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 반 호브 연출의 <로마 비극>
그의 ‘혁신성’은 어디서 발원하는가?
글_나진환(성결대 교수/연출가)
연출 이보 반 호브(Ivo van Hove)
제작 인터내셔널 씨어터 암스테르담(ITA)
장소 LG아트센터
일시 2019년 11월 8일~10일
이번 엘지 아트센터에서 올린 이보 반 호프(Ivo Van Hove) 연출의 <로마 비극>(11월 8일~10, 엘지아트센터, ITA)은 셰익스피어의 비극 3편을 모아 만들어진 작품이다. 필자는 이번까지 이 연출의 3편 작품(2017년 아비뇽 연극제 개막작인 <The Damned>과 <Opening Night>)을 보았고 마침내 이 연출가의 공연들이 필자에게 전달해준 의미에 대하여 정리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오늘날 가장 혁신적인 연극 작품을 선보이는 연출가로, 유럽뿐만 아니라 미국 브로드웨이에서도 성공적으로 활동을 하고 있는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연출가 중 한 명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ITA(International Theatre Amsterdam)의 예술감독으로 취임한 이래 연간 11만 명 이상의 관객을 모이게 한다.
아서 밀러 작 <다리에서 바라본 풍경>으로 2015년 올리비에 상, 최고 연출상, 작품상을 수상했고 이듬해 브로드웨이에 진출해 토니상에서도 역시 최고 연출상, 작품상을 거머쥐며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그가 이번 내한 공연에 오지 못한 이유도 12월 개막작인 <웨스트 사이트 스토리>의 연출을 맡았기 때문이다. 그는 희곡뿐만 아니라 영화나 소설의 원작 등을 탁월한 해석과 혁신적인 재구성을 통하여 그의 진가를 마음껏 발휘한다.
이번 엘지아트센터에서 상연된 <로마 비극>은 2007년 세계적인 연출가로서 주목 받기 시작한 작품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그는 셰익스피어의 3작품, <코리올라누스>, <줄리어스 시저>, <안토니오 & 클레오파트라>을 순서로 대로 그의 중심 테제를 중심으로 재구성해서 만든 연작 작품이다. 같은 배우, 한 무대에서 배우들은 작품마다 각각 다른 역할을 수행하고 무대는 조금씩 배우들이 바꾸어 나가면서 작품을 이어간다.
이번 작품, <로마 비극>의 무대는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현대적인 커다란 카페이다. 바가 있고 둥그런 실내조명 여러 개가 천정으로부터 내려와 있고 소파들과 화분들이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전형적인 현대적 카페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무대 정중앙에 두 유리 벽 사이로 나있는 ‘통로’가 있는데 그 안에서 극의 모든 죽음이 이루어진다. 즉, 그 통로는 죽음을 상징하는 ‘특별한 장소’가 된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거나 사건이 바뀌게 되면 관객들은 무대나 객석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아니 그러기를 장내 아나운서가 요청한다. 즉, 장면이 바뀔 때마다 배우들에 의하여 무대의 장치들이 변화되고 관객들의 무리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무대 위에 자유롭게 위치할 수 있다. 무대 속의 관객 또한 무대 장치의 하나로 계속해서 변화해 나간다. 즉, 배우와 관객에 의하여 무대는 끊임없이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무대 위의 카메라는 배우들이 어떤 장소에 있든지 카메라가 촬영을 하여 동시적으로 그 영상이 무대 위의 여러 모니터에 나타난다. 무대 정면에는 매우 큰 스크린이 있어 무대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주요 사건들을 보여주고 각 무대 전체 여러 곳에 마련되어 있는 작은 모니터 속에도 배우들의 모습을 동시에 담아낸다.
그렇다면 왜, 무슨 이유로 그는 이렇게 세계적인 연출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을까? 단순히 앞에서 열거한 관객이 무대 위로 오르고 배우의 연기를 동시 다발적으로 영상에 보여주는 장치 때문일까? 그러한 것 때문에 세계인이 열광하는 혁신적인 연극작품이 된 이유일까? 하지만 이런 것들은 이미 다른 연극 예술가들에 의하여 사용되었진 연극 언어들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을 혁신적으로 만드는 근본 이유는 뭘까?
