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몽의 숲에서 길을 잃다 

연극 <한여름 밤의 꿈>

 

글_윤진현(연극평론가)

 

원작   W. 셰익스피어
번역   마정화
윤색·드라마터그   황이선
연출   문삼화
단체   국립극단
장소   명동예술극장
일시   2019년 12월 4일~29일
관극일시   2019년 12월 26일

 

 

가혹하다. 성찬을 즐기며 신나게 음식을 먹다가 상한 디저트를 물고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게 된 기분이랄까. 2019년 마지막 명동예술극장의 레파토리가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이라는 것을 알고 안도했었다. 최소한 이번 연말에는 즐거운 일이 하나는 있겠구나. 그러나 연극이 끝났을 때 참담했다. 이것을 뭐라고 말해야 할까? 뒤늦게 기사를 검색해 보았다. 고전 새로 읽기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식이라면 고전 마구잡이 읽기에 가깝다. B급 코미디로 돌아온 <한여름 밤의 꿈>이라지만 B급이란 실재하지만 제도적으로 조명받지 못한 감수성, 제도적으로 은폐되고 억압된 가치의 폭로이다. 이번 국립극단의 <한여름 밤의 꿈> 어디에 B급이 있나? 게다가 <한여름 밤의 꿈>으로 B급이라니 형용모순이다.

셰익스피어 중기 낭만희극을 대표하는 <한여름 밤의 꿈>은 완벽이라는 말로도 충분하지 않은 빼어난 작품이다. 여기에는 극적인 모든 것이 있다. 자연과 이미 주어진 제도의 힘, 세대 간의 갈등,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마성적 실재와 이 마성적 존재들조차 어쩌지 못하는 사랑의 세계, 이 근원적인 비극적 혼란과 갈등을 통과하며 평정에 도달하는 전통적인 희극형식의 탁월성과 도저한 예술적 낙관주의, 극중극 ‘피라모스와 티스베’란 러브스토리의 깊이, 이를 표현하는 평범한 직공들의 놀이하는 연극의 세계….

 

 

의미를 두자면 이 모든 것들은 하나하나 공들여 토론하고 음미하며 경탄해마지 않을 성찬의 요소들이다. 이것이 기품있는 궁중 정찬이든 호사스러운 서양식 디너파티든 청소년들의 발랄한 분식파티가 되었든 무엇이든 가능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밤을 지새고 새로운 태양과 함께 새로운 날을 시작하는 것을 허락한다. 덕분에 지난밤의 꿈은 제목 그대로 짧은 여름 밤, 온갖 고통스러운 현실과 두려움과 공포와 우려가 뒤섞여 있지만 희망과 용기로 이 모든 것을 기이한 길몽으로 바꿔내는 힘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이처럼 처치곤란한 흉몽으로 이끌었을까?

헬레나를 사랑하는 디미트리어스와 허미아를, 허미아를 사랑하는 라이샌더와 헬레나를 짝지으라 명한다고? 전혀 사랑하지 않는 두 쌍의 남녀를 짝지으라는 테세우스의 악의적인 명령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이들 인물은 심지어 테세우스의 그러한 명령에 따라 웃으며 고분고분 결혼을 한다고?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사랑을 믿지 않으며 인간을 아낄 줄 모른다. 곁가지 말이지만 힙폴리타가 테세우스와 결혼하길 원하지 않는다는 해석 또한 근거없고 자의적이며 <피라모스와 티스베>를 연습하는 직공들에 대한 희화화도 충분한 근거가 부족하다.

도대체 왜 이러한 조합을 생각해낸 것일까? 자식을 소유물로 여기던 전근대 사회, 젊은이들의 사랑을 인정하지 않는 기성세대에 저항한다는 스토리는 현대인에게는 진부하게 느껴지겠지만 이 사랑의 자유는 그야말로 수많은 연인들이 목숨을 바쳐 쟁취한 것이다. 1970년대까지도 한국에서는 사랑에 빠진 허다한 젊은이가 부모의 허락을 얻지 못해 죽음을 택했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볼 수 있듯 이러한 극단적인 선택은 사랑의 도피가 그다지 달콤하지도 성공적이지도 않다는 경험적 진실과 병진하였다.

물론 딸의 사랑을 인정하지 않는 허미아의 부친을 피해 이들 젊은이가 들어간 숲은 이들의 생각처럼 쉽게 통과할 수 없다. 이들은 고단하고 배고팠으며 거칠고 험한 잠자리를 감수해야 했고 심지어 평생 계속될 것이라고 믿었던 사랑이 변하는 현실에 직면했다. 기성세대의 지지를 얻지 못한 사랑이 감내해야 하는 가난하고 고달픈 바로 그 현실을 의미한다.

 

 

현대적 질문은, 헛사랑풀이든 뭐든, 허미아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여 자신을 버리고 떠났던 라이샌더를 다시 허미아가 받아들일 수 있느냐이다. 사랑하는 마음에 쫓아오기는 했으나 시종일관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던 남자가 갑자기 자신을 사랑한다고 하면 헬레나는 어떻게 이를 믿을 수 있느냐이다. 변화하는 사랑, 사랑의 한시성을 넘어 평생이란 인간의 긴 시간을 함께하려면 인간은 무엇에 기반해야 할 것인가? <한여름 밤의 꿈>은 그러한 일시적 변화를 용인하는 시간을 제안한다. 짧고 뜨거운 한여름 밤, 무엇인지 모를 것에 홀려 한번쯤 실수하는 일은 이상하고 기이한 꿈, 개구쟁이 요정의 장난으로 치부하자는 것이지만 이러한 희극적 결말에 모든 연인들의 문제거리이며 생각거리를 남겨둔 것이 역시 셰익스피어의 위대성이기도 하다.

 

 

이 기괴한 각색의 저변에 어떤 새로운 세태가 깔려 있는 것인지 오래 생각했지만 판단이 쉽지 않다. 설마 오늘의 세태가 다시 사랑을 불신하고 인간의, 젊은이의 운명을 누군가가 강제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일까? 이 흉몽의 숲에서 이들과 내가 함께 벗어나 숲을 이해할 수 있기를 안타깝게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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