은, 문과 문을 활짝 여는 것과 같다. 이는 매우 보편적인 상징이다. 인기 영화 『겨울왕국(Frozen)』의 OST ‘사랑은 열린 문(Love is an open door)’을 비롯해 여러 장르에서 활용됐다.

 

 

두 번째는 대화다. 대화는 사랑뿐 아니라, 인간의 관계를 형성함에 있어 가장 기본을 이룬다. 대화를 한다는 건 둘 사이에 공통된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일단 언어가 통해야 한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쓰면서 대화하기란 불가능하다. 대화가 통한다 하더라도, 서로 공통점이 없는 경우에는 대화가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다. 대화를 문으로 비유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게 발견된다. 한자에선 말(問)하거나 듣(聞)는 것을 문(門)을 통해 표현한다. 특히 말하는 행동은 문(門)과 입(口)이 합쳐진 형태로 나타난다. 공연에서 사용하는 문과 입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동아시아뿐 아니라 그리스 철학에서도 대화의 의미는 남다르게 작용한다. 소크라테스는 대화를 통해서 인간관계 형성을 넘어서 진리에도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상은 플라톤에게로 계승됐다.

 

 

마지막은 먹는 행동이다. 공연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도 이것이다. 관계와 관련해 앞서 말한 키스와 대화는 다소 보편적인 데에 반해, 무언가를 먹는 것은 일차원적이면서도 쉽게 떠오르지 않는 행동이다. 분명 서로 다른 둘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인데도 쉽지 않다. 약육강식이란 자연법칙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인지도, 인간의 존엄성 아래 식인풍습을 규제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공연에선 이를 통해 관계에 대한 사유를 하나 제시한다. ‘가’는 ‘나’를 먹고, 결국 ‘나’는 ‘가’의 뱃속에서 소화되어 사라진다. 이것이 바로 키스나 대화와 다른 점이다. ‘1+1=2’가 아닌 ‘1+1=1’이 되기 때문이다.

 

 

 를 생각하는 시간

문은 무엇인가. 문은 공간을 나누는 물건이다. 이와 함께 공간을 연결해 이어주는 역할까지 한다. 문이란 것은 자체로 서로 모순되는 것이 공존한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서로 모순되는 것이 공존한다. 관계뿐 아니라 세상사는 이치 역시 그러하다. 『낙원』을 관람한 후, 오랫동안 묵혀뒀던 고민을 스스로 풀어놓게 됐다. ‘1+1=2’라고 분명 배웠는데, 때론 ‘1+1=1’이 되는 때도 있다. ‘2>1’라고 분명 배웠는데, ‘1>2’가 되는 때도 있다. 하나가 나눠져 둘이 되었다면, 원래 있던 하나가 진정한 하나라고 할 수 있나 싶을 때도 있다. 세상에 치이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지내는 동안에, 모순된 세계에 낙원이 있을까 싶었다. 그럴 때엔 잠시 멈춰 ‘나’와 ‘너’와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해 사유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낙원에 대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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