필자가 여기서 말하는 ‘혁신적’이라고 하는 것은 연극언어의 새로운 발명이 아니라 해석의 내용과 그것을 표현하는 여러 연극 언어의 새로운 조합방식이 만들어 내는 ‘연출 미학’에 이다. 즉, ‘연극의 근본적 본질’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혁신적 모양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극 언어와 그 연출 형식은 과학 문명과 함께 항상 발전한다. 무대 장치술의 발전, 조명과 영상 등의 기술발전을 통하여 예전에는 무대 위에 실현하지 못했던 연출의 상상력을 발휘시키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만이 혁신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그야말로 ‘발명’일 뿐이다. 기술의 발명은 예술과 다르다. 기술의 발전은 단지 수단이며 그것을 미학적으로 처리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필자는 이러한 논지를 염두에 두면서 연극 언어와 연출의 형식을 드려다 보기 전에 우선 작품 해석의 ‘혁신성’을 주목해 보려고 한다.
1. 이 작품의 테제
정치란 무엇인가?
정치는 인간 삶에 어떻게 중요한 환경이 되는가?
그 환경은 인간의 삶에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
정치는 환경 결정론적 의미를 가지는가?
그는 한나 아렌트의 말, “정치는 각 개인들이 말하고 행동하며, 새로운 시작을 만들어가는 가능성을 결정해주는 것” 이라는 표현을 인용하면서 그의 사상을 설명해 나간다. “정치는 세상에서 성취 가능한 것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반면, 진실은 철저하게 무관심하다.” “따라서 정치는 절대적인 진실과 반대되는 것이다.”
연출가로서의 필자는 인간 자체의 본질적인 질문에 관심이 있다. 환경이나 어떤 세계에 의하여 비극적으로 변해가는 인간의 모습을 관찰하는 것보다는 그 속에서 인간이 반응하는 본질적인 메커니즘과 그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 진실의 폭로에 관심이 모아진다. 동시대적 현실 속에 존재하는 인간과 세계의 관계 속에서 파괴되어 가는 인간의 감정의 모습이나 형편 그리고 그것의 시사성이 내포하는 인간 사회의 의미는 내가 주로 다루는 연출의 테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작품의 주제는 매우 동시대적인 시사적 맥락을 고수한다. 무대 곳곳에 장착 돼 있는 모니터 속에는 셰익스피어 당시의 문제들이 여전히 오늘날에도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에 그 모니터 속에서는 각국의 현재적 정치현실, 즉 각 개개인의 가능성을 결정해 주는 것들로 인해 일어나는 강렬한 충돌의 현상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의상 또한 현대인의 정치인의 복장 즉, 소위 양복이라는 정장을 입는, 로마시대의 역할을 맡은 배우들이 뉴스에 출현하여 자신들의 담론을 주장하고 여러 모니터 속에선 그러한 담론의 결과로 자신들의 가능성들이 자신들 의지와는 무관하게 결정되어 벌어지는 여러 가지 현대의 사실적인 사건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여기서의 혁신성은 셰익스피어의 이 3작품들의 해석의 새로움에 있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정치로 인하여 몰락하는 인물들의 비극의 보편적 현상을 철저하게 고수했다는 점에 있다. 고수하되 현재화하며, 현재화하되 보수적이지 않고 새롭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보편적’이라는 말은 4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며 다만 그 형식이나 모양이 다를 뿐이라는 것이다.
<코리올라누스>에서는, 거칠지만 자신의 신념만을 말할 줄 아는 아부 못하는 비정치적인 인물로 로마를 구한 전쟁의 영웅, 코리올라누스의 몰락을 그렸다. <줄리어스 시저>는 그의 특출한 능력으로 인해 정치체제의 변화를 두려워한 자들에 의해 죽음을 당한다. 이 과정에서 이 정치적 문제는 인간의 신뢰와 우정마저도 깨뜨리게 한다. <안토니오 & 클레오파트라>는 정치적 권력의 문제로 가정과 사랑을 파괴해 버린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이 연출가는 오늘날의 현실에 더욱 밀착시키면서도 그것을 강요하지 않고 그 자체를 관객에게 보여주는 연출의 능력에 속에 이 내러티브의 생명력을 시각화시킨다.
즉, 이러한 것이 가능하게 하려고 이 연출가는 3가지의 강력한 역사적 비극의 작품을 연출가의 프리즘을 통해서 만들어진 사건들의 재구성 속에 더욱 밀착시켜 강력하게 변화시킨 ‘내러티브의 밀착력’을 극대화 한다. 관객이 무대 위에 올라 자유롭게 자리를 잡고, 무대 위에 만들진 카페의 바에서 직접 커피를 사 먹고, 장면 마다 무대 장치를 바꾸고 그때마다 동시에 관객 또한 무대 위와 객석에서 자리를 바꾸는 다소 어수선한 것을 마다하지 않는 것은 역시 말하고자 하는 주제들의 확실성 즉, 내러티브의 강렬함을 더욱 강조하기 위한 역설적이고 역동적인 방식을 과감하게 차용한다는 의미이다.
단지 현재 정치라는 직접적인 시사성을 날것으로, 아니 날것 일 수밖에 없는 보다 생생하고 강렬한, 하지만 뉴스 같은 정치 시사극이 아닌 연극예술의 관점에서 내러티브 구조를 미학적으로 현재화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의 테제적 혁신성은 고전 자체의 먼 이야기도 아닌 그렇다고 현재 진행 중인 거칠게 다가오는 시사적 뉴스도 아닌 현재적인 미학적 측면을 철저히 지키면서도 인간 비극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간결하면서도 밀도 있는 풍부한 이야기의 ‘주제적 테제의 힘’에 있다는 것이다. 고전은 인간의 보편성을 담는 그릇이기에 필자도 고전 소설을 현재화하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다. 그런데 이 연출가의 주제적 미덕은 마치 운명이라는 거대한 힘이 인간의 삶을 결정해 버리는 것처럼, 정치가 한 인간들의 삶을 결정해 버리고 파괴시키는 이야기의 전개 과정과 그 과정에서의 인간의 고통을 현재의 문화적 감각으로 ‘내러티브의 밀착력’을 훌륭하게 표현해 냈다는 것이다.
자, 그럼 이 현재적 문화감각으로 이루어 낸 ‘내러티브의 밀착력’을 가능하게 한 연출력은 무엇일까?
2. 연출미학과 그 방식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연출의 모든 방식의 핵심은 어느 때보다도 강력하게 배우예술의 힘에 의존한다는 본질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연극의 핵심 요소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사건의 에피소드를 이어가는 장소를 파편화시켜 다초점화시키고, 이러한 것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관객을 이 사건의 에피소드의 장소에 ‘역사의 증인’처럼 앉게 하고, 객석의 관객을 움직이게 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방식을 취하는 것도 사실은, 역설적이게도, 배우의 연기 앙상블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방식으로 작동시키기 위한 장치이다.
어쩌면 사건이 바뀔 때의 무대 변환을 위한 3~5분간의 끊임없는 관객의 위치 이동의 무질서는 오히려 연기의 앙상블의 강렬함으로 빨려 들어가고 이것이 흡입력의 에너지를 더욱 가공할만한 에너지로 극대화시킨다. ‘내러티브의 밀착력’은 이러한 배우들의 흡입력 속에서 동시에 토네이도가 되어 더욱 증폭된다. 이 증폭된 폭발력은 각 스크린의 영상 속에 담겨 배우들의 가장 섬세하고 디테일한 연기의 결과의 모습을 매우 세밀하게 감각적으로 밀착시킨다. 영상을 드러내는 스크린의 쾌적한 빛은, 물질성 측면에서, 현실의 감각과 동떨어진 인위적인 것이 아닌 현재 무대에서 존재하고 있는 배우 실존적 몸과 다르지 않는 또 다른 물질성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작용한다. 그러기에 영상의 시간적 특성 즉, 영원히 과거일 수밖에 없는 특성을 동시성 속에서 배우들의 존재감을 확산시켜주는 도구로 변환되는 것이다. 이 영상의 빛으로서의 역할과 물질성, 확산성, 동시성은 배우들의 존재감이 만들어 내는 연극의 본질적 존재감을 더욱더 증폭하여 비극성의 강렬함을 폭발시킨다.
이 강력한 폭발력이 영상 속에 담긴다. 폭발력은 한 방향이 아니다. 폭발은 한 순간이고 동시적이지만 그 폭발의 파편과 열기, 에너지 등의 확산의 속도와 방향, 방식은 제 각각이고 다양하며 다층적이다. 이러한 다층성과 다양성 속에서 관객은 연극의 직접적인 힘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배우 연기예술의 강력함으로 발전된 영상 기술을 사용하는 방식이 바로 혁신성을 만들어 내는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5시간 45분간의 어수선한 많은 관객의 이동과 다양한 사건과 에피소드의 혼재, 여러 가지 역할을 작품마다 바꾸어가며 연기하는 배우들의 대한 인식의 혼란, 끊임없이 변화되는 무대 장치들, 이곳저곳에 혼재 되어 있는 모니터들, 그 속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거칠고 생생한 카오스적 폭력의 영상들도 배우의 연기 앙상블의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 이 힘을 더욱 거대하게 만드는 원료로 사용된다. 때문에 파편처럼 어수선한 무대의 이미지와 이야기들은 하나의 거대한 밀착 속으로 우리를 빨아들인다. 즉, 끊임없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무대의 변화를 매력화시키는 것, 데리다의 용어를 빌리자면 ‘차연’(differance)를 매력화시키는 것은 바로 강력한 배우들의 연기의 힘이라는 것이다.
이 리뷰에서 배우연기를 분석하는 것이 핵심은 아니지만, 대사의 측면을 잠시 살펴본다면, 소쉬르의 기의, 기표에 근간을 둔 대사의 전달이 가져다주는 일상의 정서만의 궤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의 상태가 뿜어내는 소리, 외침, 숨소리, 떨림 등의 요소들이 그 기표와 기의의 관계 변질시키고 훼손시켜, 몸의 상태의 소리, 즉 물질적 소리로 새롭게 진화시킨다.
아비뇽에서 본 코메디 프랑세즈 배우들과의 함께한 그의 연출작 <The Damned>에서도 여전히 이러한 방식은 유효하다. 거대한 영상이 배우들의 연기를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가 만들어낸 역할의 존재의 힘이 그 영상에 담겨 강력한 물질적 에너지로 바꾸어 연극 에너지의 원천인 현재적 쌍방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현재의 공간’으로 만들어 버린다.
우리가 군중 속에 있을 때, 우리는 한 명의 생명을 가진 인간이 아닌 그냥 ‘군중덩어리’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 시대의 ‘군중’이라는 무질서하고 익명성으로 무장된 폭력적 카오스가 만들어 내는 시끄러운 소리로 인해 한 생명, 한 생명의 고통을 듣지도 보지도 못한다. 하지만 이 작품에선 배우들의 강력한 연기의 힘을 통하여 그들의 고통을 군중 속에서 ‘떼어내어(put aside)’ 섬세하고 침착하게 들여다보게 한다. 그리고 그러한 법을 배우게 한다. 관객에게 침착함 속에서 명철과 통찰을 부여한다. 필자는 이것을 뤼시디테(프랑스어 Lucidité, 영어 lucidity)라고 부른다. 즉, 연극 속에 나타난 세계와 인간에 대한 것을 ‘침착함 속에서 명철하게 통찰’하는 것이다.
연극의 본질적 사명 중 하나인 이 세계와 인간에 대한 ‘명철한 통찰’을 현재적인 연극적 방식으로 풀어내는 것이 이 작품의 ‘본질적인 혁신성’이다, 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보 반 호프는 <로마 비극>에서 그의 현재적 연극언어를 배우예술의 본질적인 힘으로 재무장하여 대중 속에서 잊고 있었던, 그리하여 단지 군중의 덩어리 속에 안심하고 있는 우리들을 떼어내어 하나의 개성과 인격과 이름을 가진 인간이라는 것을 드디어 보게 하고 자각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